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1일 [(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65,17-21
복음 요한 복음 4,43-54
◈ [서울] 사순 제4주간 월요일
2019년 다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제 곧 꽃피는 봄이 올 것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봄은 오지만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봄은 왔지만 그 봄의 따사로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계절은 봄이 왔어도 몸은 아직도
추운 겨울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연에도 봄이 오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이라는 음악프로가 있습니다. 프로의 특징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기존 가수의 노래를 새롭게 편곡하거나
해석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발라드의 노래가 탱고라는 옷으로
갈아입기도 합니다. 조용히 끝나던 노래가 열정적인 외침으로
마무리되기도 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담벼락에 그림 하나가
더해지면서 아름다운 담으로 변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곡의
작품성과 완성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재해석하였고,
편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꼬, 루까, 마태오 복음 사가는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삶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셨고, 표징을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셨고,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였습니다.
암부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토마스아퀴나스, 칼라너,
한스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베네딕토, 프란치스코, 대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영성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성당에 팔이 부서진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의 팔이
되어주십시오.” 군인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왕실 관리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군가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누군가에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믿지 않는 만큼 표징과 이적을 얻을 수 있다.
2019년 다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자신을 믿지 않는 만큼 표징과 이적을 얻을 수 있다>
복음: 요한 4,43-54
오늘날 이 시대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혹시 신이 내게 기적이나
이적을 보여 준다면 그때는 믿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이들은 표징이 없어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 해서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주 작은 표징에도 큰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영적 멘토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이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2004년 말, 나는 수마트라 지진으로 쓰나미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습니다. 쓰나미의 엄청난 공포를
겪으면서도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이 되어 준 것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일본인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매일 아침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나한테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
라는 확신이 저를 구해 주었어요.’
프랑스 여성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커다란 파도의 무서운 기운을 등 뒤로 느끼면서 산으로 도망치고 있을
때, 나는 날마다 성당에서 바쳐지는 기도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 기도가
내 등을 밀어 줘서 밀어닥치는 파도보다 빨리 도망칠 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의 체험을 들으면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가 언제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닿아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재 참조: ‘행복을 발견하는 시간’, 스즈키 히데코; 참조
‘2015 사순묵상 - 이루신 일 놀랍네’, 미래사목 연구소)
어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그저 미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기도의
힘을 믿으며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큰 표징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지 않겠다고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내린 결정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됩니다.
사실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본인이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을 믿습니다. 어떤 표징도 그들의 결심을
꺾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맞는 삶을 삽니다. 돈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육체의 쾌락에 빠집니다. 말로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는 온갖 핑계를 댑니다.
그 중에서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어떠한 표징도 내려주시지 않는다는
핑계가 제일 큽니다. 이는 마치 자해하는 사람이 자신들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미리 결정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자해를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
속에서 자신의 믿음이 옳았다는 평화를 얻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예언을 해 놓고 그것에 맞추어 살며 자신의
예언이 맞았다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으로 이미 그 표징을 믿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중에 표징만 주어지면 생각을 바꾸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들의
치유를 청하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표징과 이적이면 믿을 수도 있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왕실관리는 어느 정도 표징만 주어지면
믿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표징을 받은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엔 진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진리이시고 그분을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십니다. 나에게
옳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참 진리를 거부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표징도 거부합니다. 자기가 내린 예언이 틀리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가 표징을 청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쁜 것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바꾸려하지 않으면서도 표징이나 해보라는 식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청할 때, 우선 자신의 믿음을 언제든 바꾸려는
유연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찾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낙타에게 물을 주는 사람이면 주님께서 점지해주신 며느릿감이라
여기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의심 없이
그 여인임을 믿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전쟁에 나가는 것이 맞는지
양털로 하느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으시고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질것이 뻔하였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적들에게 뛰어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표징을 보면 내 삶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청해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표징과 이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가 맺는 나무에 거름을 주십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카파르나움 고관의 아들 치유|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카파르나움 고관의 아들 치유
복음: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고 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고,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라고
하시면서 왕실관리를 가르치신다. 사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하고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은 무엇보다 영혼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해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이 관리를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가거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알아주셨고,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과 권위로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고
계시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고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느 위치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구원을 부른 고통|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4,43-54)
구원을 부른 고통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 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
(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메시지를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적을 말하지 않고 표징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보물 상자보다 보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전주] 사순 제4주간 월요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다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순 제4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성경의 독서들은 파스카 축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순 시기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사순 시기는 우울한 시기가 아닙니다. 그분을 믿고 우리가 세례 때에
결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에게 거둔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이 주제는 사순 시기가 끝날 때까지 점차 강조될 것입니다.
유배 후에 살았던 예언자인 제3이사야가 제1독서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의 이른 아침, 부활의 서광 속에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기쁨으로 채워 주실 때 예루살렘에서 우는
소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그분 안에서 예언자의 예언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뽑은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한 왕실 관리가 죽게 된 아들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왕실 관리의 믿음 어린 간청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베푸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거리가 먼 곳에서도 치유의 기적을 끌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어쩌면 공관 복음 전통
(마태 8,5 이하와 루카 7,1 이하)이 전하는,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치유하신 이야기에 대한 요한의 해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첫 표징에 이은 “두 번째
표징”이라 강조합니다.
-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4월 1일 (월) - 주인이 인정한 요셉
오늘은 ‘주인이 인정한 요셉’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 말씀에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요셉이 잘 되는 모습을 주인이 보았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일이 되어 가는지 너무나도
신기했습니다.
다른 종들을 보면 뭘 하나 시켜도 제대로 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요셉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즉
오너의 생각보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즉 오너가 생각할 때는 30분 만에 일을 해올 줄로 생각했는데 10분
만에 척 그 일을 해서 가져 온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한번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반복되면 당연히 믿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한 가지 두 가지, 지속적으로 일을 하는 것마다
인정을 받는다면 당연히 요셉과 같은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늘 요셉의 주인은 요셉이 일만 잘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일이 척척 잘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도 혼자 일을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역시
믿는 자는 다르다는 소리를 듣는 요셉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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