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실존 인물인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인가
도둑 홍길동과 혁명가 홍길동의 질실
왕이 된 의적
홍길동은 IMT2000 하고 같은 종씨 ㅎㅎㅎㅎㅎ.......
홍길동은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얼마 전 서울 방송에서 홍길동을 극화하면서 홍길동의 여려 모형을 만들어 판매하려 하자 홍길동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전남의 한 군에서 항의 방문해 중단한 경우가 있었을 정도로 홍길동은 인기 인물이다 그러나 홍길동의 실존 인물인가를 물어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연 홍길동은 실존 인물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서자 출신의 홍길동의 활빈당 두목이다 허균은 하필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되었다는 세종 때를 무대로 홍길동전을 그려내는데 허균은 홍길동을 홍 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으로 설정하였다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인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천출의 한을 지니고 있다. 그의 비범한 재주가 화근이 될 것을 염려한 이복 식구들은 자객을 시켜 그를 없애려고 하지만 그는 신통력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집을 떠나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 우두머리가 된 홍길동은 기묘한 계락과 도술로써 지방 수령들의 불의한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되 백성들의 재산은 절 때 손대지 않았다. 그 뒤 홍길동은 이상국인 율도국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현재 우리에게 형성된 홍길동의 이미지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제시한 이미지와 동일한 것이다. 즉 홍길동은 의적의 이미지를 지닌 영웅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실록에 그려진 홍길동을 살펴보자 2000과 함께
그러나 실록에 보인 홍길동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역사상에 실재하는 홍길동은 연산군 때의 대표적인 화적 두목이었다.
(연산군 일기)에 의하면 연산군6년 10월에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한이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려 해독을 제거하는 데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록상의 기록은 홍길동을 강도 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길동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의금부의 위관 한치형은 홍길동에 대해 이렇게 보고한다.
강도 홍길동은 옥정자(玉頂子:관)와 홍대(紅帶:허리띠)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그는 밤에 몰래 활동하던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정3품 무관직 첨지행세를 하던 간 큰 강도였던 것이다 홍길동은 또 동래 현령을 지낸 상당관 엄귀손을 매수해 정도유착 현상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하다.
당시 연산군은 엄귀손은 비단 홍길동의 와주일 뿐 아니라 바로 같은 무리이다. 이 같은 행동이 있는데도 어떻게 벼슬이 당상에까지 올라갈 것인가 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쫓겨난 후 중종실록 에는 영사 장순손이 홍길동을 추국했던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다. 홍길동의 무리들은 신이 찰리사로 가서 추국 했는데 홍길동이란 자가 당상의 의장을 했기 때문에 수령도 그를 존대하여 그의 세력이 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이란 자를 조옥에서 추국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종실록 8년 8월 29일의 가사에 따르면 호조에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을 회복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라는 보고를 하고 있는데 이는 홍길동이 체포된 지1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충청도 일대에 끼친 홍길동 무리의 영향은 대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연산군 때 활약했던 도둑 홍길동과 허균 소설 속의 홍길동은 같은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허균 소설의 홍길동은 실록에서는 홍길동(洪吉童) 또는 홍길동(洪吉同) 이라고 그려 아이동 (童)자와 같은 동(同)자를 혼재하고 있는데 이는 홍길동이 정확한 한자 이름을 갖지 못한 천출 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선조와 광해군 대 활약했던 허균은 약100여 년 전인 연산군 때의 홍길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그가 생존했던 선조 21년에도 홍길동의 이름은 실록에 등장한다.
선왕조에서는 정승을 잘 가려 뽑아 풍속이 순미 하므로 강상의 변이 없고 다만 홍길동 이연수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에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정승을 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 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이러 나므로 홍길동 이연수의 이름을 욕하는 지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홍길동은 그리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라 욕으로 사용되었던 저간의 사정을 말해 준다 이름이 욕으로 사용된 홍길동과 의적 홍길동 많은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 괴리는 그가 의적으로 알려지게 된 활빈당과의 관계에서 메워 보아야 할 것이다. 홍길동의 활빈당의 두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는 의적의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며 혼전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홍길동이 활빈당의 두목이었다는 자료가 전혀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은 조선 후기에도 여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실학자 이익 1681-1763의 평도 있다. 옛부터 서도 (황해도)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 중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찌되었는지 잘 모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에 이름은 장사꾼들이 맹세하는 구호에도 들어있다.
