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북일기 (赴北日記)
부북일기는 조선시대 울산에 살았던 울산 박씨 박계숙(朴繼叔, 1569〜1646)과
박취문(朴就文, 1617〜1690) 부자가 남긴 일기이다.
박계숙은 1605년에, 박취문은 1644년에 함경도로 파견되어
약 1년간 군관(軍官)으로 복무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일상생활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책은 1권으로 총 79장이며,
박계숙 일기가 24장, 박취문 일기가 55장으로 크기는 가로19cm, 세로 27cm이다.
이 일기는 조선시대 무관(武官)이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크며,
아버지와 아들의 양 대에 걸친 일기를 합친 것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숨김없이 자세하게 써 놓은 것이 매우 놀랍다.
또한 17세기 변방지역의 군사 업무의 실상과 군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데 도움을 준다.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노정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도로 교통의 실태도 알 수 있다. 현재 울산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조선 선조 38년, 1605년에 울산에 살았던 박계숙(朴繼叔, 1569〜1646)이
함경도에서 군 생활을 하며 매일의 일상을 일기로 적었고,
이를 인조 22년인 1644년에 박계숙의 아들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이
똑같이 함경도에서 1년간 군 생활을 하며 그 일상을 덧붙여 기록한 부자(父子)의 종군일기.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울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버지 박계숙과 아들 박취문이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복무하며
매일의 일상을 직접 기록한 일기로 박계숙은 1605년, 박취문은 1644년에 복무하였다.
아버지의 일기는 1605년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하여 1년간 함경도 회령부 보을하진에서 군복무 후,
1607년 1월 1일 변경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쓴 일기이고,
아들의 일기는 1644년 12월 9일 출발하여 1646년 4월 4일 돌아올 때까지 쓴 일기이다.
최변방 지역에서의 고통스러운 군복무 생활, 경제적으로 지급받았던 각종 세금, 부역 특혜와 급료,
1년에 4차례 행해질 때마다 전 부대원들을 긴장시켰던 상급부대의 순찰, 각종 활쏘기 내용,
부방길에 동침한 여러 여인들의 인적사항과 이름, 문란한 성생활을 하다 매독에 걸린 일,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각종 선물, 부대에서의 조총 제조 실태 등
당시 하급 군관들의 모든 일상 생활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1600년대 초중기 변경지방에서의 군복무와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부북일기는 울산 출신 박계숙, 박취문 부자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변방지역에 1년간 부방하였을 때를 당하여 써놓은 일기이다.
박계숙의 일기는 선조 38년(1605)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會寧 甫乙下鎭에서의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선조 40년 1월 1일까지의 일기이다.
그리고 박취문의 일기는 인조 22년(1644)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會寧府와 鏡城의 兵營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인조 24년 4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박계숙과 취문 부자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울산으로 라말여초 울산지역의 유력한 토호였던 朴允雄의 후예였다.
그 후 별 뚜렷한 현조가 없이 내려오던 그의 가문이 향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버지 弘春에 이르러서였다고 보여지는데,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언양 기장 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계숙도 아버지와 더불어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가문이 울산지역에서 유력 가문으로 발돋음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계숙(1569년(선조 2) ∼ 1646년(인조 24))이 무과에 급제한 것은
선조 27년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26세 때였고,
일당백장사에 선발되어 부방길에 오른 것은 10여년 후인 선조 38년 37세 때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宣傳官 訓練院 副正의 관직을 거쳤다.
박취문(1617년(광해군 9) ∼ 1690년(숙종 16))은 인조 22년 그의 나이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해 겨울 新出身 자격으로 부방하였다.
그후 그는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虞侯, 훈련원 부정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인동 갑산 김해 등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결국 이들 가계는 홍춘, 계숙, 취문 3대에 걸쳐 내리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무반으로서의 기반을 굳혔다고 하겠다.
