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비는 언제나 그치려 나 ... 청초 이용분
이름만 장마지 오는 듯 마는 듯 어제는 천둥치고 번개 쳐서 사람 마음을 서늘하게 하였다. 오늘은 구름이 끼고 시원하여 복중이라 하지만 제법 지낼 만 하다. 올 장마는 이제 끝이 난것일까. 한낮에는 매미소리가 지루하게 늘어지고 밤이 되면 풀숲에선 한 철을 앞서가는 귀뚜라미 소리가 영롱하게 울린다.
몇년 전의 장마는 어땠을까 하고 뒤져보니 장마의 진수를 보이는 글이 보이기에 마음에 동하여 옮겨 보았다. 마당이 있는 옛집 풍취도 그립고... 이름도 예쁜 (태풍 민들레)가 처음의 거센 위세와는 달리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날이 개이는듯 하더니 다시 7월 제철 장마로 접어들어 섰다.
오늘은 또 다시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가 오니 산지사방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대로 집안에 있다는 아늑함과 비가 오는 정경을 보는 운치도 제법 괜찮다. 비 오는 소리도 오는 위세에 따라서 高低 장단이 모두 다르다.
아기 잠 재우듯 솔솔 내리는 실비에서 부터 젊은이의 정열을 달구듯 마구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우리의 감성도 민감하게 작용을 한다.오늘 내리는 비는 주룩주룩 지루하게 장맛비조(條)로 하루 종일 내릴 모양이다.
지은 지 삼십여년 쯤 오래 된 기와집이니 어디 비가 새는 데는 없나하고 신경도 쓰인다. 마당은 흥건히 쏟아진 빗물에 고여 있다. 빗물 때문에 숨을 못 쉬게 된 작은 미꾸라지만 하게 굵은 지렁이들이 여기 저기 나와서 슬슬 기어 다니고 있다. 이들 지렁이의 배설물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뿐더러 토양의 오염도 측정기준치가 된다고 한다.
정원의 나무들은 비를 맞아 그 잎 끝에서 빗물을 뚝뚝 흘리면서 마치 어른에게 크게 혼이 나는 아이들 모양 모두들 머리를 떨구고 후줄근하게 서 있다. 꽃이 모두 진 뒤 콩알만 하게 열린 찔레꽃 열매, 마당 한쪽 구석에서 정열의 새빨간 색으로 해마다 잊지 않고 피는 해 묶은 접시꽃. 조그맣고 앙증맞은 하얀 꽃송이들이 오밀조밀 붙어 조의 이삭처럼 핀 까치수염 꽃. 장맛비 속에 뒤 늦게 한 두 송이 피어난 가녀린 초롱꽃이 애처롭다.
정원 산책 길 갓길에 밖아 놓은 둥그렇고 누런 늙은 호박색과 비슷한 색깔의 돌멩이 옆에 돋아난 고사리 잎처럼 생긴 식물. 비를 맞아 이리 비실 저리 비실하는 다른 풀들 속에서 유난히 빳빳하고 씩씩하여 그 모양새가 제일 산뜻하게 더욱 돋보인다.
어제 낮 잠깐 햇볕이 반짝 드니 제 시절을 만난 듯 재잘대던 참새들도 비가 오니 오늘은 꼼짝도 않고 모두들 조용하다. 공해 때문에 소독을 자주 못하니 나뭇잎에 송충이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여기저기 극성이다. 정원에 새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이 벌레로 잔치를 벌이며 그리들 즐겁게 우지 지는 모양이다.
부푼 기대를 가지고 지난봄에 여기저기 심어 본 호박들이 심긴 자리에 따라 커가는 양상이 제가끔 모두 다르다. 무슨 생물이든 햇볕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잎이 나기 전 햇볕이 잘 들던 자리인 감나무 아래에 심은 호박들은 감나무 잎이 무성해 지자 한줄기의 햇볕도 스며들지 않으니 시들시들 명만 겨우 붙어있다.
그런대로 호박잎이 제일 무성한 곳은 대추나무 아래다. 이 나무도 이사 와서 처음 심어 젊었을 때에는 어른 엄지 첫마디 크기 보다 더 굵고 달콤한 대추가 조롱조롱 열렸었다. 보기에도 풍성하고 가을이면 불긋불긋한 대추를 한말 정도 수확을 하여서 제법 대추나무 심은 재미를 주던 나무다. 해묵어서 나이가 드니 열매는 안 맺고 잎도 성글어 져서 늙은 나무 등걸만 엉성하니 남아 서서 있다.
이 나무에 " 대추 열매 대신 호박이나 열어라" 하고 넝쿨을 올릴 참인데 호박이 몇 개나 열리려는지 자못 궁금하다. 장마 비는 언제나 그치려나... 남의 심중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직도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