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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근원 피
레 17:10-16
10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13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것의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15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16 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
레 17:10-16 / [피를 먹지 말아라] 너희 이스라엘 집안 식구이든 또는 너희 가운데에서 몸붙여 사는 나그네이든지 피를 먹는 사람은 내가 그냥 두지 않고 공동체에서 제거할 것이다. 11) 살아 있는 온갖 것의 생명은 바로 피에 있기 때문에 희생제물을 잡으면 그 피를 항상 번제단에 완전히 쏟으라고 일러둔 것이다. 바로 이 피로 너희 짐승의 허물을 씻어 내려는 까닭이다. 피가 사람의 허물을 가리우기 때문이다. 12) 그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그 누구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13)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 식구이든지 또는 너희 가운데 몸붙여 사는 나그네이든지 먹을 수 있는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사냥하여 잡더라도 그 짐승의 피는 다 땅에 쏟아 묻어야만 한다. 14) 그 피는 바로 그 짐승의 생명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어떤 짐승을 잡든지 절대로 그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만일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거될 것이다. 15) [짐승의 주검을 먹지 말아라] 이스라엘 본토박이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몸붙여 사는 나그네든지간에 저절로 죽은 짐승이나 다른 짐승에게 물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었거든 반드시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저녁때까지는 부정하다. 16) 그것을 먹고도 입고 있던 옷을 빨지 않고 목욕을 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에 따른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모세를 통하여 어떠한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3:17; 7:36; 17:10-12)과 이 명령을 어긴 자들의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10-14) 피를 먹지 말라는 일반적 원리와 피를 처분하는 방법과 이유를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고 말씀하면서 모든 생물의 피를 먹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피를 먹는 자들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 즉 죽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심장이 멈추고 폐의 호흡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도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믿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처벌입니다.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피는 생명과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소유는 하나님 외에 어떠한 자에게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피를 함부로 대하거나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짓밟고 소멸하는 것과 같습니다(창 9:6). 둘째,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출 24:8; 히 9:22).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는 속죄의 피가 그 중심이었습니다. 피의 기능은 생명이기에 제단에 뿌려 죄사함을 받는 일에 사용된 것입니다. 피에 생명이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여 죽은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참고 출 12:13; 벧전 1:19, 20; 요일 5:6)
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15-16) 생명의 연수가 다 되어서 죽은 동물이나 야생동물에게 찢긴 동물을 먹은 자는 옷을 세탁하고 몸은 정결예식을 해야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피를 마신 것은 아니지만 이 사체는 흙에 묻지 않아 그 사체 속에 피가 고여있기 때문에 먹으면 피를 먹은 것과 같은 결과가 되므로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피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다면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을 먹고 맑은 것을 마시며 참된 말을 하라는 말처럼 성도는 성결의 의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가 싸움 없이 새 땅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사용하려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목표는 단지 환난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맞서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면한 문제로부터 도망하고픈 유혹은 계속되지만 주님께서는 그 고난을 견디어 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한 것은 그 고난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 늘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 설 교 >
속죄의 피의 가르침을 행합시다
레 17:11 / 강성찬 목사
■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라 합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 기독교도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은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허벅지 살을 베었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으니 너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 는 참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 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속의 교리가 없는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라 하기도 합니다. 선행을 하여야 하며, 개혁을 하여야 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하나 이모든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는 길 뿐입니다.
피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시며 '생명이 피에 있'다고 하시고 피를 주어 제단에 뿌려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속죄 하시고 새로운 창조물로 회복하심을 말씀 합니다.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심으로 피의 예식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말씀 합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어 주시고 그 피를 흘리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를 가증히 여기게 하였으나, 죄인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을 치시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대리자가 되어 그 진노를 받으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장6절)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고통을 받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증오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시되 죄인을 벌주는 것으로 나타내시지 않고, 인간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나타내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 (눅 9:28-31)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 말씀하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셨다면 성자 예수 그리도의 별세 곧 죽으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 죽으심은 단순한 죽으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죄 짐을 지워 죽데 하신 속죄의 죽으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 하겠느냐(롬8:32)하시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고 하십니다.
인도의 마호멧 교도의 한 집단인 말라카나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현재는 그들의 사랑 받는 교사가 된 한 남자가, 여러 말라카나 교도들이 끝에 쇠 날을 박은 죽창으로 싸우는 것을 보았다 합니다. 그는 그들 사이로 달려 들어가 그의 머리를 찌르게 하였다 합니다. 피가 흐르기 시작하여 그의 흰옷은 젖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양편 모두 싸움을 중지하고 그의 옆에 섰다 합니다. 몇 사람은 의사를 찾아 달려가고 몇 사람이 그를 그들의 집으로 실어갔다 합니다. 그 순간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합니다. 그의 피를 통한 화해였다 합니다. 그는 "만일 죄 된 인간의 피 몇 방울로 전 부락을 화해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전 세계를 구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요?"라고 말했다 합니다.