연산군 때의 홍길동은 100여 년 후인 선조 때에는 욕으로 통용되다가 그후 약 150년이 흐른 영조 때에는 장사꾼들이 맹세하는 구호로 그 이미지가 변화하였다. 즉 조선 전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홍길동은 중기를 지나 후기로 이르면서 욕에서 맹세의 대상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걸쳐 장사꾼의 맹세의 대상이 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활빈당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도둑 홍길동을 의적으로 각색한 사람들
그러나 그가 욕의 대상에서 맹세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들어 파탄에 달한 농민 경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패한 정치에 좌절한 백성들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강도 홍길동을 부패한 관료나 부호들을 처벌하고 그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홍길동으로 변화시켜 대리 만족을 얻은 것이다. 강도 홍길동이 메시아 홍길동으로 부활한 셈인데 그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부패한 정치 구조가 있었다. 농민들의 홍길동을 지신들의 한을 대신 풀어줄 영웅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의 전환 과정에 허균의 홍길동전 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소설 속의 홍길동은 조선 후기 백성들이 영웅으로 삼을 만한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천출 소생이란은 신분도 그렇거니와 손오공처럼 자신의 분신을 조작하여 탈출하거나 하늘을 나는 신통력을 점도 그렇다. 그리고 고통에 찌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사회 율도국도 농민들을 매료시킬만한 소재였다. 허균이 활동하였던 시대에는 서얼 차별은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선조 초기에 서얼1600명이 집단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국왕에게 호소한 사건은 당시 서얼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후 조선은 쌓인 서얼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 적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기도 했지만 그 길이 너무 좁아서 여러 사람이 혜택을 입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벌어진 서얼 출신 송유진과 이몽학의 봉기는 적서차별의 한이 얼마나 뼛속 깊은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광해군 5년 (1613) 에도 서양갑 등7명의 서얼이 여주 강변에 모여 군신부자의 의리를 끊는다는 의미로 자신들을 무륜 이라 부르고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도모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은 바로 이들과 어울린 인물이었다. 허균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튈 듯하자 당시집권당인 북인에게 아부해 목습을 부지하기도 했었다.
서양갑 같은 서자들이 홍길동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허균과 동시에 학자인 이식의 문집 (택상집)에서도 알 수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수호전)의 작가는 3대 동안 농아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았다. 도적들이 그것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허균과 박엽등이 수호전을 즐겨 그 적장들의 이름을 따서 서로 별명을 지으며 서로 농을 했는데 허균은 또한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견주었다. 그의 무리 서양갑 심우영 등은 직접 그 행동을 실천한다가 한 마을이 재가되었고 허균 역시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다.
허균은 농민이 그린 홍길동과 자신의 추종자이기도 한 서얼의 한을 풀어줄 상징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홍길동전을 쓴 혁명적 사상가였다. 이후 홍길동은 농민들의 영웅으로 변화하면서 민중들에 의해 개작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이후에 지어진 다른 홍길동전에는 홍길동이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도 장길산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겨 보겠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대 출신 도둑 장길산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 후기 숙종 때였다. 연산군 때의 신존 인물인 홍길동과는 무려 200여 년 그리고 허균의 홍길동전이 쓰여진 때부터는 거의 100여 년 후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또한 홍길동이 고국을 떠나면서 왕을 차자가 식량을 빌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왕은 대동당상을 불러 홍길동에게 대동미를 내어주는데 대동법은 허균 당시에는 경기도 일부 지역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제도로서 100여 년 후인 숙종 때에 와서야 전국에 확대 실시된 제도이다
이처럼 홍길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개작되는데 이런 개작의 주제는 한 명이 아니라 조선 후기 백성들의 민심 그 가체일 것이다. 숙종실록에 극적으로 등장한 장길산이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인물로 변화하는 것은 조선 왕조가 망하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바람이 낳은 극적 전환이다. 조선후기 도적들의 활동이 민간정승을 통해 영웅적인 이야기로 꾸며지고 그것이 소설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장길산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홍길동전에 삽입된 것이다.
홍길동의 연산군 당시에 활약했던 간 큰 강도였는데 오랜 기간 이미지 변화 과정을 거쳐 의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 변화 과정에는 도탄에 빠진 조선 후기 백성들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실린 것이다
즉 강도 홍길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의적이라 활빈당의 우두머리로 이미지가 변화하는데 여기에는 허균 홍길동전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담겨있는 것이다.
