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식탁> 영국 해군 제독과 그로기
권투의 ‘그로기’와 술 ‘그로그’ 관계는? 영국 해군 버넌 제독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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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와 같은 격투기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 보통 ‘그로기(groggy)’ 상태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원래 술에 취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해롱거릴 때 썼던 표현이다.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저택과 정원이 있는 곳이다. 워싱턴 DC에서 남쪽으로 26㎞쯤 떨어진 버지니아 주에 있다. 그로기와 마운트 버넌, 눈곱만큼도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둘은 18세기 영국 해군 제독이었던 에드워드 버넌(Edward Vernon)이라는 한 인물에서 비롯됐다.
‘버넌 언덕’이라는 뜻의 마운트 버넌은 에드워드 버넌 제독의 성을 차용했다. 또한 그로기는 그로그(grog)라는 술에서 비롯된 형용사이고, ‘그로그’라는 술 이름은 에드워드 버넌 제독의 별명 때문에 생겼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먼저 ‘마운트 버넌’이란 이름은 조지 워싱턴의 형인 로런스 워싱턴이 지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당시 미국 민병대를 이끌고 영국군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지만, 형인 로런스 워싱턴은 영국 해군 장교였고 그가 모셨던 지휘관이 에드워드 버넌 제독이다.
에드워드 버넌 영국 해군 제독의 이름을 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저택, 마운트 버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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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트 버넌과 술 그로그
로런스 워싱턴은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 버넌 제독을 존경했기에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가족농장 이름을 상관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버넌, 즉 버넌 언덕으로 바꾸었다. 영국에 대항해 미국 민병대를 지휘한 조지 워싱턴의 집 이름에 엉뚱하게 영국 장군의 이름이 붙은 배경이다.
그로기라는 형용사를 만들어낸 그로그는 사탕수수를 넣고 발효시켜 만든 증류주인 럼과 물, 맥주, 레몬주스를 혼합해 만든 일종의 칵테일이다.
이 술은 에드워드 버넌 제독의 지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버넌 제독은 평소 모직물과 견직물을 혼합해 짠 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옷감으로 만든 제복을 즐겨 입었다. 방수가 잘되는 옷이었기에 해군이 입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부하들은 제독을 구식 그로그(old grog)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여기서 이 술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로기’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그로그를 너무 많이 마셔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현대에는 너무 맞아서 몸의 중심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으로 변질했지만 어쨌든 그로그라는 술 이름이나 마운트 버넌이라는 저택 이름은 모두 평소 부하들이 에드워드 버넌 제독을 존경하고 따랐기에 생긴 것이다.
썩은 물 대신 마신 술, 그로그
우리에게는 낯선 에드워드 버넌 영국 해군 제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버넌 제독은 왜 그로그라는 술을 만들어냈을까?
그로그는 따지고 보면 평범한 술이 아니다. 해군, 그리고 장거리 항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의 선원들은 물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 이전까지는 주로 연안 항해였기에 음료수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태평양으로 장기 항해가 빈번해지면서 무엇보다도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당시만 해도 바닷물을 증류하는 기술이 없었기에 군함이 됐건 상선이 됐건 장기 항해를 할 때는 우선 나무통에 마실 물을 가득 담아 실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은 물은 금세 이끼가 잔뜩 끼면서 마실 수가 없게 됐다. 이 경우 함께 실은 맥주나 와인을 물에 타면 마시기가 다소 수월했지만, 맥주나 와인 역시 금방 시어지기 때문에 장기 항해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사탕수수를 증류해 만든 독주인 럼주다. 물에 럼주를 타서 마시면 소독도 되고 냄새도 없앨 수 있어 좋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독주인 만큼 선원이나 수병이 빨리 취해 제대로 근무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기가 흐트러지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수병에게 럼주를 지급하는 장면 스케치.
영국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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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럼주를 일정 비율로 혼합해 지급
에드워드 버넌 해군 제독은 수병들의 함상 근무 조건을 끊임없이 개선한 장군이었다.
독한 럼주 원액이 문제가 되자 버넌 제독은 함상 술 지급 방식을 바꿨다. 병사들에게 럼주를 지급할 때 물 따로 술 따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교의 입회 아래 반드시 물과 럼주를 일정 비율로 혼합해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지급 시간도 오전과 오후 일과가 끝난 직후 하루 두 번으로 제도화했고 더 편하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설탕과 레몬을 추가로 지급했다. 그로그라는 칵테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괴혈병 예방 효과도 있어
그 결과 에드워드 버넌 함대의 장병들은 다른 함대에 비해 질병 발생률이 훨씬 줄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로그를 통해 자연적으로 괴혈병이 예방됐기 때문이다. 함상에서 지급하는 술에 버넌 제독의 별명인 올드 그로그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문제아는 있기 마련이다. 물 대신 마시는 그로그를 모아 술처럼 마셨다가 비틀거리는 수병이 생겼다. 덕분에 그로기라는 영어 형용사도 만들어졌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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