천국에서의 찬양의 주제가 "내 주를 가까이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길 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주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일까요 이도 아닙니다. 이미 주와 같아진 때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라고 노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 찬송의 대 주제가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심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주신 속죄의 피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 사실 바로 알고 믿고 가르침을 찬양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피를 주어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속죄하게'('키페르')는 덮어 주다, 대신 하여 속죄 하다는 뜻입니다. 피가 죄를 덮어 생명으로 하여금 멸망치 않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은 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을 속하여 살리기 위한 구약적 속죄 방법이었습니다.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10)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불경스런 행위에 대한 속죄의 피로서, 구약에서는 제사장 아론이 일 년에 일 차씩 단에 피를 뿌려 지극히 거룩함을 취하는 행동으로 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예표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제단 위에 뿌려지는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신약성경에 175번 이상 언급되었다 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붉은 피의 능선이 있다고들 합니다. 특히 복음서에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에서 주의 흘리신 피에 관한 구절을 제하여 버린다면, 성경은 심장이 없고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하신 대로 주님은 죽음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속죄를 위한 죽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대신한 고난이요 대속의 죽음입니다. "대신의 고난"이란 "다른 사람 대신에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완전한 분이신 데, 불의하고 죄가 많아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대속물의 뜻이 무엇입니까? 한 가정에 아들이 괴한들에게 유괴되어서 많은 몸값을 지불하라고 합니다. 그때에 아들을 살리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 바로 "대속물"입니다. 즉 "값을 지불하고 사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구속하고 율법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죄 값을 치루시려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 때문에 돈을 지불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반역하고 범죄한 자들의 죄 값을 위해 자신의 속죄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일 년 일차씩 대제시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피를 드리곤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히9:22)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함 받도록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고 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 한 말씀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그 몸으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으시며 흘리신 피입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법을 어기면 그 불법에 대한 저주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고 했습니다.
■ 미국 이민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들은 다 미국 동부에 살고 있었다합니다. 그후 어떤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라는 지방에 가서 금을 캤는데 정금 이었다 합니다. 이 소식은 미국 동부에 전해지자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 금을 캐러갔다 합니다. 어떤 부부는 돈 벌 소망이 있다고 해서 재산을 팔고 금을 캐러 갈 것을 상의했다고 합니다. 그 후 남편이 먼저 갔고 일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아내는 남편으로 부터 "급히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합니다. 그 뜻은 금을 캤으니 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아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합니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고 배도 파나마 운하로 아직 다니지 못하고 기차도 없었기 때문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것은 아주 많은 시일이 필요했다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배 위에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다 합니다. 그녀는 해적을 만난 줄 알고 문을 잠가버리고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합니다. 그런데 연기냄새를 맡고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합니다. 불이 난 것이 아닌가 하고 문을 열고 나가보니 과연 배는 큰불로 가라앉고 있었다 합니다. 그녀는 급히 아들과 함께 갑판에 나가 보니 구명보트에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득 타고 있었다 합니다. 본래 유사시에는 부인과 어린이가 먼저 타지만 그녀는 늦게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옮겨 타 있었다 합니다. 그녀가 계속 간절히 구해줄 것을 호소하자 배의 선원은 한 사람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허락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누가 탈것인가였다고 합니다, 둘 다 탈 수도 없고 둘 다 죽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없이 어머니는 아들을 내려 보내며 선원에게 자기 남편이 있는 지명을 적어주며 아이를 남편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내 아들아 네가 아버지를 보게 되거든 네 어머니가 너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불속에서 물속에서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다오"라고 말하면서 가라앉는 배와 함께 죽고 말았다 합니다. ‘대신하여’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을 예표하는 작은 그림자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으로 죽으셨습니다.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에서 그 무서운 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온 땅을 두루 다니며 모든 짐에서 초 태생의 생명을 거두어 갈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하시고 구원하게 하시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피를 보시게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설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가요? 그 피 아래 있는 자는 영원히 안전한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바로 알고 속죄의 가르침을 믿고 속죄의 은총을 누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고 합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생명은 하나님과 함게 하는 영생의 삶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생명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고자 속죄의 수단으로 주신 피임을 바로 알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위해서만 사용 하여야 합니다.
속죄의 피는 정결케 하는 피 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죄인들의 심령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속죄할 수 없으며 죄인이 거룩하게 되질 않습니다.
자유케 하는 피 입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의 피로서 생명과 부활의 피 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저주 아래 돌아가셨으나 사흘 만에 승리하신 것으로 십자가를 통한 피의 제사는 생명을 다시 취한 제사로서 인간의 모든 죄를 구속시키며 죄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는 십자가의 피는 선택받은 백성들에게는 소중한 소망인 것입니다.
희생의 피 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고 합니다. 이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월절의 어린양, 즉 선민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피 흘린 양은 죽어 갔지만 대신 하나님의 선민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선택받은 많은 백성들을 위한 희생의 피, 곧 대속의 피인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델리마쿠스라는 나이든 수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몇 개월을 걸려 로마로 갔다 합니다. 그는 거기서 웅장한 제우스 신전에서의 개선식을 보았다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발 디딜 틈의 여지가 없는 원형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검투사들의 싸움을 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인무도한 검투는 끝을 낼지어다”라고 외쳤다 합니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 하나 나타났다고 와하고 웃었습니다. 서로를 죽이려는 검투가 계속 끝나지 않자 이 델리마쿠스는 계단을 통해서 밑으로 뛰어 내려가 칼을 서로 휘두르는 곳에 자기 몸을 맡기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 검투사가 델리마쿠스의 심장을 칼로 찔렀다 합니다. 칼에 찔린 그는 온 힘을 다해 큰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인무도한 경기를 끝낼지어다”라고 외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합니다. 그가 죽자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합니다. 검투사들은 칼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 빠져나갔다 합니다. 그날의 검투에서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델리마쿠스 수도사의 시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다 합니다. 이 수도사는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날로부터 로마의 검투 경기가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가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신 것을 생각하게 하는 또 다른 형태의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화목의 피입니다.
