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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우지현 (화가, 《혼자 있기 좋은 방》 《풍덩!》 작가)
수많은 편견과 시련 속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은 화가들이 여기에 있다. ‘여성이라서, 나이가 많아서, 가난해서, 아파서, 재능이 부족해서, 남들과 달라서’ 등의 이유로 그들은 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고 흔들릴지언정 계속 그려나갔다. 그들은 말한다. 세상이 가로막더라도 계속 그려나갈 거라고. 어쩐지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삶이 힘겨워도 계속 살아갈 거라고. 계속 그려나가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계속 살아가는 마음을 배운다.
책 속으로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선택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 친구가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구경할 때, 누군가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새벽 편의점을 지켜야 한다. 상선에서 세금을 징수한 루소처럼 바코드를 찍으며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길 버텨야 한다. 때론 무례한 취객을 상대해야 할 때도 있다.
앙리 루소라는 이름이 결국 살아남은 이유는 그가 ‘그럼에도 꿈을 꾸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고단하고, 여행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삶. 그 속에서도 인간은 꿈을 꾼다. 시궁창에서도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
_P37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린 화가 | 앙리 루소’ 중에서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 역시 파울라가 자신의 몸을 그린 작품이다. 배가 불룩 나온 임산부가 우리를 지긋이 응시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파울라는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 임신한 자신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당시 파울라는 남편과 소원한 관계였다. 이혼까지 결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파울라는 언제나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골몰했던 예술가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맞이하고 싶어 했다.
_P48 ‘짧지만 강렬한 축제 | 파울라 모더존베커’ 중에서
누구나 살면서 블랙홀에 갇힌 듯한 막막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허둥지둥 헤맬 때도 있다. 지금 이 고통에서 영원히 탈출하지 못하리라는 불안감에 떨 때도 있다. 모드 역시 그랬을 것이다. 장애를 안고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달아 잃고, 형제에게 배신당하고, 남편이라는 사람도 처음에는 남보다 못했다. 운명은 그를 고집스럽게 가시밭길로 안내했다. 하지만 모드는 꿋꿋하게 꽃을 그렸다. 그리고 꽃길을 냈다. 그 길을 따라서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을 구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주의 신비만큼 경이롭다.
_P116 ‘작은 오두막에서 피어난 꽃 | 모드 루이스’ 중에서
자신을 외면했던 아버지, 망명 생활, 옛 연인의 허망한 죽음, 상처만 남긴 결혼 생활. 로랑생에게 남은 건 그림뿐이었다. 쓸쓸함에 쓸려가지 않으려 그리고 또 그렸다. 화가로서 입지가 탄탄해졌을 때도 그의 그림에선 애잔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로랑생은 72세에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로랑생의 그림은 내게 이렇게 말을 건다. “그래도 나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세요.”
_P202 ‘나를 잊지 말아요 | 마리 로랑생’ 중에서
벡신스키는 은둔을 자처했다. 다른 예술 작품에서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까 봐 미술관에도 가지 않았다. 화실에 틀어박혀 고전 음악과 록 음악을 들으며 묵묵히 그림만 그렸다. 그는 그림을 본 관람객이 이미지가 전달하는 느낌 그 자체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 밖엔 모두 쓸모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벡신스키 그림을 보면 본능적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서사가 물밀듯이 떠오른다.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지구가 이런 모습일까.’ ‘지옥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_P291 ‘세 번 보면 죽는 그림 |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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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나를 넘고, 시대를 넘어 예술로 살다
22인의 삶과 작품에서 느끼는 경이
《계속 그려나가는 마음》은 독보적인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22인의 근현대 화가들이 오늘도 예술로 숨 쉬기까지의 과정과 삶의 태도에 주목한 책이다. 예술가는 삶이 그들을 짓누르고, 세상이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던 순간에도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펼쳐나간다. 책에서 다룬 화가들은 가난과 생업의 무게, 누군가의 무엇이란 꼬리표, 자기 복제의 부담, 치명적인 장애와 질병, 전쟁, 세간의 비난과 무시 등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치열하게 예술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새로운 관점을 그림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이들이 남긴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꼭 생애와 창작 과정을 알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렸을지 맥락을 헤아리면, 그저 보기 좋거나 멀게 느껴지던 걸작들이 한결 가깝게 다가오기도 한다. 투병 중에도 창작을 계속할 방법을 고민했던 앙리 마티스의 의지를 알고 나면 그저 알록달록했던 색종이 작업 그림이 위대한 시도로 느껴지고, 동성애 성향으로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삶을 떠올리면 작품 속 고통에 몸부림치는 섬뜩한 형체들이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진실을 보여주는 우리의 몸으로 느껴지니 말이다. 더불어 파란만장한 삶 속에도 예술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정신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에 남은 유명 화가부터
각광받는 동시대 화가까지
인간의 얼굴로 마주하는 걸작들
이 책은 우리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화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때문에 미술사적 지식 전달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자의 안내와 함께 화가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미술사의 흐름까지 알 수 있다.
