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크라테스의 死生觀
기원전 399년 70세의
노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태연자약하게 그의 생애의 막을 내렸습다.
그는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테네의 5백명의
배심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떠날 때가 왔다.
우리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간다.
누가 더 행복할 것이냐,
오직 神(신)만이 안다.“
라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40세에서
70세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동안 아테네
시민의 精神革命(정신혁명)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아테네
사람들의 良心(양심)과
생활을 바로잡기 위하여,
驕慢(교만)과 虛榮
(허영) 속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의人格(인격)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그는
아테네 거리에 나가서
시민들과 대화하고
가르치고 질책하고
호소하고 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어리석은
민중은 그를 법정에 고소 했습니다.
그 소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정한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神(신)을 끌어들이고,
또 청년을 부패 타락시켰다.
그 죄는 마땅히 죽음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不信仰(불신앙)과
靑年(청년)의 誘惑(유혹)’이라는
두 죄명에 의해서 고소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5백명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두 차례의 투표 결과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아테네의 어리석은 市民(시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民衆(민중)은
私利私慾(사리사욕)에 휩쓸리면
한심한 우중으로 전락합니다.
인간은 群衆心理(군중심리)에
사로잡히면 IQ 80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민중은 올바른 知覺(지각)을 가지면
슬기로운 賢衆(현중)이 됩니다.
민중은 우중이 되기도 하고,
현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역사의 어두운 反動勢力(반동세력)도
되고, 역사의 밝은 改革勢力(개혁세력)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는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民衆(민중)이었습니다.
민중의 質(질)이 문제입니다.
아테네 시민의 無知(무지)와
惡意(악의)와 誤判(오판)이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를 죽였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는 것은
眞理(진리)와 正義(정의)를
죽인 것이아 다름 없지요.,
진리와 정의를 죽인 나라는 반드시
쇠망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아테네는
결국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에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처형한지 61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테네는 역사의 심판과 징벌을 받았습니다.
역사는 반드시 준엄하게 심판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역사의 이 진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테네의 사랑하는 시민들이여!,
여러분들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위력으로 명성을 자랑하면서,
될수록 돈이나 많이 모을 생각을 하고
또 이름이나 명예에만 관심이 쏠려서
지혜와 진리와 자기의 인격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존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라는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도 매국노나 배신자나 변절자나
살인범이나 패륜아나 강도나
매춘부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바로 살기를 원합니다.
바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요,
둘째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셋째로 보람 있게 사는 것이다.“
거짓되게 살고 추잡하게 살고
무의미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입니다.
’바로’라는 말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도 바로 하고
생각도 바로 하고
행동도 바로 하고
생활도 바로 해야 합니다.
정치도 바로 하고
경제도 바로 하고
교육도 바로 하고
모든 것을 바로 해야 합니다.
잘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똑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살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살지 않고는 제대로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또 외쳤습니다.
“哲學(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죽는 연습.
죽는 공부
죽는 준비
죽는 훈련을 하는 학문이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더라도 태연자약 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 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확고부동한 死生觀(사생관)을
확립하고 조용하게 죽을 수 있는
정신적 준비를 하는 것이 철학이나
宗敎(종교)의 궁극의 목표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마자 죽기 시작하며
끝은 시작에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삶을
시작 조차 못하는 사람이 많다"
라고 벤다이크가 말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은
神(신)의 영역으로서,
"神(신)인 있다면 죽는 것도
즐겁지만 신이 없다면 사는 것도 슬프다"
라고 아우렐리우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죽고져 하는 사람은 살 것이며
살고져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라는 말도,
"죽음을 회피하면 죽고
죽음을 직면하면 산다"는 말은
같은 맥락으로서 '삶과 죽음'에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죽음은 곧 삶이다"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곧 삶으로
부터 도피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죽음은 곧 새로운 復活(부활/REBIRTH)을 맞이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첫댓글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바로 사는 것이 참 어렵죠.
귀한 글을 보고 갑니다.
낭만의 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