요일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거룩한 진노를 하십니다. 죄인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극히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진정 시킬 수가 있는가요?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시킬 수 있는가요?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야만 했고, 그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를 잃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호의를 다시 찾았고 화목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여인이 죽어가고 있을 때 목사님이 찾아가서 "자매님, 하나님과의 화평은 만들어 놓았는가요?" 하니까 "아니요"라고 했다 합니다. "잘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당신은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을 대면하여 모든 생활을 결산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그럼요, 그러나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1,900여년 전에 이미 갈보리 산에서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안에서 편히 쉬면 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가 만든 화목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하므로 더할 필요도 없고 뺄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피로 화목을 가졌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가르침을 믿고 생명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되 속죄의 피의 가르침을 행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피의 복음
레위기 17:11 / 김홍도 목사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오늘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1月28日) 신문에 여호와의 증인 박월선(朴月仙) 씨가 12살난 그의 딸 김경숙양이 "전격성 간염"으로 하혈을 시작한지 열흘이 가깝도록 사경(死境)을 헤매이는 데도 피에 대한 잘못된 교리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다가 종래 그 귀여운 딸을 숨지게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너무 충격적이었으므로 목사의 한 사람으로 묵과할 수 없어 오늘 아침 "기독교와 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피에 대한 교리는 사람의 영혼과 생명을 구원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 그들의 잘못된 교리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는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성경 전체가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인데 반하여 피는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피는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사망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 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사망이요 피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피만이 사람들의 죄를 속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먼저 역사상에 나리난 속죄관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멕시코 : AD 1300년경에 멕시코에서는 유행병이 돌거나 재난이 오면 죄 때문에 온 신의 진노라 생각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는데 흠이 없고 잘 생긴 청년을 골라서 그의 소원을 다 해준 다음에는 벌거벗겨서 그 몸에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 흰색 등 여러 가지 색칠을 해서 그들의 제사장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로 그 제물 되는 청년을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군중들은 그 청년에다가 대고 "내 죄를 가져 가십시오(Take my sins), 내 죄를 가져 가십시요"(Take my sins)하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높은 피라밋 식의 제단에 데리고 올라가서 그들이 보는 가운데 시퍼런 칼을 들어서 그 청년의 가슴을 찔러 피를 흘려 뿌린 뒤에 죄를 대속하고 신의 노여움을 풀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아테네 :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는 그 도시에 질병이 만연하면 죄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해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데 가난한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많은 사람앞에 세워 놓습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자기들의 죄를 그 사람에게다가 고백한 다음에 돌로 쳐서 피를 흘리고 죽게 하면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고 신의 진노를 풀었다고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합니다.
색소니 : 구라파 Saxony에서는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페르샤 전쟁 때 잡혀온 포로 중에서 몇 사람씩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트레이스 : Thrace라고 하는 곳에서는 그 도시의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사람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집트 : 古代 Egypt에서는 사람을 잡아 심장을 찔러서 제사를 드리는데 정월 초하룻날 세 사람씩 제사를 드린 기록이 있습니다.
스키디안 : 현재 소련인에 해당하는 Scythian 사람들은 사람의 심장을 찔러서 나온 피를 병에 담아다가 신의 노여움을 푸는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 다호미(Dahomy)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닭이나 거위나 소같은 짐승의 목을 찔러서 나온 피로 제사를 드리다가 후에는 전쟁포로를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당들이 푸닥거리 할 때에 보면 한참 춤을 추고 돌아다니다가 돼지의 목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한 다음에 칼로 열十자를 긋고 그 가운데 칼을 꽂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를 더듬어 보면 세계 모든 사람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모두 피로써 그들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습관과 풍습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프레이저(Frazer) 교수는 "The Golden Bough"라고 하는 책에서 말하기를 "세계 인구의 90%가 종교적 인 경축일에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고 했으며 기독교 인간학자 알랙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 박사는 "세계 인구의 95%가 피로써 신께 제사를 드렸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로서 죄사함 받는 습관과 풍습에 대하여 그리골리아 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신께 죄를 짓거나 악을 행했을 때에 어떤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속죄받는다고 믿는 것은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난 성품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학자들이 발견해 낸 이런 피로써 죄사함 받는 습관과 인간의 성품은 어디서 기원했겠습니까? 단순히 우연히 생긴 미신적 습관이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역사적인 성서적인 근거가 있겠습니까?
