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라고 증거된 아래와 같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에베소 땅에 일으키시고 보이시며 경험케 하신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역사들에 있어서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믿기 힘들고, 말이 보통 안 되어 보이는 것이 아니며, 심히 황당하기까지 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세계, 복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시간과 공간들, 상황과 형편들, 이성과 상식들, 제한과 한계들 등을 초월함과 함께 하나님께는 결코 불가능일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으로 그러한 이적들이 나타났고, 또한 아래 본문 뒤에 이어지는 부분들을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생생하고 강렬했든지 사람들이 그 자신이 잘 믿고 있어서 라기 보다는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시험 삼아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하곤 하는 정도였던 것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세계, 복음과 가장 멀리 있어 보이는 마술사들까지 전적으로 변화되어 각성하고 자복하며 돌이킴과 함께 은 오만이나 되는 마술 책들을 불태울 정도까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권능들, 실제와 경험들이 그 정도로, 그렇게 까지나 충만하고 강렬했다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그와 같은 모든 역사들마다 단 하나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과 풍성하심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본질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성령님께서야 말로 단적으로 말해 말씀의 영이신 분으로 실상 조금만 통찰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인생들이 접할 수 있게 하신 직접적, 실질적인 힘과 권능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진정 그러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깨달으며 믿고 행하며 누리고 경험하며 전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시는 현실적, 경험적인 힘과 실제이신 분 또한 아니실 수 없는 것이기에..
게다가 근원적, 전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며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단순하게 말하라면 당시 그 에베소 땅이 어느 정도의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치열하고 절실하며 뜨거운 말씀의 열정이었는지를 내포하고 방증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열정에 있어서의 근거 및 통로는 다름 아닌 아래 본문 바로 직전에 소개되고 잘 증거되어 있는 것이듯이 사도 바울을 통한 매일 매일 2년간의 두란노 서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이 시대 우리들에 있어서도, 참으로 우리의 영혼과 심령과 육신, 가정, 학교, 일터, 특히 교회 공동체와 교계, 또한 지역과 모든 영역과 나라, 더 나아가 각 나라와 열방과 세대에 있어서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실제들, 실체와 누림들 또한 다름 아니라 직접적, 현실적으로는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권능의 실제와 경험들, 생생함과 강렬함들로,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과 풍성하심들로 가능한 것으로..
그 있는 자리에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어느 정도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와, 좀 더 넓게는 말씀과 기도와 찬미와 경배와 경건 등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와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와 같은 모든 부흥의 일들에 있어서 생각 이상의 전제와 기준, 관건과 방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되는 것부터가 인간적인 힘이나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로는 사실상 불가능인 것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마다 어디에 있든,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이라도 더, 아니 최대한 많이, 심지어는 생명까지 걸듯이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서..
죄악들, 악한 세력들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고, 혹 범한 죄악들은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주야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암송하며 필사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치열하고 뜨겁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서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그 모든 이치와 원리들 가운데 그와 같은 방법과 통로로 인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로 피 흘리면서 죄악들과 싸우고 각성하며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느냐, 얼마나 사력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며 가까이하고 최우선으로 기뻐할 수 있느냐가 모든 모양의 영적 각성과 부흥의 불길들에 있어 생각 이상의 기준과 관건과 비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행전19:11~12)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5월 18일(토)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