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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건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조화
수원 성지 - 병인박해시 수원화성에서 피운 순교의 꽃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316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42
수원 화성
2000년 대희년에 당시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는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북수동 성당(구 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다.
정조의 명으로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 화성은 둘레가 5,743m, 직경이1.8km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했는데, 성벽은 외측만 쌓고 내측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축성술로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정조가 승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피를 흘려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가 되었다.
4대 박해를 거치면서 한강 이남에서부터 경기도와 충청도에 이르는 수원 유수부 관할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수원화성 안으로 압송되면 우선 토포청(討捕廳)에 수감됐다. 그 가운데 양반 천주교인은 수원 유수가 집무를 보던 화성행궁에서, 일반 천주교인들은 판관이 집무를 보던 이아(貳衙)인 화청관에서 따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심문 후에는 형옥에 수감되거나 토포청에서 주관하여 성내 각처에서 처형됐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수원 화성에서 신앙의 증거지와 순교지로 밝혀진 곳은 위의 ‘화성행궁’, ‘화청관 이아’ 이밖에도 ‘중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이며 그 외에도 ‘종로 십자로’,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도 순교지로 추정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토포청, 이아, 화성행궁, 형옥, 행궁 앞 간이형옥, 동남각루, 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장터, 사형터, 화서문, 동장대, 행궁앞 종로사거리, 동북포루, 수원사 자리, 매향다리 서남쪽, 방화수류길 등 총 19군데나 발견됐다. 성 전체가 순교지인 셈이다.
지금까지 수원 화성에서 처형된 조선 후기 순교자는 83위 명단이 전해진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는 2,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성지에서는 현재 2차시복시성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17위와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 중 3위, 총 20위의 하느님의 종의 시복과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이처럼 수원성지는 조선 후기에서 근현대로 이어지며 순교의 역사가 흐르는 자리다.
북수동 성당
수원 성지의 중심 북수동 성당은 1923년 11월 23일 이 터는 옛 수원 유수부의 토포청 자리와 이어져 있는 팔부자 터였으며 북수동 성당은 수원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이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치명한 중영(中營, 摠理營)터와 일부 겹쳐진다.
초대 주임 파리외방전교회 르메르 신부에 이어, 4대 주임 뽈리 데시데라토 신부 때 큰 발전의 전기를 맞는다. 뽈리 신부는 부인들로 구성된 명도회, 청년 신심단체 돈보스코회,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어 전교에 박차를 가하면서 신자 수는 2,600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관할 공소도 28개에 달했다.
뽈리 신부는 프랑스 원조와 사재를 동원해 1932년 11월 13일 건축 면적 248㎡의 석조 고딕 성당을 건립했다. 1934년 성당 옆에 4년제 사립학교 소화학술강습회(현 소화초등학교)도 세웠다. 1959년 고등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북수원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76년 구식의 석조 사제관을 헐고 다목적 사제관을 다시 건립하고, 1979년 4월 5일에는 40년 묵은 옛 고딕 성당을 철거하고 연건평 236평의 주교관(主敎冠) 모양으로 된 새 성당을 준공 축성하였다.
성당 제단에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샤스탕 신부,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순교 성인 6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93년 성당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봉헌된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조성된 묵주기도길이 조성되었는데 수원 화성 봉화대를 응용하여 엄정석으로 봉주 형태로 만들었다. 성당 들어가는 길옆에 수원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이 현양비는 크기가 다른 12개의 버려진 기차 침목으로 ㄷ자의 치성(雉城) 형태이다.
