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첫
첫 이란 말에 돌확에 고요하던 그리움이 넘친다
첫 만남
첫 사랑
첫 날밤
첫 눈
첫 새벽
첫 출산
첫 출근
정화수다. 싱그러운 아침공기다
뽀송하게 말린 새하얀 빨래다
천 만 개의 세포가 찬 산골 물에 발 담근다
뽀얀 설렘이 살갗의 실가지에 걸어놓은 긴 명주수건에
얼굴을 묻고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기적소리 듣는다
2. 봄볕
어머니는 나무의 터실터실한 몸피에 등 가른
허물만 남기고 날아가 버린 위대한 바보다
옹달샘 솟는 산골 청아한 물소리며
재 넘어 밭둑에 내리는 아침이슬이다
낮은 굴뚝에 모락모락 흩어지는 연기며
여름 한낮 도리깨에 튀는 보리알갱이다
고향 텃밭의 흙냄새며
두엄에서 올라오는 시골냄새다
손톱에 낀 시퍼런 풀빛이다
어머니는 뜨거운 한숨이고
슬픔이 옥죄는 목메임이다
배부른 항아리에 머리 박고 목 터지게 불러보는 이름
어. 머. 니.
3. 썩고 있나 봐
라디오는 밧데리가 약한지 자주 몸짓을 잃어 버렸어 툭 두들기면 눈을 반짝 떴다가 도로 감았어 노래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뉴스는 빙글거리며 날아오르다가 되돌아와 둥지 밑에 숨기도 했어 무서리가 귀밑을 덮고부터 설익은 내 몸 욱신욱신 썩고 있나 봐 연탄불에 오려진 오징어처럼 온 내장이 뒤틀리고 있나 봐 희뿌연 숭늉 냄새가 나
나, 썩고 있나 봐
나는 60년 된 트란지스터 라디오 건전지 한번 갈아 넣지 않고 참 오래도 썼다 모두 분해해 폐기 처분해 버릴까? 아니 폐기 처분 당하고 싶어!
4. 빈 집
삐걱 대문
우루루 뛰어나와 안기는 고요
정강이에 뚝 부러지는 기억
끈적끈적하게 묻어나는 아린 추억
풀쩍! 고염나무에 앉아있던 늦은 하오
아무도 없나요?
모두 무덤에 갔나요?
고요가 짓이겨져 퍼렇게 일어서고
짙은 그림자가 감나무로 빠르게 오른다
수단 이불 밑
젊은 어머니 소죽솥에 아이들 뒤꿈치
가마니처럼 기우신다
아무도 없어요?
글쎄 다 돌아가셨나요?
마당귀에 날카로운 사금파리
증발하지 못한 슬픔
5. 음독사건
지친 하현달에 걸린 검붉은 지네 한 마리
한사코 내 무릎으로 기어오른다
초저녁을 지나 잠 던 의식의 수풀 속
헐떡이며 내 무릎을 잡고 잔발로 버팅기다
천개의 발로 내 몸 관절에
홈을 파서 몸을 숨긴다
꿈속에도 밥솥에도 미역국에도 책 속에도
온통 붉은 지네다
다산의 하피천(霞 被 帖) 붉은 물감을
서쪽 하늘에 뭉겠더니
그 지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토하며 빠르게 기어 나온다
노을이 준비한 음독사건이다
드나들던 자리 길게 찍힌 지네 문양
6. 저 산을 뚫어 큰 길 나면
산머루, 청미래, 어름 ,여주
어디다 머리며 팔 뻗고 자랄까?
아침이슬 덮고 잠자던 풀각시
새가 날아가면 누가 와서 깨울까?
차바퀴 지나간 자리 묻은 기름띠
꽃인 양 앉을 호랑나비 어쩌나?
휘황한 불빛에 앉을 자리 못 찾고
칭얼대는 아기별 자장자장 누가 업어 달랠까?
7. 광양의 버들 못
꽃의 짧은 한나절이
양로원 문 밖에 왔다는 소리에
“아이구! 목욕이라도 해야지 살 것 같다”
그 할머니 어릴 적부터 앓은 관절염으로
손발 오그라들어 마디마다 밖으로
툭툭 불거지고 엉겨 붙은 생강인데
목소리는 줄줄 새는 석새삼베다
회화나무 불거진 아랫도리
꽃바람 찬데
죽음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저 마디마디를 어쩌나?
저 할머니 어쩌나?
8. 벌초
보랏빛 피가 튄다
땅 찔레의 손가락을 자르니
벌컥 벌떼를 토한다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같다
갈 까마귀 떼 같은 습격
윙윙 돌아가는 이발 가위 내던지고
쏜살같이 달아난다
모두 돌아가고 갑자기 조용해진 집
움푹 움푹 머리 깎인 아버지만 홀로 앉아
덜 깎인 머리를 만지고 계신다
9.도덕경 강의
사내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질긴 명주실
뽑혀져 나오네
고음의 결 고운 비단
철컥철컥 여러 언어로 직조되네
말이 달구어진 하얀 칠판 위
기관총처럼 따따따 구멍을 냈다가
그 곳으로 와르르 쏟아져 미어지는,
도덕경의 푸른 계곡
결 고운 풀씨들이 맺히는 소리
어느새 머리 위로 팔랑거리는
색다른 언어들,
빵모자 쓴 검은 나비, 얌전히 꽃술을 모으네.
뚝 물색 베틀이 멈추자 박수는 문을 박차고
단추를 떨어뜨리며
비좁아 포개져 엎어지고 자빠지며 엉금엉금……
10. 사바나의 한 때
어디서 말가죽 썩는 냄새가 난다 흠 흠 냄새를 따라 세상의 사바나로 나선다. 그 냄새의 진원지는 집 앞 휭단 보도였다. 부패에 가속을 붙인 것은 사바나에 내리꽂히는 햇볕이었다. 통통한 얼룩말 한 마리가 뺑소니차에 치여 납작하게 깔려 있다 네 다리를 치켜들고 벌벌 떨며 콧숨을 몰아쉰다. 하이힐이 악어를 타고 지나간다. 아니 생머리가 찰랑 찰랑 뱀 한 마리 안고 밟고 간다 상처부위로 내장이 쏟아져 흥건히 고이는 것은 말간빗물이었다. 언제 알았는지 쇠파리가 들끓다가 파란불이 탁 바뀌면 우루루 건너편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미화원이 청소를 하지만 여전히 내장들 그대로이고 쇠파리들 들끓었다가 파란불로 바뀌면 또 확 날아오른다. 말가죽 냄새 지독하다
* 유귀녀(필명 가형) 1946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다
대구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자랑스러운 대구 시민상
정무장관 및 보건 복지부장관상
코오롱 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 수상
2001년 시인으로 등단 (문학과 창작)
*시집 백양나무 껍질을 열다/기억의 속살/ 나비떨잠
에세이집: 밤이 깊으면 어떻습니까?
첫댓글 유가형님, 늦게사 알았네요.
급하게 올렸습니다.
축하합니다~.
유가형님
"6월의 디섯째 주의 시인 "시인 으로 선전 됨을
늦은 축하드립니다
건필을 빕니다
축하합니다
두분 고마워요
난 올린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늦가을님
" 6월의 다섯째 주의 시인"
과연, 어쩐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생생한 아름다운 시들,
잘 감상하고 또 우리 집으로 좀 모셔갑니다.
우리집 식구들에게 좀 선전하려고~~~ㅎㅎ ㅎ
“시로 행복하자” 영남일보와 대구시인협회가 선정한 6월 다섯째 주의 시인 유가형 시인님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