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령성 신빈현의 왕청문(旺淸門). 우리의 면소재지에 해당하는 작은 진(鎭)에 불과하지만 한때 이곳은 ‘한국 독립운동의 수도(首都)’였다. 1920년대 말 만주의 독립군 통합정부인 ‘국민부’가 있었고, 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의 본부가 자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조선족들은 왕청문에 갈 때는 으레 “서울에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찾아간 왕청문은 한갓 퇴락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족촌에는 군데군데 빈집이 눈에 띄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조선족학교’는 이미 폐교가 되었다.
황량한 교정 한쪽에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독립운동가 양세봉(梁世奉:1896~1934)의 흉상. 대리석을 깎아 만든 높이 5.4m의 거대한 조각이었다. ‘抗日名將 梁瑞鳳’(항일명장 양서봉:‘서봉’은 세봉의 다른 이름)이라 쓰인 글씨도 선명했다. 1995년 왕청문 인민정부는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기 위해 석상을 건립했다.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위해 거대한 기념물을 세운 일은 이례적이다. 왜 중국은 양세봉을 떠받드는가.
- 中서도 기념석상 떠받들어 -
양세봉은 평북 철산 출신이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살길을 찾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그가 정착한 곳은 중국 봉천성 흥경현. 지금의 요령성 신빈현이다.
3·1운동 이후 만주 일대는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단체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양세봉도 1920년께부터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3년 양세봉은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대장으로 활발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다. 1929년 신빈에서 무장항일단체인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제1중대장을 맡았으며, 1931년에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남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이끈다. 고구려연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1929~1934년 5년간 일본군 및 만주국 군경과 벌인 전투는 80여차례, 저격한 일본군은 1,0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한다.
일제는 1931년 9·18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세우고 항일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단체들은 대부분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다. 민족주의 계열도 상해 등 중국 관내로 건너가 만주 독립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군만이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다.
양세봉이 500여명에 달하는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남만주의 항일영웅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그의 결단성 있는 성품과 부하들에 대한 자상한 보살핌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양세봉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싸웠던 계기화(2002년 82세로 작고)는 수기에서 “아무리 성난 일을 저질러도 부하에게 욕하는 일이 없었으며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면서 양세봉을 “군신”(軍神)이라고 회고했다.
- ‘소작농 장군’ 德將·勇將 명성 -
이처럼 양세봉 장군이 조선족과 한족들의 신망을 받자 일제는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1934년 음력 8월, 일제는 밀정 박창해를 내세워 ‘중국 마적단이 조선혁명군과 연합할 뜻이 있으니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양세봉을 유인, 신빈현 소황구에서 저격·살해했다. 그의 나이 만 38세였다.
신빈에서 만난 조선족 역사연구가 김순화씨(76)는 “양세봉이 총에 맞은 날은 추석을 나흘 앞둔 때로 호위 대원들이 조선족 김창준의 집으로 모시고 갔는데, 상처가 심해 다음날 숨졌다”고 말했다. ‘압록강변의 항일명장 양세봉’을 출간한 중국인 조문기(曹文奇·57·신빈현 거주)씨는 “민간에서는 양장군의 죽음을 두고 ‘별이 떨어졌다’며 애도했다”고 말했다.
1930년대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주둔지인 신빈을 비롯, 통화·유하·관전·환인·무송·청원·임강 등 남만주 일대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군신’ 양세봉은 남만주 동포들에게는 ‘소작농 장군’으로 떠받들여졌다. 조씨는 “지금도 신빈지역에는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민요가 전한다”고 말했다. 김순화씨는 폐교되기 전까지만 해도 왕청문의 조선족 학생들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양세봉장군의 노래’를 불렀다면서 직접 들려주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양세봉처럼 항일부대를 조직해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10년 가까이 무장투쟁을 벌인 인물은 흔치 않다. 1962년 양세봉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조문기씨는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 들고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