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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昌慶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RNESTO CORTAZAR - 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
- 끝 -
옛그림 산책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궁궐의 장대한 경관 <동궐도>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국보 제 249호 <동궐도>
<동궐도(東闕圖)>는 현재 국보 제249호로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그림 1, 2).
<동궐도>는 경복궁(景福宮)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그린 작품이다.
1392년에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2년 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한양에 지을 도성과 궁궐을 총 설계하였다.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139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395년 9월에 완공되었다.
법궁은 정궁(正宮)을 의미한다.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해 북궐(北闕)로 불렸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이후 등극한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은
한양을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還都)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한양으로 다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이궁은 별궁(別宮)을 의미한다.
창덕궁은 1404년 10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년 뒤인 1405년 10월에 완공되었다.
태종은 1405년 11월에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창경궁은 본래 1418년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상왕(上王)인 태종의 거처지로 지은 궁궐이다.
건립 당시 창경궁의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1483년에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세조(世祖, 1455~1468)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의 계비(繼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를 모시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강궁의 궁역(宮域)을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1484년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수강궁은 창경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가 소실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에 중건되어 경복궁이 중건된 1867년까지 법궁으로 이용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이 1620년에 지은 경덕궁(慶德宮), 즉 경희궁(慶熙宮)은 서궐(西闕)로 불렸다.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대신해 동궐과 서궐의 양궐(兩闕) 체제로 궁궐이 운영되었다.
동아시아 궁궐도(宮闕圖)의 백미
(그림 1)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자리 잡은 경복궁은 『주례(周禮)』의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다.
경복궁은 남북을 축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의 구조 속에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다.
반면 응봉(鷹峯) 밑에 위치한 창덕궁은 산, 구릉, 평지가 섞인 지형에 따라 지어져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이다.
엄격한 질서와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이었던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치는 궁궐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는 거대한 궁궐이 자연을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화면의 왼쪽이 창덕궁이고 오른쪽이 창경궁이다.
이 그림은 대략 1828년 1월 이후 1830년 8월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16개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3).
각 화첩은 마치 아코디언(accordion)과 같이 접어서 포갠 절첩(折帖) 형식을 보여준다.
각 화첩은 위에서 아래로 5번 접어 6면으로 되어 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현재 병풍으로 표구되어 있는데
본래는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마찬가지로 화첩이었다.
<동궐도>는 천(天), 지(地), 인(人) 세 본(本)이 만들어졌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는 인(人)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천 또는 지에 해당된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수많은 전각(殿閣)과 정원, 연못 및
궁궐 주변의 산과 언덕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 4).
평행사선(平行斜線) 구도와 부감법(俯瞰法)이 적용된 <동궐도>는
웅장한 화면에 각각의 건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우물, 장독대 심지어는 해시계, 측우기 등 궁궐 내에 설치된 천문 관측기구까지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동궐도>는 장대한 스케일뿐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경관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아시아 궁궐도(宮闕圖)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동궐도>, 국보 제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274.0x578.2cm, 동아대학교박물관
그런데 <동궐도>는 그림 형식부터 특이하다.
동궐도는 본래 16개의 절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림 전체를 보려면 화첩을 하나하나 펼쳐야 한다.
이 그림은 왜 이런 형식으로 그려진 것일까?
<동궐도>의 가장 이상적인 형식은 병풍이다.
이 그림이 병풍으로 그려졌다면 한눈에 그림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상하로 접어 포개진 16개의 절첩을 모두 펴서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회화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왜 이와 같이 절첩이라는 매우 불편한 형식으로 <동궐도>가 그려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16개의 화첩은 어느 곳에 펼쳐졌을까?
거의 길이 6미터, 높이 3미터에 가까운 <동궐도>는 벽에 펼쳐졌을까
아니면 전각의 바닥에 펼쳐졌을까?
절첩 형식은 흔히 대형 지도인 전도(全圖)에 사용되었다.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22개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화첩은 접는 형식인 절첩으로 되어 있다.
<동궐도>는 궁궐 그림인 동시에
상세하게 궁궐 내의 각종 건물과 시설물, 궁궐 주변의 경관이 표현된 회화식 지도이다.
조선시대에 지도는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기밀(機密) 문서와 같이 취급되었다.
따라서 궁궐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린 <동궐도>는 최고의 기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 왕실의 일급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 내부를 그린 <동궐도>는
절대로 밖으로 유출돼서는 안 되는 극비(極秘) 그림이었다.