수원성당 제4대 주임신부였던 뽈리 데시데라토(한국명 심응영, 재임기간 1931. 5-1948. 8)신부님를 기리며 비어 있던 소화초등학교 건물(등록문화재 697호)을 재단장하여 뽈리 화랑이라는전시관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상설전시관과 예술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성지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6시. 시간을 엄수하는 성당이면 문을 닫을 시간이다. 그런데 다행히 문을 닫지 않고 있다. 이때는 무엇보다 성전 참배가 우선이다. 옥외의 시설은 좀 늦어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대 뒷벽에 팔을 벌린 예수성심상 아래에 또 하나의 모자이크 십자고상과 감실이 있다. 그 아래 제대가 있고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제대 오른쪽엔 또 하나의 순교성인 유해 봉안대가 있는데 모두 5위이다. 왼쪽부터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이성우 안토니오,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이다. 제대 왼쪽에는 가시관을 쓴 예수님 얼굴상 액자가 놓여 있다.
제대 후벽 오른쪽에는 20위 하느님의 종 수원교구 순교자 명단이 게시되어 있고 그 아래 김대건 신부상이 있다. 그리고 제단 좌우 기둥에는 성모자상과 예수성심상이 높이 걸렸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특이하게 양쪽 벽면에 띠처럼 각각 7처씩을 모셨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단아하게 아름다운 색상으로 표현했다. 성당 뒤쪽에는 고해실이 있고, 2층에는 커다란 예수님 성상을, 그리고 1층에는 성녀상, 성가정상, 돌아온 탕자 성화가 걸려 있다.
십자가의 성당 밖을 나오니 맞은편 사무실 옆에 성모동산이 있다.
성당 옆 마당에는 옛 석조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ㄱ자로 서 있는데 전자는 소화초등학교의 옛 건물이며 후자는 근래의 소화초등학교 건물인데 소화초등학교는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상태다. 두 건물과 성당 사이의 마당에는 대형십자가와 성모상, 그리고 그 둘레에 봉주 묵주기도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주일 학교 여름캠프가 운영 중이라 텐트가 설치되고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봉주 묵주기도의 길은 2007년 6월24일에 축성되었는데 수원 화성의 봉화대의 형태를 응용했다. 곧 세계 유산 수원 화성의 둘레 5743m의 30분의 1인 191m로 봉주 묵주기도의 길을 조성한 것이다. 봉주 아래쪽에는 형구와 성체를 상징하는 구멍을 뚫고, 수원화성의 순교와 기쁜 소식을 희망의 연기로 세계만방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국내 엄정석을 봉주석으로 사용하고 백색과 적색의 붉은 장미를 심고 수중용 안전 방수 조명 장치를 설치했다.
묵주기도의 길과 두 소화초등학교 건물 사이로는 성모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ㄱ자로 나 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이 옛 석조 소화초등학교 건물(지금은 뽈리 회랑) 입구인데 여기에는 소화초등학교 설명 안내판, 그리고 4대 주임으로 수원 성당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뽈리 데시데라토 신부상이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소화초등학교는 1934년에 설립된 ‘소화강습회’에서 시작되었다. 소화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교훈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이었다. 가장 큰 계명인 천주 공경과 이웃 사랑이었다. 현재의 초등학교 명칭은 1946년 수원 소화국민학교로 개교하면서 사용했다. 원래 단층 목조 건물 3개 교실로 시작되었으나 육이오 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1954년 미군과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석조 2층 6개 교실 건물을 완공됐다. 그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을 완공하여 사용하다가 2002년 소화초등학교가 광교동으로 이전되자 건물의 소유권은 수원교구로 이전되었다.
2007년 석조건물은 학교 설립자인 뽈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한 뽈리 화랑으로 개방되어 현재 사용 중이다.
▲뽈리 데시데라토 신부
1884년 10월 27일 프랑스 베르녹에서 태어나 1906년 차부제품을 받은 그는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아, 1907년 8월 8일 우리나라에 입국하였고 1931년 5월 수원 북수동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북수동 본당은 수원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본당이었지만, 교세는 미미했다. 본당이 있던 수원 화성(華城) 인근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배타적이었고, 무속신앙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세가 오히려 강했다.
