어떤 날의 일기는 날씨로만 채워지고
휘민
귀는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드는 아이
태아처럼 웅크려 누운 늙은 개의 등허리가
독거의 익숙한 표정이 될 대
손금이 기록하지 않은 경험들이 모여 사는
기억의 집에도 주광색 형광등이 켜진다
TV에선 만날 전세대란이라 떠들어대지만
그녀의 반지하 전셋집은 내놓은 지
석 달이 넘도록 끔쩍을 않는다
인기척이 그리운 그녀의 귀는 창밖으로 흐르는
발자국들을 헐한 밥상 위로 끌어당기고
주름 많은 입술은 이 모든 게 날씨 탓이라고 투덜거린다
침 냄새 흑연 냄새 진동하는 그녀의 일기장 속
일기는 언제나 흐림 또는 흐리다 비
어떤 날의 일기는 날씨로만 채워진다
백지로 비워둔 자리는 대체로 흐렸던 그날의 기분이거나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던 외로움의 크기
귀울음을 삼키던 옹이 박힌 심장이 박동을 늦출 때
죽음은 경혈을 짚어가듯 그녀의 몸에 등압선을 그린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 열쇠 꾸러미가 쩔렁거려도
끝내 열 수 없는 문 하나가 있다
백지 위에서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비문
일기를 쓰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창문을 연다
일일연속극이 끝나자 두부장수의 방울 소리가 켜진다
간유리를 깐 듯 나날이 회색으로 치닫는 하늘
오늘도 그녀의 눈앞에는 잠자리 날개가 지나가고
기압골의 영향으로 오후에는 또 한 차례 비가 내릴 것이다
― 《시와문화》 (2023 / 여름호)
휘민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 선수』. 현재 동국대, 숭실사이버대, 한국교통대에서 시와 동화를 가르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