이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곧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인간들에게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피로써 죄를 속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성서적 속죄관>
그러면 이제 성서적인 속죄관을 살펴 보겠습니다. 레위기 17장 l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셨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같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으나 마침내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심으로 이제는 구약시대처럼 소나 양을 가지고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어떤 짐승의 피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먹지 말라거나 수혈을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죄가 아무리 많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 26:28)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성전에 피를 바르는 제단뿔이 있었는데 죽을 죄인이라도 그 제단 뿔을 붙잡으면 죽이지를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언약(covenant)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아무리 많아도 흉악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피를 믿기만 하면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해주신 믿음으로 붙잡고 살 수 있도록 내어 주신 손잡이와(hadle)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와 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도덕과 윤리의 제도나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의 종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범죄하여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간들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나가면 하나님과 다시 가까와지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것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탄을 대적하여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했습니다. 예수의 피로써 사탄 마귀를 무찌르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마귀가 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 양심에 송사할 때 물리치는 능력의 방패가 됩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말씀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한 후에 그 수치를 가리워 보려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무잎 치마는 인간의 도덕과 수양과 철학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헛된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께서 짐승(羊)을 잡아 만들어 입혀준 가죽 옷은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옷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만 의지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흉악함에도 불구하고 공로가 없어도 "의인"이 되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카인이 제 손으로 지은 농산물로 제사드려 응답받지 못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줄 아는 인간들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 열납된 아벨의 양을 잡아 피를 뿌려 드린 제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카인은 피에 대한 믿음이 없고, 아벨은 피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열납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를 많이하고 의롭게 보여도 자기들의 노력과 수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대속하신 어린양 예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나오는 자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가 있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온 애굽 땅에 어느 집에나 장자 죽이는 재앙이 다 임했으나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넘어간 것은 장차 애굽과 같은 세상을 다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때 유월절 양이 되어 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마음의 문설주에 바른 사람은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무사히 건넜으나 애굽 군사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수장되고 만 것은 그들은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페인트 칠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대문에 금칠을 했다고 구원받은 것아닙니다. 그 문 안에 착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 살았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출 12:13)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하여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은 어린양 예수의 피 공로를 마음 속에 믿는 그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심판의 표는 우리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받은 위에 우리의 행한대로 상급 심판을 받지마는 멸망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복싱 전 세계 참피언이었던 유제두 선수가 와지마와 더불어 싸우다가 그만 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주심이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심은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제두 선수의 편을 들고 싶었겠지만 공정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적수인 와지마의 손을 들어 이겼다고 선언했습니다. 참피언 벨트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유제두 선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마귀와 더불어 싸워서 졌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을 사랑하셨지만 공평해야 했기 때문에 죄의 값을 사망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인간의 모든 권리를 마귀에게 빼앗기고 영생을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두번째로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귀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제1의 아담의 후손으로 멸망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는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무조건 의인의 반열에 서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미국의 어떤 판사의 아들이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교통 순경에게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갔습니다. 법정에 들어와 보니까 담당 판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흠, 우리 아버지야 나를 용서해 주겠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쳐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체도 않고 엄숙한 얼굴로 아들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의 이름을 대시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아버지! 나야요 나!"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여기는 법정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어서 이름을 대시요"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예." 죤-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피 고의 주소는?" "아니 아버지 주소하고 똑같지 않아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다시 호통을 치면서-"어서 주소를 대시요!"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소를 다 댔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꾸며서 낭독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벌금 100만원" 그 때 그 아들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불공평(?)한 처사에 통곡했습니다. 그 때 어느새 아버지가 법복을 다 벗어 버리고 신사복을 갈아 입으시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얘야! 너 얼마나 놀랬니" -"나는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될 법관인데 내 아들이라고 사사로운 인정에 끌리어서 법을 어길 수가 있느냐?" 하면서 벌금을 물 수 있도록 l00만원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저기에 가서 싸인을 받으면 너는 나갈 수 있다" 그제서야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습니다. 법을 살리기 위해서 재판도 아버지가 하고 형벌도 아버지가 내렸습니다. 벌값을 아들이 낼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돈을 털어서 벌값을 치러 주시고 아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 값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었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공의도 살리시고 사랑도 살리기 위하여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려 뜨거운 피를 다 쏟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를 사함받고 영생을 얻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아멘-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레 17:10-16
피는 생명입니다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레17:1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17:11) 그래서 속죄는 피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왜냐하면 죄는 사망을 가져왔고 그 사망의 값은 오직 생명으로만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피로만 속죄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물론 이 속죄하는 피는 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그래서 하나님은 피를 먹지 말라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17:10),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레17:12) 여기서 "먹다"의 히브리어는 "אכל"(아칼)인데 "소비하다", "소멸하다"는 의미이며, 사람이 먹을 때는 선호하는 것을 골라 먹기 때문에 "선택한다" 또는 "제어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피를 먹는다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자기 맘대로 선택하고 버리거나 하여 제어하고 소멸하거나 소비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자기 맘대로 취할 수 도 버릴 수도 없으며, 선택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자기 멋대로 하는 자는 피를 먹는 자와 같고 피를 먹는 자는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레17:14)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20:13) 이제도 우리 주께서 우리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시55:18) 아멘 아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0-16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 식용 금지에 대한 규례로, 어떤 피든지 먹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끓어질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피가 생명과 죄 사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피를 먹는다면 생명을 주신 여호와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실수로 피를 먹는 경우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하며 저녁때까지 부정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피 식용금지 명령, 그것의 이유, 명령의 적용범위, 세부 시행규칙 등입니다.
광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나 양을 잡을 때 지정된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짐승이라 하더라도 그 피를 함부로 흘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율법에서는 피는 곧 생명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먹는 것으로, 이는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하는 신성모독과 다름이 없습니다. 피의 식용금지는 종교적 규제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피의 식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는데 그것의 의도하는 바 가장 큰 목적이 있습니다.