부북일기의 사료적인 가치로는,
먼저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歷程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교통 실태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변경지역의 부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일기라는 점에서
변방지역의 軍務 실상과 변방에서의 출신군관들의 생활상을 잘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신들이 남긴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출신 내지 무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부북일기가 궁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기문에 있는 당시 군관들의 활쏘기 실력에 관한 기록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박취문은 하루 30순을 쏘아서 150발 모두를 맞추었다는
엄청난 궁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대부분의 군관들도 50발중 40발 이상의 명중률을 갖추고 있었다.
간추려진 부북일기를 소개해 본다-[편집자주]
다음은 부북일기의 내용들을 간추려 보았다.
선조 16년 이탕개난이후 무과에 급제한 출신들은 급제한 직후 1년간 변방에서 부방하는 것이 의무였다.
부방하는 출신군관들은 거주지 도의 병사로부터 지정된 장소에서 점고를 받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목적지 병사로부터 최종 점고를 받은 후 근무지를 배정받았다.
부방하는 출신군관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단체로 함께 이동하였는데,
군관 한 사람당 최소한 노복 1명, 타는 말 한 필, 짐 실는 말 한필이 기본이었으니,
이동할 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행로시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숙식이었다.
숙박처로는 官衙나 驛舍 등도 많이 이용되었지만 그 보다는 私家가 더 많이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급은 곳에 따라 원활하게 해결되지 않아 애로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출신군관들은 노복과 말을 거느렸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울산에서 회령까지 이동하는데 걸린 기간은 대개 70여일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근무지를 배정받은 출신군관들은 병영에서 다양한 일을 담당하였다.
정식 직책을 맡아 일정기간 지속적인 업무를 관장하기도 하였고,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업무를 담당한 경우도 있었다.
병방군관이나 공방감관 등에 임명되어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전자의 예가 되겠다.
후자의 예로는 상관을 배종하는 업무를 맡거나 또는 병영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업무를 맡아서
수행한 것 등이 해당되겠다. 그리고 때로는 상관의 명으로
대리로 과거시험을 치루는 등 부정한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출신군관에게 있어 변방에서의 부방생활은
위험 부담도 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몇가지 반대급부도 있었다.
부방한 기일은 후일 관직에 나아갔을 경우 경력에 포함되어졌으며,
얼마되지는 않았겠지만 일정한 급료도 매월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 군무를 익힐 수 있는 실습의 장이기도 했으며,
나아가 관직에 제수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같은 군관이라도 출신군관은 토착군관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출신군관들은 대개 양반들이었을 뿐아니라
정해진 일정 기간을 복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처지였다는 점에서 토착군관들과는 구별되었다.
이에 출신군관들 스스로도 토착군관과는 차별화된 존재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부류 사이에는 가끔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함경도 병영에서는 두만강이 얼어붙는 동절기가
역시 가장 조심해야 되는 비상 시기였음을 부북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상급관서의 순찰이 대개 동절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평상시에는 경성의 병영에 머물던 북병사도 동절기에는 두만강변의 행영에 전진 배치되어
적침에 대비하였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군관들은 병영에서 활쏘기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군관들에게 있어 弓射는 그 자체가 군사 훈련이었고, 체력 단련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오락이나 시합의 수단이기도 하는 등 다목적의 효용성이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군관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거나 활쏘기 시합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활쏘기 시합은 자체 내 군관들끼리 편을 갈라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인근 지역과의 원정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활은 10巡 단위로 쏘았는데,
하루에 10巡 즉 50발을 쏘는 것이 상례였으나 20순,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다.
주인공인 박계숙과 취문 부자는 모두 뛰어난 명사수였는데,
특히 취문의 실력은 신궁의 경지에 가까워 30순 즉 150발을 연속 명중시킨 때도 있었다.
대체로 볼 때 시합에 참여한 군관들의 경우 50발 중에 최소한 40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실력을 보유하였다.
활쏘기는 편을 갈라 단체로 시합을 했을지라도 결국은 개인의 기록이 드러나는 경기였기 때문에
제일 잘 쏜 사람이나 50발을 명중시킨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격려를 하였으며,
반면에 진 편의 꼴찌에게는 여러 가지 종류의 벌칙을 가해 기롱한 것이 상례였었다.
