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K단]
Ku Klux Klan은 1915년에 윌리엄 조셉 시몬스 대령이라는 사람이 창립했다. 처음 5년간은 그 세력이 보잘 것 없었다.
1920년에 이르러서도 참가 인원은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1차 KKK단에서 영감을 받아 전반적으로 백인지상주의와 감상적인 남부의 이상주의를 표방했다. 1920년 시몬스 대령은 남부광고협의회라는 단체의 에드워드 클라크 에게 이 단체를 재정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 시기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여파로 인해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에도 볼세비즘이 전파될까 걱정하는 적색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미국적이 아닌 것은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됐다.
이들은 흑인에게서 백인을, 유대인에게서 비유대인을, 가톨릭에게서 개신교도를 보호하는 단체로 인식되어, 쉽게 속아 넘어가는 작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 불붙은 모든 공포심에 어필했다. 이 단체를 상징하는 흰 가운과 무자, 불의 십자가, 비밀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의식용 어휘 등은 변변치 않은 장소에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속에 남아 있던 요술사의 무줌 문구나 위엄 있는 종교의식에 대한 어린애 같은 애착이나 비밀스러운 모험에 대한 갈망 등을 일으키는 수단이 되었다.
완고한 시골 사람이 제대로 차려 입고, 보이지 않는 제국의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이 단체는 돈벌이가 됐다.
단원 모집책에게는 ‘Kleagle’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전국은 왕 클리글이 주재하는 왕국으로 나뉘고, 왕국은 다시 대마왕이 통치하는 영토로 나뉘었다. 클라크 자신은 황제 클리글이 되었고 시몬스 대령은 황제 마법사라는 호칭이 수여되었다. 회비는 10달러였는데, 그중 4달러는 가입을 권유한 클리글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클리글을 하는 것은 이 시기에 가장 이득이 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왕국의 클리글왕과 영토의 대마왕이 회비의 남은 6달러 중 소량을 갖고, 나머지는 단체의 금고로 들어갔다. 1921년 단체의 여러 잘못된 행위로 인한 국회 조사로 인해 황제 클리글인 클라크가 추방되었다. 시몬스 대령인 갖고 있는 황제 마법사의 지위는 치과의사인 하이램 웨슬리 에반스 라는 남자에게 계승되었다. 클란은 비정상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1924년에는 단원 수가 450만이나 되었다.
이 조직은 한동안 오리건, 오클라호마, 텍사스, 아칸소, 인디애나, 오하이오, 캘리포니아의 7개 주에서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 조직의 본거지는 남부와 중서부 및 태평양 연안이었지만 유대인과 가톨릭교도가 많은 뉴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대 분위기가 이런 풍조가 퍼지기에 알맞았다. 조직 정관에 기술된 이 단체의 목적은 “이 나라에서 태어난 미합중국의 비유대인계 시민으로서 외국의 정부, 국민, 조직, 종파, 지배자, 개인 혹은 국민들과 어떠한 복종관계도 없고,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평판과 직업이 모범적인 백인 남자들을 결속하며········
우리의 시민정부에 대한 애국심을 함양·증진시키며, 서로를 위해 영예로운 단원으로 행동하며, 실제로 자선의 규범을 실천하며, 가정의 신성함과 여성의 정조를 보호하며, 영원한 백인지상주의를 유지하며, 의식을 통해 고원한 정신철학에 도달하고, 그것을 충실하게 아로새기며, 헌신적으로 순수한 미국주의의 특성적 제도, 권리, 특권, 원칙, 전통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론은 그랬지만 실제 ‘순수한 미국주의’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처음 남부에서는 백인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이 KKK의 주요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직이 성장하고 확대됨에 따라서 유대인과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반대야말로 KKK들이 지역민을 만날 때 가장 좋은 이야기거리임을 알게 됐다.
또한 지역별 조직들의 방식은 ‘고원한 정신철학’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역별 조직은 대개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본부의 통제 밖에 있었다. 지방 단원은 거의 어김없이 교육받지 못하고, 규율 잡히지 못한 백인 개신교도 계층에서 나왔다. 황제 마법사 에반스는 불법행위를 징계하고 있었지만, KKK 지방 단원들은 자녀를 가톨릭계 학교에 보내는 것에 반대를 했고, 가톨릭교도가 공직에 취업하는 것에도 반대했고, 마을 언덕에서 불의 십자가를 태워 흑인에게 백인의 위협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KKK의 비밀주의는 좀 더 직접적인 행동을 유발했다.
만약 백인 소녀가 흑인 남자가 부적절한 접촉을 해왔다고 신고하면, 설령 그 일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더라도 흰옷을 둘러쓴 일당이 그 흑인을 숲으로 납치하여 회초리질을 가했다.
또 인종을 둘러싼 분쟁에서 백인이 흑인 편을 든다면, 그 백인은 납치되어 구타당할 수도 있었다. KKK단원들은 유대인 가게에서 파는 물건에 대하 불매운동을 벌이고, 가톨릭 소년들의 고용을 거부하고, 가톨릭 교도에게 주택 임대를 거절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폭행을 두려워했다.
흰옷의 무리가 행진하고 불의 십자가가 언덕에서 타올랐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이번에는 누구를 노릴까” 속삭였다.
범죄자와 폭력배 집단들은 KKK의 존재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자기들이 범죄행위를 한 곳에 ‘KKK’라는 문자를 분필로 써놓으면 자신들은 이제 처벌받을 염려가 없었다. 이런 공포에서 생겨난 움직임은 또다른 공포를 불러왔고 사회는 온갖 종류의 잔학행위와 범죄가 발생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적색공포가 사라지면서 KKK단의 세력도 같이 수그러들었다.
대부분의 지방에서 KKK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아 있는 곳에서는 이권 관련 운동자가 주도하는 정치단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사회에 수많은 공포를 심어준 뒤의 일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