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
김희준
엄마 기억해? 내 빨간 원피스, 명절 전 장터를 돌아다니며 골라 준 그 쨍한 옷 말이야 그날 손금 사이로 녹는 아이스크림이 굉장히 거슬렸어 그래서 나는 명절이 지나도 할머니 집에 왜 남아야하는지 묻지 않았지 엄마 기분을 이해하거든 아이스크림 막대가 아니라 손바닥에 들러붙는 한 줌 바람을 버리고 싶었던 거지 가엾은 엄마
난 잘 지내 비어버린 외양간에서 여물 냄새가 좀 난다는 것만 빼고, 이상한 건 옆집마다 집을 허물어 온 가족이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자도 내일이면 벽돌을 이만큼씩 올리고 있다는 거야 완성되는 옆집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쓰다듬었어 왜 저들은 웃고 있을까
그림자가 길어지면 오후가 찢긴 몸을 쉬러 집에 들렀어 그마저도 구석에 있던 들풀거미가 예민한 다리로 햇볕을 살라먹었지 나는 개의치 않았어 빨간 원피스 입고 마을 어귀로 나갔을 뿐이야 태양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중이었어 흔들리는 배경이 온통 붉었어 오도카니 선 내게 마을 사람 몇몇이 망설이는 눈으로 편지를 욱여넣었지
편지봉투에 콩을 넣어 보내는 노인과 손자에게 천 원짜리 몇 장 동봉하는 투박한 발신인이 쌓였어 각자의 감정으로 나는 속이 채워졌지 어떤 날 콩이 그리움의 수만큼 터져 내 안에서 튀어오르면 재채기를 참느라 코를 꾹 눌렀어 중요한 건 담뱃가게 주인은 수신 없는 감정을 자주 부치러 왔다는 거야 빨간 원피스를 잡고 엉엉 울기도 하고 그의 알 수 없는 갈망으로 입안을 채운 날이 많아 그러면 나는 편지를 게워내고 그날의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어
시골은 저녁이 일러 곧 어둠은 들풀거미처럼 나를 발라먹겠지 그전에 할머니가 이곳으로 와 손을 이끌 거야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이 있잖아 그건 누군가 나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는 증거 그렇다면 엄마, 그날 나에게 몇 장의 편지를 쓴 거야? 할머니가 보여 멀리서 가뭇거리는 발짓이 위태로워 어둠은 나보다 먼저 삼킬 것이 많은 듯해 안녕 엄마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2017. 문학동네
연필
김희준
장면을 스케치한다는 건 문구점에서 연필을 슬쩍하는 것만큼 스릴 있다는 얘기지
가령 실직한 아빠를 공원에서 마주칠 때의 동공이라거나 내가 사실 세탁소 아저씨의 딸이라 말하는 엄마의 성대라거나 길에서 여자에게 뺨을 맞는 오빠를 본다거나 그 여자와 같은 산부인과를 공유하는 언니가 비밀이라며 나에게 5백 원을 쥐여주는 사실을 연필로 그리는 순간들 말이야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비어버린 가족과 허기진 소통을 나누어 먹지
그러면 나는 부러진 연필을 깎고 쓰다만 일기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어 최대한 둥글게 색을 칠하고 완성된 일기를 북북 찢었지 기겁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우리는 콩가루야 삼류도 못 돼 바람 부는 날 콩처럼 굴러가버릴 거야 저 밑으로 더 밑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말 많다 하지 마 공부는 연필이 알아서 하거든 지금 내가 그린 우리 가족처럼 말이야
연필 밑으로 스케치로 된 풍경이 어그러지고 나는 연필을 깎고 닳은 연필을 보다가 문구점으로 향하지
오늘은 어떤 순간을 그려볼까 고민하며 연필을 슬쩍하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말인데 문구점에서 전화가 와도 그 아줌마를 믿지 않았으면 해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2017. 문학동네
김희준 시인(1994~2020)
1994년 9월 10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2017년 《시인동네》 등단.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 수혜. 2019년 시산맥 특별기획 ‘시여 눈을 감아라’ 작품상, 2021년 제14회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 상, 2021년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2020년 7월 24일 불의의 사고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