피는 생명을 속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의 피가 없이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제단에서 속죄를 하는 용도로 허락된 것이 피인데, 이를 먹는다면 죄는 결코 사함 받을 수 없기에 따라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 와 그것은 그리스도와 직결됩니다. 희생제물의 피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피에는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하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죽어야 한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사람 대신 짐승이 죽는 불완전한 대속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한 구원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어 온 인류가 구속된 것입니다. 피는 그런 신성한 것이기에 식용이 금지된 것입니다.
▶ 피 하면 흡혈동물이나 피를 먹고 산다는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 것 말고도 피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많습니다. 정력에 좋다고 사슴 피를, 몸이 허약하다고 동물의 생 피를 먹고, 국을 끓이느라 핏덩어리를 넣고, 동물내장에 돼지 피도 채워서 먹고, 피를 먹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피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미 폐기한 구약의 율법이라고 경시하며 재 껴 두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성경의 핵심진리를 무시한 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소란을 떠는 것 역시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규칙을 주신 그 의미를 깨닫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율법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구속사적으로 피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를 속죄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생명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피를 생명과 동일하게 보셔서 그렇지요. 이는 말 못하는 동물에게 대하는 태도가 곧 그 사람의 약자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대개 몰인정하고 야박하기 짝이 없어 사람이나 짐승을 학대하기 때문이지요. 피는 과학이 발달된 현대 의학으로도 만들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그리고 인간과 동물, 식물, 모든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만 할 것입니다.
회막 문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그렇게 사람과 동물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살인은 안 되며, 분명한 이유 없이 도살하는 것은 분명 죄라고 봅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생명존중의 사고 역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좋다고 아무거나 야만적으로 잡아 먹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정말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노예의 신분이라면 못할 짓도 없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이라면 정녕 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그 모든 행동이 신분에 합당하게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신 부분도 바로 그런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동물도 그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면 그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창조한 자연과 그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나 잘못된 판단으로 자연이 손상되거나 귀한 생명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보배로운 피를 무시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좋게 여기는 신자
레 10:16-20
율법을 스스로 어기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바로 세워야 합니다. 아론은 그래서 레위기 1-8장에 계시된 제사법대로 첫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기쁘게 열납 하셨으며 아론은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의 불로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선 아론의 삼남과 사남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다시 제사법을 어겨서 모세가 노를 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는커녕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마저 죽이면 아론의 집안은 물론 대제사장직을 이을 후손이 없어지기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눈을 감아준 것입니까? 그럼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율법의 규정대로 아론의 조카들더러 그 직무를 감당하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법을 어긴 것 아닙니까? 제사법을 제정한 의미가 없어지고 먼저 심판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만 억울한 것 아닙니까?아론의 변명을 들은 모세도 없었던 일로 칠 뿐 아니라 좋게 여기기까지 했습니다.(20절)
그렇다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신자들이 인간적 이성으로 판단하여 그 적용에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만야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는 것입니까?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율법의 제사 규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네 종류의 속죄제
레위기 4장에 따르면 속죄제를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 따라 네 종류로 구분해서 희생제물의 종류와 제사 드리는 방식을 각기 다르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네 신분은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입니다.
둘째 신분인 회중을 레4:13에서 ‘온 회중’의 죄라고 말하지만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지은 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 ‘모든’, ‘전부’ 같은 수식어는 히브리어 표현법상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일 뿐입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지은 죄입니다. 함께 고의로 작당 모의한 죄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는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의 제사(레16장)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보다 주목할 내용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백성들에게 허물을 입힌다는 말씀입니다.(레4:3) 제사장 개인의 죄를 회중의 죄와 동격화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에게 들고나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첫째 직무입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그럼 그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또 백성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기에 그 죄는 백성들의 허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제사장과 둘째 회중의 속죄제는 그 절차가 동일하고 가장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물은 수송아지를 바쳐야 합니다. 이 단어의 원문은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young)는 뜻이므로 사실상 가장 힘센 황소를 의미합니다. 소는 당시에 제일 가치가 나가는 제물입니다. 그만큼 제사장과 회중의 죄는 중차대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제물을 죽인 후에 피를 성소에 갖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일곱 번을, 그 숫자의 완전하다는 의미대로, 뿌리고 분향 단 뿔에 발라야 합니다. 나머지 피 전부는 번제단 밑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모든 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죽음으로 그 죄 값을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 제물의 기름과 또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콩팥은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나머지 고기도 전부 번제단의 재와 찌꺼기를 버리는 진 밖의 지정된 장소로 갖고 가서 완전히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실제로 죄인의 죽음을 상징하며 죄의 흔적, 오염, 폐해, 부작용을 철저히 씻고 고쳐서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셋째와 넷째,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는 한 개인이 지은 죄를 위한 것입니다. 족장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에 조금 더 비싼 숫염소를, 평민은 그보다 조금 격이 낮은 암염소나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피는 성소에 갖고 들어갈 필요 없고 전부를 번제단 밑에 쏟아 부으면 됩니다. 기름과 콩팥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제물의 나머지 고기들은 따로 지정된 즉,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당사자와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의 기쁨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백성들의 모든 생사고락의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이 살면 함께 살고 그들이 죽으면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이 이스라엘의 진중에 항상 함께 있으며 떠난 적이 없듯이 말입니다.
제사절차를 혼동했는가?
