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선의 미국 상원의원으로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과 해외 원유 의존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던 시기 에너지와 과학 정책의 틀을 짜는 데 힘을 보탠 존 베넷 존스턴 주니어(루이지애나 민주)가 25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다음날 전했다. 아들 J 베넷 존스턴 3세가 고인의 사망을 확인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천연가스에 대한 가격 통제를 끝내는 데 힘을 보태고 비상 시 전략 비축유를 저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고인의 딸 메리 존스턴 노리스는 부친이 코로나19 감염증과 다른 합병증으로 힘들어 했다고 전했다.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남부 민주당이 배출한 지도자 가운데 새로운 종의 출현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고인은 보수파 정견을 갖고 있었다. 존스턴은 1972년부터 1997년까지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미국의 원유 수입을 위협했던 중동 갈등과 1979년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섬 원전의 원자로 부분 붕괴이란 미국 최악의 핵 사고 후 원자력 발전 면허와 안전조치 변화가 이뤄진 시기였다.
고인은 안전 우려 때문에 신규 증설에 많은 제약이 따랐던 원자력 발전소 확대를 지지해 환경론자들의 분노를 샀고, 멕시코만의 원유 채굴을 급격히 늘리는 데 앞장섰다. 또 해안을 거느린 주들이 연안 채굴으로 얻은 연방 수입을 공유하는 법률들을 지지했다.
종종 에너지 정책에 '눈 뜬 이'(man to see)란 별명으로 불린 고인은 1987년부터 은퇴한 1997년까지 상원 에너지 및 천연자원 위원회 의장이나 간사 등으로 일했다. 또 상원 세출위원회 고위 위원으로 에너지와 수자원 개발 소위원회 의장과 간사로도 일했다.
고인은 1932년 6월 10일 루이지애나주 슈레베포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변호사로 얼 롱 주지사의 지지자로 주 상속세 징수 변호사로서 일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이 일은 이 주에서 상당히 수지 맞는 직업 분야로 알려져 있다고 잭 배스와 워터 드 브리에스가 함께 쓴 책 'The Transformation of Southern Politics'에 소개돼 있다.
고인은 뉴욕주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버지니아주 렉싱턴의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을 1956년 졸업한 뒤 루이지애나 주립대 로스쿨을 나왔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군 법무감(The Judge Advocate General TJAG, 중장)단으로 독일에서 복무했다.
루이지애나 주의회 양원에서 각각 4년씩 근무한 뒤 1971년 주지사 선거에 나섰으나 민주당 프라이머리 경선에서 에드윈 에드워즈에게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충분히 알려 197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무난히 승리했다. 재선에도 쉽게 이겨 1978~84년 재임했다. 1990년 공화당 주 의원이며 쿠 클럭스 클랜(KKK) 리더였던 데이비드 듀크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 끝에 3선에 성공했다. 공화당 상원 동료까지 그를 응원해 짜릿한 표차로 세 번째 임기를 맞았다. 1996년 그는 재선 도전을 접었다.
그 뒤 고인은 버지니아주 스페리빌에서 살았다. 68년을 해로한 아내 메리 건을 비롯해 네 자녀(J 베넷 존스턴 3세. 헌터 존스턴, 메리 존스턴 노리스, 전 하원의원 팀 로머(민주 인디애나)의 부인인 샐리 로머에다 10명의 손주를 유족으로 남겼다.
1994년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에탄올을 가솔린에 첨가한다는 환경보호청(EPA) 규정을 제정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 없이 움직였다. 이 책략은 존스턴을 격분시켰다. "누군가 미국의 연료 믹스를 바꾸려 한다면, 제기랄 존스턴의 책상 위에 갖다놓는 게 훨 나을 걸"이란 농담이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