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조지는 1865년 둘째 아들이 출생할 당시에,
"나는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내려 가면서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서 돈을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한 남자를 불러 세우고 그에게 5달러가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어디에다 쓰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내가 해산했는데 아내에게 음식을 사 먹일 돈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돈을 주었다. 만약 그가 주지 않았더라면 당시 나는 너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어서 그를 죽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869년, 당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의 전신 이용 권리를 얻기 위해, 뉴욕 시로 출장 가서 특파원 자격으로 대언론사와 싸우며, 깊은 생각에 잠기며 그 도시의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그는 그 도시의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많은 시설물들에 대하여 감탄했다. 그 도시는 헨리 조지가 상상했던 그 어떤 도시보다 개인들이 거대한 부를 누렸고, 그 부는 저 유명한 몬테 크리스토의 부와 어깨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군주들의 궁정에 비견될 만한 거대한 부 바로 옆에 가난과 타락, 가난과 수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처럼 극명하게 대조적인 광경을 보고서 탁 트인 서부에서 출장 나온 젊은이는 마음속에 깊은 실망, 분노, 당혹감을 느꼈다.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돌아가고 남을 만한 자연의 혜택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이 축복의 땅에서 왜 이처럼 생활 조건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야 하는가?
왜 저런 엄청난 부가 저런 심각하고 열악한 가난과 공존하는가?
왜 이처럼 풍성한 부를 자랑하는 사회에서 신체 튼튼한 남자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얻지 못하는가?
왜 여자들은 배가 고파서 기절을 하고 어린아이들은 유아노동의 단조로운 바퀴를 계속 밟아 돌려야 하는가?
아니다. 청년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 대낮의 도심 한 거리에서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작은 마을 앞으로 10년 안에 큰 도시가 될 것이다.
10년 사이에 차를 대신하고, 전기가 촛불을 대신할 것이다.
그 도시 효율성을 높여주는 기계류와 기술 개량품들이다.
앞으로 10년 사이 이자가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임금이 더 높아질까?
자신의 노동력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보통 노동의 임금은 높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있고 노동자가 독립적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며 삶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올라갈까?”
“지대 혹은 땅의 가치이지요. 지금이라도 당장 사가지고 오래 붙들고 계십시오.”
즉, 부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려면 토지가 필요하므로, 그 토지를 지배하는 자는 연명에 필요한 몫만 노동자에게 남기고 노동의 과실을 모두 지배한다.
이 간단한 진리는 그리스와 로마 사회의 내부 갈등을 유발한 원인에도 적용되었다.
토지 사유제와의 투쟁이었다. 토지의 사유가 확대됨에 맞서서, 그리스에서는 리쿠르고스와 솔론이, 로마에서는 리키니우스 법과 그 후의 토지 분할 역할을 했다.
이처럼 토지 사유제를 억제했던 시절에 두 나라 국력과 영광이 드높았으나, 결국에는 토지 사유제가 득세하면서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대규모 영지가 그리스를 망쳐놓았고 후대에 들어와 대지가 이탈리아를 멸망시켰다.
위대한 법률가와 정치가들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마침내 소수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고 줄어들었으며, 예술은 쇠퇴했다.
지성은 허약해졌고 인류 찬란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던 종족은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현대 문명이 로마에서 가져온 토지 사유제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로마 제국에서 그 완성된 형태에 도달했다.
미래에 온 세상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되는 로마시가 처음 이탈리아 땅에 등장했을 때, 로마 시민은 각자 양도 불가능한, 자신의 집이 들어서는 자그마한 땅을 갖고 있었고, 공유지는 공공의 권리에 속하는 곡창 지대로서 평등을 보장하는 관습의 규정에 따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정복에 의하여 이 공유지가 확대됨에 따라 로마의 귀족 가문들을 그 공유지의 일부를 떼어내어 자신들의 거대한 개인 영지로 만들었다.
이 대규모 영지들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당기는 인력의 법칙에 의해 법적 제한과 정기적인 토지 배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을 모두 짓눌러서 그들의 땅을 엄청난 부자들의 라티푼디아에 편입시켰다.