다시 본문을 봅시다. 우선 16절에서 모세가 염소를 찾았으나 이미 불에 살랐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일단 개인이 드린 속죄제로 나머지 고기를 먹으려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15절에서 요제로 하나님 앞에 흔들며 제사 드린 고기 중에 가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의 몫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고기를 먹으려고 가져 오라고 했는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이미 다 태워 없앤 것입니다.
혹시 17절에 그 고기가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둘째 백성들이 단체로 지은 죄를 위한 제사였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회중은 영어 man이 대표단수 용법으로 인간전체도 말하지만 한 사람을 가리키듯이 한 개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17절 후반부에 너희에게 준 고기라고 했고 또 18절에서 피를 성소에 갖고 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제사는 분명히 셋째와 넷째의 개인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결국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정에서 셋째 넷째 제사 절차의 일부를 첫째 둘째 제사처럼 드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나답과 아비후가 율법대로 제사지내지 않아 심판 받아 죽은 것을 바로 얼마 전에 보고도 또 어기느냐고 당연히 야단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간단한 제사 절차를 혼동했을 리는 없습니다. 제물이 소가 아닌 염소인 것만 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이 19절에서 모세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라고 합니다. 마지막 제물 먹는 일만 빼고는 율법대로 온전하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장남과 차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이전 사건을 말합니다. 마치 오늘에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어법은 가까운 과거나 미래를 구체적인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론은 장남과 차남이 한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속죄 제물을 차마 먹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그럴 기분이나 마음의 태세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대제사장이자 아비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비라는 개인적 입장으로도 그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 화목잔치에 함께 참여해 고기를 나눠먹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은 아직 아론과 그 동생들이 더 회개 자숙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영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감정으로도 아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또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도 됩니다. 아론은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즉, 하나님도 선하게 여긴다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모세의 그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율법의 문자적 규정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에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를 안 드리면 더 좋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술을 마셨고 번제단의 불을 꺼트렸습니다. 스스로도 명백히 죄를 범했습니다. 본문에선 일부 제사의 절차만 어겼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직접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고 하나님과 회중들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제사 절차를 어기긴 했지만 더 큰 헌신과 열심을 드러낸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의 절차를 일부 어겼어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적용하면 이들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면 꼭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다른 제사들이 아니라 속죄제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속죄제는 이미 범한 잘못과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 받아 그분과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지은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긍정적 의미이지만 쉽게 비유를 하자면 십일조는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좋습니다. 헌금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이미 받은 축복과 은혜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럼 십일조를 많이 바치면 그만큼 받은 것이 많다는 뜻이므로 십일조는 많이 바칠수록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생생한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과 그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삼상15장) 사울은 그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와 보물 등 귀하고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가 없는 것들만 다 없앴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야단치자 사울은 자신의 욕심은 감추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겨 놓았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순종이 번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우상에 절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15:22,23) 사울이 우상에 직접 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분 외의 어떤 다른 힘이나 영향력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우상숭배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말라고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은 개인적 탐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어겼습니다. 또 자기 탐욕을 따랐으므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까지 어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 3:5에 탐심은,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런 마음만 먹었는데도,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하지 말고 완성하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해서 율법을 깡그리 무시하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바칠수록 좋은 십일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박하, 회향, 채소까지 십일조를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은 버리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마23:23)
오늘 본문에 드러난 율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속죄 제사는 필수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죄를 짓지 않고 그분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특별히 제사장, 지금으로 치면 목회자들은 자기가 맡은 회중들을 위해 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더욱 철저히 자기를 겸손하게 낮춰야 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울을 야단친 사무엘은 백성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고 대신에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삼상12:23) 목사는 자기가 맡은 양떼인 회중들의 죄와 허물은 물론 고난과 문제를 품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삼아서 기도하되 교인들보다 더 안타깝게, 더 간절하게,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몰론 그 고난과 문제를 겪고 있는 신자와 정서적으로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전임(full time) 사역자입니다. 회중은 일상적인 생업에 바쁩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교인들이 생계를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그래서 기업을 받지 않아도 백성들의 십일조로 먹고 살게 해준 것입니다.
본문의 아론도 그렇게 받아먹을 수 있는 고기인데도 도무지 자격이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목회자는 회중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생업입니다. 밥을 먹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오직 제사장으로써의 맡은 직무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아서 각각 부르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른다고 했습니다.(요 10:3,4) 신앙공동체는 그 구성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 혼자 예배나 성경공부를 주관하는 경연장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져서 목사가 부득이하게 교인들을 이름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구역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서 평신도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소그룹 사역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신자의 문제를 그 신자가 한 번 기도해도 열 번은 기도해주어야 하고, 구역장도 구역원의 문제를 구역원이 한 번 기도하면 네다섯 번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지촌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제가 목회 초기에 어떤 분을 심방 갔다가 크게 쇼크 먹은 적이 있습니다. 국제 결혼한 여자성도였습니다. 오래 전이라 죄송하지만 기지촌의 소위 말하는 양공주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일반 가정을 한번 심방가면 자기들은 동일하게 한번만 심방 오면 차별로 간주하고 두 번 이상 와주어야만 그나마 동등하게 대해준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았고 고뇌와 슬픔이 깊었으며 지금도 그 아픔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주로 세리와 죄인과 불치병자들 같은 소외된 자들을 만났습니다. 또 누구를 만났습니까? 창녀들도 만나주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지촌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많이 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별로 없었으며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만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으며 세상이 먼저 그들을 버렸습니다. 도움과 위로를 받을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 사회에선 이미 하나님에게 저주 받아 구원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마저 그들을 외면하면 죽음밖에 남지 않은 자들로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이었습니다.
