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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 15 영생 - 요 3: 16 이처럼 사랑하사
요 3: 15 영생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 절은 구원론(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1]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본 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2]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 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 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
* 요 14: 3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아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고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 천국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둘째,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속죄의 복음 말씀으로 죄 씻음을 받음으로 거듭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에게 대속의 의(義)를 적용하셔서 새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셋째, 사람이 거듭난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3: 14-15).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며(요일 5: 1) 참 믿음은 참 회개를 동반한다고 말했다.
* 요일 3: 9-10 –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된 거듭난 자인지 스스로 되새겨 보자.
3. 믿음으로 얻은 영생 ( 3: 16 – 21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요 3: 16 이처럼 사랑하사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 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내어줌의 형식(giving a formular)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인데 목적어를 내어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내어주셨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어줌의 형식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내어줌의 형식의 대표적인 구절은 요 3: 16절이다. 또 롬 8: 32 갈 2: 20 요일 4장에도 나온다. 나올 때마다의 강조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사랑의 증거로 그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반역한 이 세상 자기의 피조물이나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역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심오하다. 세상을 찾아보고 종합해 보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로 사탄의 권세 아래 암흑에 속해 있고 거짓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세상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택하신 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 9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섰다”라고 증언하였다.
2] 독생자를 주셨으니,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아들을 내어줌이다. 그의 아들을 내어줌은 그리스도 사건 전체이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의 절정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요한일서 4장 8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나타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 되었다.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다.
* 요일 4: 8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요 3: 16, 36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요 5: 20, 23 –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 요 8: 36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 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 2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주셨음을 뜻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부른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의 영과 육체를 취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주셨다’는 말은 또 아버지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셨다(마 20: 28). 그의 죽음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였다.
3]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자다.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분으로서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냄이다.
그 사건이 수난인데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 됨의 본질을 나타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영광 받음 사건이다.
놋뱀 사건이 위를 쳐다봄으로 세상의 가치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위에 계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육의 세상에서 자기들의 구원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행복의 조건을 찾으려 하고 돈 지식 명예 등을 추구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
들림을 받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들림받은 사건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함을 계시함으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영생은 신적인 삶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 시대의 삶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삶이다.
시간적인 이원론으로 표시했을 때 이 세대의 삶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구원 세대의 삶이다. 헬라적인 공관적인 이원론으로 한다면 이 세대의 삶은 물질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의 삶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 세대의 삶은 육신적인 제한된 자원으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이 세대의 삶은 결핍 가난한 삶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우리가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 병의 증상들이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다.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
4]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감기가 걸리면 증상을 나타내듯이 영생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 질들로 만들어진 삶 신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고난 결핍이 없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삶은 이 세대의 삶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질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
* 막 3: 6 -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 고전 1: 19 -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 사용되었다.
* 요이 1: 8 -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할 처지에 있었다. 죄인들의 마지막 상태는 지옥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 롬 3: 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 사 64: 6 -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 21-22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 8-9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내가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만세 전의 선택과 이끄심이 없이는 내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는 요한복음 6: 44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0: 26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증거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했다.(롬 5: 8),
사도 요한도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말하였다. (요일 4: 9-10).
5] 하나님의 사랑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 구절로 나타낸 곳이 있다면 그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사실인즉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본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를 측량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이 가장 간략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곳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 16). 이 말씀을 빌린다면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이다.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②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 준다.
* 요일 4: 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처럼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주셨다고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을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롬 5: 8).
(2)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연한 사랑이 아니다.
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이전부터였다.
이 같은 사랑의 근거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창조의 중심으로 하여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과 조건들을 구비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언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하였다(롬 1: 20).
②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이루고 등을 지고 있는 것인가? 이 책임은 절대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신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하셨다. (사 59: 1-2)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이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그 마음에서 내어쫓을 뿐 아니라 두기조차 싫어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원수로 여겨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인간들이 받을 보응은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고 하셨다.
③ '사랑하사'란 말은 ‘에가페센’란 말로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이처럼’이란 말은 ‘후토스’로 '다음과 같이'라는 뜻이다. 말로만 나타내신 사랑이 아니라 이처럼 어떤 실제적인 증거를 보이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보이신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으로 증거되었다. 인간이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려면 그 죗값을 대신 갚을 희생제물이 있어야 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인들을 위해 죗값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였다. 누가 이 같은 희생제물이 될 수 있겠는가?
죄인을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어떤 피조물에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할 존재가 있겠는가? 이 같은 사랑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 놀라우신 일을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내 대신 십자가에서 나의 죗값을 치루게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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