따라서 지도와 같은 절첩 형식으로 이 그림이 제작된 것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림 3) <동궐도>, 국보 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 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동궐도>는 절첩이라는 그림 형식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왜 그려졌는지 또한 현재 알 수 없다.
이 그림의 제작 동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선시대에 궁궐을 그린 궁궐도는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
즉 군주의 치도(治道)를 상징하는 정치적 그림이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 궁궐은 번성하지만
군주가 덕을 잃고 정사(政事)를 그르치면 궁궐은 쇠퇴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궁궐의 흥폐(興廢)는 곧 정치의 성패(成敗)와 직결된 것으로 여겨졌다.
16세기 중반에 병풍으로 그려진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의 제발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한양궁궐도>는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궐도>는 <한양궁궐도>와 같은 정치적 성격의 그림이었을까?
<한양궁궐도>는 병풍으로 제작되어 옥좌(玉座) 서쪽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동궐도>는 절첩으로 되어 있어 화첩 하나하나를 다 펼쳐야 궁궐의 전체 모습이 나타난다.
따라서 <동궐도>는 왕과 신하가 함께 보며 궁궐과 정치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그림이다.
(그림 4) <그림 1>의 세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일대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불이 자주 났으며 그 결과 전각들이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지어졌다.
<동궐도>에는 각각의 전각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동궐도>는 궁궐의 전각들이 화재로 사라지게 되었을 때
다시 이 건물들을 재건(再建)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시각적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궐도>는 궁궐의 전각들이 화재로 타고 이후 재건될 때 참고하기 위해 그린 그림일까?
현재 전하지 않지만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때 제작된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라는 그림이 있었다.
<동궐도>와 마찬가지로 <경복궁전도>는 중건된 경복궁에 있었던 모든 전각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그림이다.
고종은 경복궁 내 전각 일부를 개조하고 수리할 때 이 그림을 활용하였다.
따라서 <동궐도>도 화재로 타버린 전각을 재건하거나 일부 전각들을 개수(改修)할 때
가장 중요한 시각적 참고자료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궐도>와 같은 장대한 스케일의 그림이 그려졌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만약 건물들을 재건할 때 활용할 목적으로 <동궐도>를 그렸다면
현재와 같은 절첩식 그림으로 그려질 필요가 없다.
차라리 각각의 전각을 개별적으로 그린 그림이 이러한 목적에는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경복궁전도>가 병풍 그림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형식의 그림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경복궁전도> 하나가 당시 호조(戶曹)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동궐도> 세 본 중 두 본은 왕과 세자가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 한 본은 호조와 같은 관청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동궐도>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그림이 왜,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으며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결국 조선 국왕의 거주지이자 정무 공간인 금궁(禁宮)을 정교하게 그린
<동궐도>의 제작 의도 및 기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그러나 흥미로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https://www.kyobostory.co.kr/contents.do?seq=1562
첫댓글 흐르는 음악도 좋고 창경궁의 단풍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좋은 곳엘 다녀 오셨는데...
예전에 모셔다 놓은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임금님이 사셨던 곳이라
전국의 이름난 단풍나무들을
다 모아다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비원에 비해 조금 덜 알려졌지만
창경궁의 단풍이 정말 좋습니다
즐감하셨다니 감사합니다 ^^*
고궁에서 가을의 정취에 푹 빠져봅니다.
낙엽이 너무 아름답네요
감사합니다 ^^*
멋진 사진 잘 보았습니다.
요즘 찍은 사진인가요?
단풍 절정에 덕수궁 구경 가려구요.
벌써 오래 전에 모셔온 사진입니다
찍으신 분이 거의 작가 수준이시죠
허락을 받고 모셔 왔습니다 ^^*
멀리 갈것도 없이
가을의 아름다움이 다 여기 있어요 반영의 비침도
궁궐담길의 은행잎도
네 창경궁 단풍이 대단합니다
임금님 사시던 데니까요
감사합니다
좋은 음악과 함께 한 고궁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군요.
아마 임금님도 이런 가을 단풍길을 걸으며 사색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궁궐내부를 상세히 그린 16권의 절첩도인 동궐도, 대단한 것 같아요
처음 들어보지만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글과 음악
즐감하고 갑니다..^^!
네 우리 주위 가까운 곳에 이런 단풍이 있네요
정말 대단한 조경인 거 같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살린 궁궐 배치
동궐도도 정말 대단하지요
크기가 무려 273cm x 584cm이니까
그 크기도 정말 큽니다
궁궐을 자세하게 그린 그림이지요
감사합니다 아침님 ^^*
고궁의 가을과 아름다운 음악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