아론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어겼지만 사실은 더 헌신했습니다. 한 번 심방할 것을 두 번 심방을 간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좋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율법 규정대로 했더라도 제사장의 직분을 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연히 기뻐합니다. 그가 더 철저히 낮아졌기에 하나님의 더 좋게 여긴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이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당연히 너무나 기뻐하시지만 목사는 더 철저히 낮아지고 섬겨서 하나님의 기쁨을 몇 배로 배가 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목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 앞에 제사장으로 목사로 서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기도하며 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긴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하고 아직도 탐심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며 주중에는 매 번 넘어지며 주일에 겨우 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 정도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구원하신 뜻은 당신을 따르며 자기 십자가를 지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자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섬기는 것의 몇 배로 교회 밖의 미혹된 영혼, 예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며 섬겨야 합니다.
신자가 평생 져야 할 멍에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일 성수하고 기도하고 성경에 능통한 것들 다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만 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주님은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을 실현하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기에 그것을 바로 잡고 여유를 찾으면 내가 쓰고 남는 것으로 힘든 사람도 돕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내 코가 비록 석 자나 빠져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내보다 더 딱한 사람들이 많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쓰기에도 부족하지만 그마저도 쪼개서 주위에 나눠주겠다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불신 이웃의 코가 내 코보다 덜 빠졌어도, 그들이 겪는 고난과 문제의 세기가 훨씬 약해도 여전히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져야 하고 그들을 내가 가진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능한데다 영적으로 어리석고 죄에 찌들어 자기 의지와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에 매번 실패하고 삶이 갈급하고 허망합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빌어야 할지 몰라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연발합니다.
신자로선 그들의 현실적 고난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것이 더더욱 불쌍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보다 그들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찾아가서 주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더라도 그들의 문제에 대해 기도해주고 고민을 들어주거나 같이 있어주기라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가장 큰 은혜, 축복, 권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모르는 자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입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예수를 믿고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신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신자의 숙명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다면 그들을 만나고 돌아와 잠시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주게 됩니다. 가슴이 먹먹한 것은 신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간구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신자부터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은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주일에 지난주에 지은 죄만 용서받는 심정으로 나오는 것은 속죄제를 드린 것뿐입니다.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닮아가는 삶이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분은 이 땅에 와서 인간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최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분을 따라 사는 것만이 신자의 참된 축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어서 분명히 힘들고 고달픈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함께 나눠지면 그 어려움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불신자들도 잘 알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자에겐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그것도 훨씬 더 큰 고난을 버려두고 이웃 성도는 물론 불신자의 훨씬 적은 고난을 덜어주고 나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주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신자에게 비로소 참 안식과 평강이 넘치도록 임합니다. 또 그럼으로써만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나태하거나 내 자신의 문제만 돌아보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꾸만 뒤틀림이, 속죄제를 드릴 일만 생길 뿐입니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5-16 / 피영민 목사
서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피’입니다. 성경 전체에 총 460번 사용되었고, 구약에 362번, 그중에서도 레위기 17장에 13번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푸줏간의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푸줏간의 종교는 원시 종교이기 때문에 현대인의 종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피 없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며, 성경 전체를 부정하는 매우 악한 주장입니다.
레위기 17장을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말씀이라 하여 학자들은 ‘Foundational Chapter’라고 부릅니다. ‘근본이 되는 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레위기 17장을 ‘구약성경 가운데 있는 신약성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11절은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인 된 인간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피 밖에 없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인간이 천국 갈 수 있는 길도 피 밖에 없고,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도 피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피는 1차적으로 짐승의 피를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킵니다. 짐승의 피는 예표요, 그리스도의 피가 실체라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기 17장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의를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속죄의 대원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원리를 선언하기 위해 먼저 세 가지 전제조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을 잡을 때는 오직 한 장소에서만 죽일 수 있습니다. 4~5절에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희생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회막문’에서만 죽일 수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을 수 있는 장소는 정확하게 한 곳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가 오직 한 장소, 즉 갈보리 언덕에서 드려질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종교가 그들만의 성지를 만들어놓고 성지순례를 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질 장소는 여러 곳이 아닙니다. 오직 한 곳,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골고다 언덕 밖에는 없습니다.
둘째로,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임명하신 제사장뿐입니다. 6절에 “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문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피를 회막문 단에 누가 뿌리라고 하셨습니까? 제사장입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뿌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임명하신 제사장만 가능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신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죄인들이 아무리 갈보리 언덕에서 피를 흘린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 좌우편에서 흘린 강도의 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강도의 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희생제사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7~9절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너는 또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혹시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번제나 희생을 드리되 회막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대상인 숫염소는 올바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숫염소에게 음란하게 제사했습니다. 창기를 동원한 성적인 행위를 통해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숫염소에게 하는 제사는 음란한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숫염소에게 음란하게 제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속죄의 대 원리는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원리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피의 가치
그러면 왜 피 흘림이 있어야 할까요?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4절에도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의 가치는 생명의 가치입니다.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피와 생명은 동일한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짐승의 피가 소중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3~4절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피도 소중한데, 하물며 사람의 피는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사람의 피는 더욱 고귀합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 생명을 앗아간 사람은 그 사람의 피도 흘려 가해자의 생명도 빼앗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조금의 양보도 없으십니다. 그만큼 사람의 피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인권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남의 생명을 빼앗은 가해자에게는 인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죽었다면 그 사람도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과 피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죄인 된 사람의 피도 이처럼 소중하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소중하겠습니까? 성자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더 귀중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보통 피가 아니라 보배로운 피입니다. 성경에 보배롭다고 기록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피요, 둘째는 신명기 26장 18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이며, 마지막은 베드로후서 1장 1절에 기록된 성도의 믿음입니다.