도둑 홍길동과 혁명가 홍길동의 질실
왕이 된 의적
홍길동은 IMT2000 하고 같은 종씨 ㅎㅎㅎㅎㅎ.......
홍길동은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얼마 전 서울 방송에서 홍길동을 극화하면서 홍길동의 여려 모형을 만들어 판매하려 하자 홍길동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전남의 한 군에서 항의 방문해 중단한 경우가 있었을 정도로 홍길동은 인기 인물이다 그러나 홍길동의 실존 인물인가를 물어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연 홍길동은 실존 인물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서자 출신의 홍길동의 활빈당 두목이다 허균은 하필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되었다는 세종 때를 무대로 홍길동전을 그려내는데 허균은 홍길동을 홍 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으로 설정하였다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인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천출의 한을 지니고 있다. 그의 비범한 재주가 화근이 될 것을 염려한 이복 식구들은 자객을 시켜 그를 없애려고 하지만 그는 신통력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집을 떠나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 우두머리가 된 홍길동은 기묘한 계락과 도술로써 지방 수령들의 불의한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되 백성들의 재산은 절 때 손대지 않았다. 그 뒤 홍길동은 이상국인 율도국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현재 우리에게 형성된 홍길동의 이미지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제시한 이미지와 동일한 것이다. 즉 홍길동은 의적의 이미지를 지닌 영웅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실록에 그려진 홍길동을 살펴보자 2000과 함께
그러나 실록에 보인 홍길동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역사상에 실재하는 홍길동은 연산군 때의 대표적인 화적 두목이었다.
(연산군 일기)에 의하면 연산군6년 10월에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한이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려 해독을 제거하는 데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록상의 기록은 홍길동을 강도 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길동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의금부의 위관 한치형은 홍길동에 대해 이렇게 보고한다.
강도 홍길동은 옥정자(玉頂子:관)와 홍대(紅帶:허리띠)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그는 밤에 몰래 활동하던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정3품 무관직 첨지행세를 하던 간 큰 강도였던 것이다 홍길동은 또 동래 현령을 지낸 상당관 엄귀손을 매수해 정도유착 현상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하다.
당시 연산군은 엄귀손은 비단 홍길동의 와주일 뿐 아니라 바로 같은 무리이다. 이 같은 행동이 있는데도 어떻게 벼슬이 당상에까지 올라갈 것인가 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쫓겨난 후 중종실록 에는 영사 장순손이 홍길동을 추국했던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다. 홍길동의 무리들은 신이 찰리사로 가서 추국 했는데 홍길동이란 자가 당상의 의장을 했기 때문에 수령도 그를 존대하여 그의 세력이 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이란 자를 조옥에서 추국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종실록 8년 8월 29일의 가사에 따르면 호조에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을 회복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라는 보고를 하고 있는데 이는 홍길동이 체포된 지1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충청도 일대에 끼친 홍길동 무리의 영향은 대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연산군 때 활약했던 도둑 홍길동과 허균 소설 속의 홍길동은 같은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허균 소설의 홍길동은 실록에서는 홍길동(洪吉童) 또는 홍길동(洪吉同) 이라고 그려 아이동 (童)자와 같은 동(同)자를 혼재하고 있는데 이는 홍길동이 정확한 한자 이름을 갖지 못한 천출 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선조와 광해군 대 활약했던 허균은 약100여 년 전인 연산군 때의 홍길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그가 생존했던 선조 21년에도 홍길동의 이름은 실록에 등장한다.
선왕조에서는 정승을 잘 가려 뽑아 풍속이 순미 하므로 강상의 변이 없고 다만 홍길동 이연수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에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정승을 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 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이러 나므로 홍길동 이연수의 이름을 욕하는 지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홍길동은 그리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라 욕으로 사용되었던 저간의 사정을 말해 준다 이름이 욕으로 사용된 홍길동과 의적 홍길동 많은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 괴리는 그가 의적으로 알려지게 된 활빈당과의 관계에서 메워 보아야 할 것이다. 홍길동의 활빈당의 두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는 의적의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며 혼전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홍길동이 활빈당의 두목이었다는 자료가 전혀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은 조선 후기에도 여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실학자 이익 1681-1763의 평도 있다. 옛부터 서도 (황해도)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 중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찌되었는지 잘 모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에 이름은 장사꾼들이 맹세하는 구호에도 들어있다.