뽈리 신부가 부임할 당시 70여 명에 불과했던 본당 신자 수는, 심 신부가 재임한 18년 사이에 2,000여 명으로 늘었다. 그는 프랑스의 원조와 자신의 사재를 동원해 고딕식 성당을 건축하고, 1934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소화강습회(지금의 소화초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뽈리 신부가 정한 애주애인(愛主愛人)의 교훈은 아직도 사립 소화초등학교의 교육을 통해 이어 내려오고 있다.
수원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한 뽈리 신부는 1948년 8월 천안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신자들은 주임신부에게 피난을 권했지만, 신부는 “천안에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성당을 지키다,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에 체포돼 9월 23~26일 경 피살됐다.
뽈리 회랑을 뺀 성당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니 저녁 때인 6시 20분. 나오는 길에 철도 침목을 활용하여 만든 수원 순교자 현양비, 길 건너 맞은편에 순례의 집을 끝으로 북수동 성당 순례를 마쳤다. 순례의 집은 공사 중이었다.
순교 현양비는 의 12개의 버려진 침목으로 만들었다. 버려진 침목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수원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각각 역량이 달랐던 예수님의 12제자를 뜻하기도 한다. 형태는 수원화성의 ㄷ자 치성 구조로 만들었는데 치성(雉城)의 ‘雉(치)’는 ‘꿩 치’ 자이다. 이는 꿩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바깥을 경계하는 것처럼, 신앙인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내적으로 주님을 굳게 믿고 외부의 악의 세력을 경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장 왼쪽 가장 긴 침목 위의 물고기의 의미는 희랍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의 첫 글자를 따면 ‘익투스(물고기)’라는 단어가 된다. 물고기는 박해시대에 카타콤바 등에서 예수님과 기독교를 상징하는 암호로 사용되었다.
오늘 일정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 차 순례도 하루 앞당겨 끝이 났다. 친구 신 모세를 서울로 보내고 일단 수원에서 묵기로 했다. 첫째 이유는 오늘 운전 거리가 많아서 앞으로 또 너댓 시간을 차를 몰려면 무리가 따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계획에는 있었으나 못 간 수원 화성 순례코스를 내일 아침 시원할 때 가보고 또 뽈리 전시관도 보는 것도 부수적 이유는 되었다.
인터넷으로 숙박업소를 찾아 갔는데 주말이라 숙박요금도 평일보다 비싸다. 같은 모텔에서도 8만, 7만, 6만원 세 등급이 있었는데 에어컨만 나오면 아무려면 어떨까 하고 값이 싼 걸로 예약하고 저녁식사. 시원한 물냉면을 생각하고 인근 식당에 들렀는데 맛이 별로였다. 역시 냉면을 ‘잘하는 집’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염려했던 에어컨은 얇은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빵빵하다. 하지만 조명, 사워장, 화장실 등 다른 시설은 어느 하나도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성지순례(26) - 2024 .08. 09(금)-11(일) |
2024 .08. 11(일)
일찌감치 일어나 새벽 7시 주일 미사를 보고 덥기 전에 수원 화성을 일부나마 답사하기로 하고 6시 40분 경, 어제 갔던 북수동 성당에 다시 갔다. 미사 후 보좌신부인 듯한 젊은 신부 한 분을 만나 우리 계획을 이야기 했더니 직접 사무실에 가서 순례답사 코스와 관련된 소책자를 하나 건네준다. 그리고 직접 뽈리 회랑으로 안내하여 잠긴 문을 열어 주었다.
뽈리 회랑
뽈리 회랑은 1,2층 각각 3칸의 교실이다. 오늘 가본 곳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이다. 일체 작품 설명이 없어 그냥 둘러보기만 했다.
수원 화성 도보 순례길
수원 화성 순례길은 다음과 같이 세 코스가 있다. 북동쪽 길, 북서쪽 길, 남동쪽 길이다. 다들 1시간 이상을 걸린다. 이중 우리는 제1코스 북동쪽길을 택했다.