구약성경에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모두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피는 능히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표라는 것입니다. 피가 죄를 속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사람의 죄를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누가 여러분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겠습니까? 돈 몇 만원도 그냥 주지 않는 세상입니다. 수혈을 원해도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 생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자기 생명을 주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서 5장 7~8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을 위해서 대신 죽겠다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시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를 잊어버린다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돼지 피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지옥 형벌을 대신 받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Ⅱ. 피의 다섯 가지 능력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베드로전서 1장 19절 말씀을 본문으로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수백, 수천 가지의 유익을 준다고 말씀하며, 그 가운데서도 다섯 가지 중요한 피의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속죄’는 ‘카파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어의 ‘Cover’가 되었습니다. 속죄는 한 마디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죄를 찾으시려고 해도 그리스도의 피가 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죄를 1년 동안 덮어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 번에 영원히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지 않으신다면 강단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죄를 덮어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물론 법원에 보석금을 내고 석방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보석금제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석금을 받지 않으십니다.
에스겔 7장 19절에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1장 18절에도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도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고, 왕이나 권세자도 우리의 죄를 덮어줄 수 없고, 지혜자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고, 부자도 그 재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 동창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부자로 사는 것은 행복하지만, 부자로 죽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참 지혜로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로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은이나 금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는 보배로운 피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피는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열 번째 재앙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앞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재앙이 시작되자 집집마다 장남이 다 죽었습니다. 애굽 사람들 집에서는 곡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은 집들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습니다. 재앙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재앙을 넘어가게 하는 보호의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피 발라진 집을 넘어갔다고 해서 이 절기를 ‘유월절’(Passover)이라고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도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업장이나 직장, 가정에 갖가지 재앙이 밀려올 때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시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자녀들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귀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 재앙의 천사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변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도 말을 합니다. 더 낫게 말을 합니다. 창세기 4장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는 가인에게 억울하게 죽었나이다! 저는 죽을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나이다!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억울함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더 좋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아버지가 택하셔서 제게 주신 백성들의 죗값을 갚기 위해 제가 대신 피를 흘렸나이다! 저들에게 죗값을 묻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 피를 보시고 아버지의 진노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의 허물을 대신 갚았나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바로 이런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살다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위해 변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제가 흘린 피를 보시고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피가 이렇게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피는 ‘마귀를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저’는 옛뱀이라고도 하고 큰 용이라도 하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이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면 도망갑니다. 또 성도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굴복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방종교에는 뱀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엊그제 꿈을 꾸는 데 큰 뱀 두 마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뱀이 다른 뱀을 잡아먹더니 먹힌 뱀도 죽고, 먹은 뱀도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두 마리 모두 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꿈을 꿨습니다.
본문에 보니 옛뱀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패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물러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나 목사라고 해도 죄와 허물이 있는 한 마귀와 담대히 싸우기 어렵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아무리 소리쳐 봐도 사단은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죄가 있는 한 담대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리쳐야 합니다. 설령 우리에게 죄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허물을 보려다가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마귀와 싸우는 무기입니다.
삶에 우환질고가 일어나고, 자녀들이 방황하고, 사업이 힘들어지면 그것이 귀신의 역사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사단을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자꾸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그 능력으로 마귀를 완전히 물리쳐 주실 줄 믿습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성화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자꾸 씻어내고, 우리가 점진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속죄의 능력으로 죄를 덮어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고, 마귀와 싸울 때 무기가 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멀리하지 말고, 항상 그리스도의 피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Ⅲ.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용서가 가능하실텐데, 왜 하필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나는 하나님이라. 내가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하노라!”고 선포하시면 될 일을 왜 하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 때문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 ‘피’라는 단어가 460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반한 죄인이고, 하나님의 법을 침범한 범법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죄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과 화목 됨이 필요하고, 성화의 능력이 필요하고, 천국에 들어갈 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되, 피의 속죄가 없이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피의 속죄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죄 사함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불가능하며, 예배를 드려도 열납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설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를 흘려 생명을 주셨고, 이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 론
여러분, 천국 가는 길은 금으로 만들어진 황금 길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길은 하얀색으로 포장된 길도 아니고, 검정색 길도 아닙니다. 아스팔트길도 아니며, 돌로 된 길도 아니고, 파란색 길도 아닙니다. 오직 천국 가는 길은 빨간 길(Scarlet Road)인줄 믿습니다. 이 빨간 색 길만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져 있는 길, 그 피가 뿌려져 있는 영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에게 복을 열어주시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복을 열어주는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를 덮어 주시고, 내 죄를 씻어 주시며,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사 마귀를 이기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내 삶이 거룩해 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