연산군 때의 홍길동은 100여 년 후인 선조 때에는 욕으로 통용되다가 그후 약 150년이 흐른 영조 때에는 장사꾼들이 맹세하는 구호로 그 이미지가 변화하였다. 즉 조선 전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홍길동은 중기를 지나 후기로 이르면서 욕에서 맹세의 대상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걸쳐 장사꾼의 맹세의 대상이 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활빈당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도둑 홍길동을 의적으로 각색한 사람들
그러나 그가 욕의 대상에서 맹세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들어 파탄에 달한 농민 경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패한 정치에 좌절한 백성들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강도 홍길동을 부패한 관료나 부호들을 처벌하고 그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홍길동으로 변화시켜 대리 만족을 얻은 것이다. 강도 홍길동이 메시아 홍길동으로 부활한 셈인데 그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부패한 정치 구조가 있었다. 농민들의 홍길동을 지신들의 한을 대신 풀어줄 영웅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의 전환 과정에 허균의 홍길동전 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소설 속의 홍길동은 조선 후기 백성들이 영웅으로 삼을 만한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천출 소생이란은 신분도 그렇거니와 손오공처럼 자신의 분신을 조작하여 탈출하거나 하늘을 나는 신통력을 점도 그렇다. 그리고 고통에 찌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사회 율도국도 농민들을 매료시킬만한 소재였다. 허균이 활동하였던 시대에는 서얼 차별은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선조 초기에 서얼1600명이 집단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국왕에게 호소한 사건은 당시 서얼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후 조선은 쌓인 서얼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 적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기도 했지만 그 길이 너무 좁아서 여러 사람이 혜택을 입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벌어진 서얼 출신 송유진과 이몽학의 봉기는 적서차별의 한이 얼마나 뼛속 깊은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광해군 5년 (1613) 에도 서양갑 등7명의 서얼이 여주 강변에 모여 군신부자의 의리를 끊는다는 의미로 자신들을 무륜 이라 부르고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도모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은 바로 이들과 어울린 인물이었다. 허균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튈 듯하자 당시집권당인 북인에게 아부해 목습을 부지하기도 했었다.
서양갑 같은 서자들이 홍길동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허균과 동시에 학자인 이식의 문집 (택상집)에서도 알 수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수호전)의 작가는 3대 동안 농아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았다. 도적들이 그것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허균과 박엽등이 수호전을 즐겨 그 적장들의 이름을 따서 서로 별명을 지으며 서로 농을 했는데 허균은 또한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견주었다. 그의 무리 서양갑 심우영 등은 직접 그 행동을 실천한다가 한 마을이 재가되었고 허균 역시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다.
허균은 농민이 그린 홍길동과 자신의 추종자이기도 한 서얼의 한을 풀어줄 상징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홍길동전을 쓴 혁명적 사상가였다. 이후 홍길동은 농민들의 영웅으로 변화하면서 민중들에 의해 개작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이후에 지어진 다른 홍길동전에는 홍길동이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도 장길산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겨 보겠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대 출신 도둑 장길산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 후기 숙종 때였다. 연산군 때의 신존 인물인 홍길동과는 무려 200여 년 그리고 허균의 홍길동전이 쓰여진 때부터는 거의 100여 년 후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또한 홍길동이 고국을 떠나면서 왕을 차자가 식량을 빌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왕은 대동당상을 불러 홍길동에게 대동미를 내어주는데 대동법은 허균 당시에는 경기도 일부 지역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제도로서 100여 년 후인 숙종 때에 와서야 전국에 확대 실시된 제도이다
이처럼 홍길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개작되는데 이런 개작의 주제는 한 명이 아니라 조선 후기 백성들의 민심 그 가체일 것이다. 숙종실록에 극적으로 등장한 장길산이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인물로 변화하는 것은 조선 왕조가 망하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바람이 낳은 극적 전환이다. 조선후기 도적들의 활동이 민간정승을 통해 영웅적인 이야기로 꾸며지고 그것이 소설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장길산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홍길동전에 삽입된 것이다.
홍길동의 연산군 당시에 활약했던 간 큰 강도였는데 오랜 기간 이미지 변화 과정을 거쳐 의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 변화 과정에는 도탄에 빠진 조선 후기 백성들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실린 것이다
즉 강도 홍길동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의적이라 활빈당의 우두머리로 이미지가 변화하는데 여기에는 허균 홍길동전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담겨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