출신군관들의 변방에서의 일상생활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취문의 경우 부방길에 많은 여인들과 동침한 사실을 적기해 놓았는데,
그 대상은 대개 기생이었고, 더러는 숙박한 주인집의 家婢도 있었다.
그리고 근무지에 도착해서는 房直을 한 명씩 배정받아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방직은 대개 官妓나 私婢 중에서 충당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부가 된 私婢를 강제로 방직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妓일 경우에 房直妓라 하였고, 婢일 경우에 房婢라 표현하였다.
요컨대 방직은 군관들의 객지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선물도 비교적 자주 주고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종류는 곡물류와 반찬류가 대부분인 가운데 소금, 땔감, 술, 가죽 등도 있었다.
평상시 선물의 규모는 대구 몇 마리, 콩 한 말, 땔감 한 짐 등 정을 표시한 간단한 것이 많았다.
다만 이별시에 받은 선물은 평상시보다는 규모가 조금 크거나 별난 물건들이었다.
또 변방에서 무인들끼리의 크고 작은 잔치가 열렸을 때 흥을 돋우는 방법으로는
詩作보다는 唱歌가 많이 불려졌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급의 전별연은
약 한달전부터 환송연과 답례 형식으로 수차에 걸쳐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었다.
그 외 놀이로는 바둑과 쌍육이 주로 행하여졌다는 점,
편지 안부는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울가는 인편이 있을 때 부쳤다는 점,
석탄을 병영 차원에서 채굴하여 쌓아두고 사용하였다는 사실,
강우량을 재는 단위로 호미와 보습을 이용한 단위가 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박취문이 목적지 까지 가는데
동침한 여인들의 이름과 인적사항을 적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박계숙이 먼저 본인의 일기에서 동침한 여성에 대한 언급한다.
처음 박계숙이 여인과 관계를 맺는 문구로 이때 사용했던 말을 볼 수 있다.
“二十七日 ~(중략)~娥卽和曰 兒女 戱是夜與今春同枕 盡繾綣之意 金公頓無近色之意 是夜與愛春同好“
12월 27일
이날 밤 금춘과 함께 동침하여 못내 잊혀지지 않는 정을 다하였다.
김공은 여자를 가까이할 뜻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날 밤 애춘과 함께 동침하였다.
주로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말로 ‘近’ 혹은 동침(同枕), 동호(同好)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박취문의 1645년 2월 6일 일기에는
“저녁에 이석로와 이득영이 여색(女色)에 대패(大敗)했다. 우스운 일이다.
박이돈은 나이든 주탕 태양과 동침했다(抱).
나는 우연히 옥매향(玉梅香)을 만나 동침했다(近)”고 기록돼 있다.
자신의 경우엔 “近”, ‘同枕’등을 주로 사용하고 같이 간 일행은 ‘抱’를 사용하였다.
다음 표는 박취문이 그와 동침했던 여성들의 신분, 이름 등을 집약한 표이다.
아마 일기에 차마 적히지 못한 관계도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본 사료에서 특징적으로 봐야할 점은 박취문이 성관계를 가진 날짜와 주기, 관계를 가진 여성들의 신분이다.
그는 44년 12월 11일 좌수댁 계집 통진을 처음 안는다.
그 이후로 12월에 짧은 주기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관계를 쉬다가 2월이 돼서야 다시 활발해진다.