소규모 농민들은 부채에 내몰려 노예로 전락하거나, 높은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농이 되거나, 군단의 제대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던 해외의 새로 정복된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혹은 수도인 로마로 몰려들어 팔아먹을 것은 투표권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떠들아야 했다.
황제 제도가 변질되어 곧 동방 국가의 무제한적인 독재를 휘두르는 군주정으로 바뀐 것은 부패한 정치 제도의 필연적 결과였다.
로마 제국은 비록 겉으로는 온 세상을 그 판도 내에 편입시켰으나, 실제로는 빈껍데기나 다름없었고, 변경 지대의 건전한 생활 제도 덕분에 간신히 붕괴를 피하고 있었다. 변경 지대에서는 군인 정착자들 사이에서 토지가 분배되었거나, 아니면 고대의 좋은 관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국력을 소진시킨 라티푼디아가 은밀하게 나라 밖으로 마수를 뻗쳐서 시칠리아, 스페인, 갈리아 등의 토지를 병합하여 노예나 소작농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했다.
로마인들의 개인적 독립심에서 생겨나온 강건한 미덕은 쇠퇴했고, 과도한 경작은 농지를 피폐하고 했고, 예전의 농지에는 들짐승이 창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평등 정신으로 다져진 강건한 국력을 바탕으로 야만인들이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 침략해 왔고 마침내 제국은 붕괴되었다.
한때 그토록 영화를 자랑하던 로마의 문명은 폐허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세계 제국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 정복당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로마의 국력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멸망의 근본적인 이유는 토지 소유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해 보자면, 토지 공유제에 대한 거부는 멸망을 가져왔고, 토지의 평등한 분배는 국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헨리 조지는 빈곤을 불러오는 원인들을 점검해 나가다가 지대의 지불이 빈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헨리 조지는 토지 투기가 산업 불황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산업 활동의 각 시기에서, 토지 가치는 꾸준히 상승하여 결국 투기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땅값을 크게 폭등시켰다.
그러자 생산의 부분적 중단 현상이 발생했고, 그에 대한 필연적 결과로 효율적 수요가 중단되었다.
이로써 비교적 정체된 불황의 시기가 오고, 이 기간을 힘들게 견디어 나가면 다시 균형점에 서서히 도달되어 한동안 호황을 누리다가 투기가 다시 시작되고 그리하여 불경기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는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전국의 모든 토지를 공동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토지의 몰수 같은 과격하고 혁명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망설인다.
그래서 개인의 토지 소유는 인정하여 지주의 마음대로 팔게 하되, 그 토지에서 나온 지대를 모두 국가의 세금으로 흡수하자는 것이다.
아무튼 헨리 조지는 이 지대 수입이 너무나 막대하여 모든 국가 행정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토지세 하나만 남기고 그 밖의 모든 세금은 철폐하자는 것이다.
그의 사상을 지지하는 조지스트들은 이런 주장을 편다.
“지금 우리가 단일세만으로 국가 행정 비용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해서, 조지가 지적했던 일차적 원인인 현상, 즉 부동산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을 해결하려는 시도마저도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늘날 부동산의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조지의 주장은 오히려 더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영국, 파리코뮨의 프랑스, 남북전쟁후의 미국에서의 헨리조지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 방대한 분량의 정치철학서를 저술하게된 그 동기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몇 년사이 한국 사회를 보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하여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 되고 있는 현실과 도심에서 점점더 멀어져가는 주거지와 대비되는 거주환경들, 정책 입안자의 입장에서 이것의 최대 원인은 부동산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해결해야만 사회 정의의 구현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결되며 자칭 조지스트임을 알리는 듯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때가, 과거 로마나 유럽 그리고 아시아 중국 등 인류 역사에서의 개혁과 혁명 후에 따라온 필연적 혼돈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그것을 분깃점으로 하는 무산자를 위한 토지개혁이 이루어 지는 유토피아의 세계가 곧 펼쳐질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해방 후의 남한은 토지개혁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한국은 후기 자본주의의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