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새 」와 금이 간 옹기그릇
「가시나무새 Thornbird -콜린 맥컬로우 지음」- 아일랜드 캘트족 전설에 나오는 이 새는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울지 않는다고 한다. 둥지를 떠나면서부터 죽음을 찾아 방황하다가 끝내 가시나무의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을 찔려 죽으며 처절한 절규(絶叫)의 임종을 맡는다.
갈망(渴望)과 목적과 과정을 의문으로 넘겨주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너무나 부피가 컷던 소설로 기억된다.
그 중에 「랄프」신부(神父)는 유부녀인 「메기」와 불가항력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의 애정을 나눈다. 서원(誓願)을 배신했다는 모멸감이나 책망에 앞서 한계상황의 유일한 탈출의 광명으로 돌리고 싶다. 끝내 랄푸가 후견인인 콘티니 추기경(Archbishop Contini)에게 고뇌와 참회를 고백하자 추기경이 들려준 말의 요점을 든다면
「이제 겨우 사목(司牧)으로서의 재목이 되었다. 전에는 자신의 완벽과 고고(孤高)를 내세우는 탓으로 모가 나고 내려다보는 목자(牧者)였지만 이제는 같이 고민하고 아파할 수 있는 원만한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사울」- 바리사이파이며 로마시민권을 갖은 - 에서 「바울로」로 변신해서야 그 진가를 발휘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인간의 안목과 하느님의 잣대와는 차이가 있어 우리가 사회적인 지위와 품격에서 고매(高邁) 하다고 우러러 보는 인사들이 하느님이 쓰시려는 재목(材木)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특히 인간이 소유하고자 하는 지식-혈통-품계-재산이 자칫 「가시나무 새」의 「가시」가 되어 하느님을 저바리는 길잡이로 변화될 수도 있다.
「
금이 간 옹기」 그릇은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기에 그릇으로의 「쓸모」를 잃었다. 그러나 금이 갔기에 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빈곳을 채울 수가 있다. 외면적으로 부러움을 받는 또는 그것을 위세(威勢)하는 인간-「그릇」에는 다른 것 - 사랑, 고뇌, 명상(瞑想) - 스며들어갈 틈-「자기 반성 -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
그들은 이미 자기 그릇 -「소유」에 만족하여 다른 것을 흡수할 필요가 없고 자족(自足)-자만(自慢)의 「자기 그릇」으로서의 쓸모밖에는 여분이 없다.
일본의 진시황(秦始皇) - 오닌(應仁) 이후의 전란을 잠재운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별종의 망난이었다. 부친인 노부히데(信秀)의 장례식장에 뒤늦게 나타난 것은 고사하고 그 복장이라는 것이 상투 끈은 새빨간 천으로 아무렇게나 둘둘 감아 올리고 허리에는 씨름판에서 바로 왔는지 짚으로 만든 동아줄을 둘둘 감고서 분향은 고사하고 엿먹으라는 듯이 위패(位牌)를 향하여 향을 한 웅큼 쥐더니 훽 뿌리고는 성큼 성큼 나가는 것이었다.
만좌(滿座)가 경악하여 패륜(悖倫)의 노부나가를 몰아내려 음모를 꾸미는데 중신의 으뜸인 히라떼 (平手)는 오다 집안의 최고 장로인 다이운 스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노부나가는 모든 일에 무애(無涯)의 법계(法界)로 이미 한 발을 걸치고 계시오. 아버지의 위패에 향을 던진 그 기백(氣魄), 그 기백이야말로 일체를 인정하기 때문에 일체를 파괴도 하는 큰 용기의 첫 문인 것이요.」 하면서 얄팍한 범인(凡人)들의 잣대로 소란을 피우는 신하들을 질책하였다.
「수호전 (水滸傳)」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으니 제할(提轄) 노달(魯達)은 살인죄를 짓고 일자 무식에 조악(粗惡)한 성품으로 모두들 고개를 외로 꼬는데 오직 지진장로만이
「- 비록 지금은 흉완하여 명분(命分)이 박잡하지만 오랜 뒤에는 도리어 청정(淸淨)함을 얻어서 증과(證果)가 비범하리라. …」
인간의 변화와 훗날의 증험을 눈앞의 「금 crack」으로 쉽사리 판단치 말라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