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강론>
(2024. 2. 19. 월)(마태 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보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고(37절-39절), 왼쪽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44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래서 그 심판은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급한 상황이라면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겠지만, 이야기의 전체 흐름과 내용을 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신앙인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심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은,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생활과 생각만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작은 이들’에게 사랑 실천을
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이미 전제되어 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은
‘죽은 신앙’인가?”를 심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에도 연결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8-12).”
이 말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 삶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
‘알곡’은 올바르게 회개하고 제대로 믿고, 믿는 대로
실행하면서 살다가 구원받는 신앙인들이고, ‘쭉정이’는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탈락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오른쪽의 양들’은 ‘알곡’이고,
‘왼쪽의 염소들’은 ‘쭉정이’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께 사랑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
재산이 없거나 적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전부 다 ‘작은 이들’인가?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 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가난하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면제되는가?
<매일미사 책을 보면 ‘가난한 이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했는데, ‘가난한 이들’이 ‘그들’이면, ‘그들’과 구분되는
‘우리’는 누구인가?
가난한 이들과 구분되는 사람들이라면 부유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매일미사 책은 부자들만 보는 책인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는 주기만 하고, 누구는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먹든지, 함께 배고프든지, 그것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작은 이들’은 곧 ‘나’이고, ‘우리’입니다.
<실제로 모두가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없거나 부족하거나,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 15,25-27).”
이 말에는,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적 은혜도 나누고, 물질적인 것도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말로만 하는 신앙생활과
생각만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