바로크 시대부터 동시대까지, 불후의 화가들이 어떤 시대적 환경에서 독보적인 스타일을 선보이고, 이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연스레 살피기 때문이다. 모네·세잔·모딜리아니·몬드리안 같은 유명 20세기 화가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근대 미술의 태동을 알린 카라바조·쿠르베·젠틸레스키의 삶과 작품을 보면 근현대 미술의 흐름이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DbqMor2_OEU
동시에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잭슨 폴록처럼 이름과 작품은 유명하지만 생애는 단편적으로 알려졌던 화가의 삶을 폭넓게 살폈다. 또한 힐마 아프 클린트, 마리 로랑생, 모드 루이스 등 기존 미술 교양서에서 잘 주목받지 않았던 동시대·현대 화가도 소개했다. 국내 미술서 최초로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작품을 폴란드 사노크역사박물관과 협의해 싣기도 했다. 벡신스키는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과 괴생명체 같은 대상 묘사로 〈에일리언〉 등 SF 영화에 영감을 준 화가다.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화가의 꿈을 놓지 않은 루소,
미래를 위해 꿋꿋이 그려나간 클린트 …
“나는 내 삶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는 지루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화가를 꿈꿔 끝내 미술사에 남았다. 사막, 정글 등 원초적인 풍경과 환상이 뒤섞인 이국적인 작품과 달리 그는 여행은커녕 국내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꼬박 일하고,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려야 했었다. 원근법·비례·명암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탓에 미술전에 출품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소는 쉰 살이 다 되어 전업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이국 풍경을 꿈꾸고 환상에 빠진 그림으로 피카소의 찬사를 받으면서 대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한편 스웨덴 여성 화가인 힐마 아프 클린트는 언젠간 자신이 인정받으리란 자기 확신으로 시대를 넘었다. 그는 몬드리안, 칸딘스키보다도 한발 앞서 추상화를 그린 선구자였지만, 당시에는 “향후 50년 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란 평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후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으리라 믿어 묵묵히 작품을 남기고 조카에게 사후 20년 후에 작품을 공개하길 부탁했다. 그로부터 60여년 후인 2018년, 회고전 ‘클린트: 미래를 위한 그림’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던 모드 루이스는 가족에게 버림받고도 특유의 천진한 그림을 그리며 가시밭길이던 삶을 꽃길로 바꿔나갔다. 파울라 모더존베커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그리는 게 금기인 시대에서 임신한 자화상을 그리며 최초의 여성 누드화를 그렸다. 각자가 처한 한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간 그들의 모습은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또 고독한 마음으로
그려나간 그림의 힘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황제)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것입니다.”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화가이자, 성범죄 피해자였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말이다. 그는 그림 스승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재판 과정에서는 오히려 엄지손가락을 조이는 고문까지 받았다. 또한 손가락질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젠틸레스키는 숨지 않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등 포악한 남성 앞에서 더 사납게 맞서는 여성을 그리며 예술로서 세상과 맞섰다.
반면 영국의 여성 화가 그웬 존은 그림과 함께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조각가 로댕의 연인이 되었다가 버려진 후에 가급적 칩거하며 여성 초상화만 그렸다. 그래서일까. 여성이 가만히 고양이를 안은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이나, 책을 읽는 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한 〈창가에서 독서하는 소녀〉 등 그의 그림은 온화하지만 어딘가 애잔함이 감돈다. 생전에는 ‘천재 조각가에게 버려진 여자’란 꼬리표에 가렸지만, 풍파에도 묵묵히 그림을 그려 끝내 오늘날에는 그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
시련 앞에서 예술가의 삶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폐 건강이 나빠져 유화를 그릴 수 없자 색종이를 오려붙인 마티스처럼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지 못하자 절망에 허우적대다 삶을 놓은 잭슨 폴록 같은 이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마다 함께했던 그림에 그들의 감정, 태도, 관점이 각양각색으로 남았다. 때로는 당차고 희망적인 노래가 마음을 다지게 하고, 때로는 처연하고 음울한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화가의 다채로운 삶과 작품 속에서 바닥에 떨어진 오늘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태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