연 월 일 | 이름 | 신분 | 비고 |
1644 12 11 | 통진 | 婢 | 좌수댁 |
12 15 | 분이 | 婢 | 검동 |
12 16 | 춘일 | 酒湯 | 의성현 |
12 22 | 향환 | 酒湯 | |
12 26 | 예현 | 酒湯 | |
12 30 | 연향 | 妓 | 당창(성병) |
1645.1.2 | 건리개 | 妓 | |
2.5 | 예제 | 妓 | 최귀생집 |
2.6 | 옥매향 | 妓 | |
2.11 | 옥순 | 妓 | |
2.13 | 율덕 | 婢 | |
2.14 | 향춘 | 賤民 | |
2.17 | 월매 | 妓 | |
2.23 | 노종 | 婢 | |
4.10 | 매옥 | 婢 | |
6.28 | 순진 | 妓 | |
윤6.19 | 설매 | 妓 | |
8.13 | 옥이 | 妓 | |
8.14 | 격향 | 妓 | 옥매향이 사또수청 |
8.15 | 격향 | 妓 | 예제는 사또 |
10.21 | 옥매 | 妓 | |
10.23 | 애생 | 婢 | 17세, 미색 |
10.25 | 애생 | 婢 |
박취문은 12월 30일 기생 연향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1월2일 강릉부에 도착하여 관노 최억신(崔億信)의 집에서 머무는 데,
그는 강릉부의 급창(及唱, 연락병)이였다.
음식을 대접받고 유명한 기생 건리개(件里介)에 대해 전해 듣고 동침을 하기 위해 그녀의 집까지 간다.
건리개와 관계를 가지고 시를 주고받기를 기생 연향(蓮香)과 동침을 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니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다.
그 연유를 물으니 연향은 성병인 당창(唐瘡), 지금의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다.
당시엔 치료제도 없었고 유명한 주탕이라도 당창에 걸리면
손님이 끊겨 밥벌이를 못해 그 세계에서의 은퇴나 다름없었다.
아마 박취문은 그 얘기를 듣고 자신이 당창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성관계를 그만둔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2월5일이 되어 다시 관계를 맺었는데, 매독 잠복기가 평균 21일인 점을 감안하여
그 동안 그의 몸에 큰 이상이 없었기에 안심하고 다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측한다.
조선에서 당창에 걸릴 경우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다.
매독은 성교나 구강으로도 감염을 일으키고 특히 당시에 매독에 걸릴 경우 극히 위험하였다.
영조때 학자인 성대중의 잡록인 ‘청성잡기’에 의하면 매독환자의 10에 9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2월도 여성과의 관계를 많이 가진 뒤 2월말에 돼서야 그 주기가 뜸해진다.
2월 23일 이후로 4월10일 첫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박취문의 배치와 관련이 있다.
그는 2월 20일 회령(會寧)에 도착한다.
그는 회령에서 의향(義香)이라는 방직기(房直妓)가 배정된 정착생활을 한다.
방직기란 변방지역에 근무하는 군관들에게 일상생활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기생을 의미한다.
주로 숙식을 제공하고 빨래를 하는 둥 현지 첩의 역할을 했다.
박취문은 방직기와 그의 관계가 육체적 관계까지 발전했는지는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방직기 의향과 함께 사는 이후로 그의 성 관계 기록 그가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갔거나
병사를 모시고 남행하거나 북행했을떄 와 같은 특별한 때밖엔 없었다. 16세기.. 부북일기
박취문과 관계를 맺은 계급층은 주로 주탕(酒湯), 비(婢)와 기(妓), 천민(賤民)라고 적혀있다.
이런 하층여성과의 성 관계는 계급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다.
첫댓글 부북일기? 처음 듣는 일기입니다.
제가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왜 들어보지 못했을까요
그것도 부자가 연이어 쓴 아주 귀한 일기 같은 데요.
잘 읽고 갑니다.
아 국문학을 전공하셨군요
어쩐지 낭만선배님 글이 다르다 했습니다
부북일기 아주 유명한데요
변방의 군영에서 일어나던 일에 대한 기록
평소에 활쏘기를 단련하는 모습
조선시대 양반 들의 성에 대해 얘기할 때
꼭 인용되는 일기입니다
기생, 노비, 민가의 여인 들까지
모두 양반 들이 마음대로 품을 수 있었던
노비제 사회였던 조선
댓글 감사합니다
그당시 장교 복무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사병들 복무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