출발지는 성당 앞 성모동산이다. 이곳은 원래 팔부자 터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건립하면서 자본과 물류의 활성화를 위해 팔도의 부자를 한 집씩 유치했는데 그 집터가 바로 팔부자 터이다. 여기서 장안문까지 가는 옛길은 순교자들이 토포청에서 배교의 강요와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 포승줄로 굴비 엮듯 묶이어 장안문(長安門) 밖 장터로 죽임을 당하러 갔었던 그 길이다.
장안문 가는 중간에 있는 화홍문(華虹門)에서 성벽을 오르기로 했다. 화홍문은 일곱 개의 홍예수문 위에 세워진 누각 문이다. 화홍(華虹)이란 ‘아름다운 무지개’란 뜻이다. 무지개가 7색이듯 수문이 7개이다. 이는 칠성사와 성령 칠은을 상징한다.
화홍문에서 바로 동편 언덕을 보면 아름다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올려다 보인다. 일명 동북 모서리에 있다고 동북각루라고도 한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 이름에 담았다.
하늘에서 보면 지붕 꼭대기가 십자가 형태이고 천정 대들보 세 개가 십자가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서쪽에서 온다는 뜻으로 서쪽 벽에는 하얀색의 십자가 상감문양 86개가 새겨져 있다. 이는 모두 화성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의 신앙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한다. 비록 박해로 믿음을 버렸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는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이러한 모습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방화수류정에서 10여 미터 정도 내려오면 왼편으로 북암문(北暗門)이 있다. 화성의5개 암문 중 하나로 북쪽의 숨겨진 문이라는 뜻이다. 이 문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굽혀야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체통이 떨어진다 하여 다니지 않고 주로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다녔다. 그리하여 박해 당시 동북포루에서는 창문을 열어놓고 성 밖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주교인들을 참수하고 몸뚱이는 성 밖으로 버렸고 머리는 북암문에 매달았으며 목 없는 시신들은 우마차에 실려 인근 야산에 묻혔다고 한다.
방화수류정에서 넘겨보면 성밖에 다산이 설계한 인공 못 용연이 있다. 달밤의 용지, 곧 용지대월(龍池待月)은 수원 팔경 중 으뜸이다. 연못 수면 위에 떠오른 달과 방화수류정 누각의 장관이 무아경(無我境)이다. 이름 그대로 버드나무가 못 주위에 둘러져 있다.
용연에서 동편 언덕에 올려다 보이는 곳은 동북 포루이다. 동북 포루는 ㄷ자형으로 성밖으로 돌출한 치성 구조이다. 박해 때에는 성밖에 모여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동북 포루의 창문이 열리고 휘광이가 천주교인들을 참수형으로 목을 치고 몸은 성밖으로 내던졌고 목없는 천주교인 시신을 우차에 실려 가가운 동문인 청룡문 밖 야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처형자의 목을 서민과 천민이 많이 다니는 북암문에 걸어두어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하였다.
포루에서 수원천으로 내려가 내를 건너 천변길 위는 정조대왕이 행차를 했던 방화수류원길이다. 천변에는 버드나무가 양쪽에서 자라고 있다. 매향다리가 보이면 계단을 따라 천변 위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옛 토포청이 있던 수원군청터로 간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을 잡아다 갖은 고문과 교수형 백지사형 태형을 집행했던 현장이다. 이 토포청은 옛 수원성당터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제 다시 북수동 성당 순교자 현양비로 간다.
아, 죽음마저 참혹했던 순교자들이여, 그만큼 그에 큰 영광과 보상이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박해현장에 간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믿음이 조금씩이라도 단단해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해 달라고 그때의 순교자들께 전구를 청해 본다.
9시 경 수원성지를 출발했다. 내려 가다가 대구대교구의 성지 몇 군데를 볼 수도 있은데 일단 가면서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