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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공이 역사라는 것은 몇번 말씀을 드렸었는데... 저는 그 역사학의 여러 개념중에서도 역사화라는 개념을 참 좋아합니다. 이 단어는 엄밀히 말하면 정규역사학자가 아닌, 언론인이 쓴 역사관련 책에서 접한 어휘이긴 한데, 대충의 의미는, 어떠한 인물이나 사건이 현 시점에서 정치적 갈등등으로 이용될 필요가 줄어듦으로서 지난일로서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지게 되었을 때, 그 사건이나 인물은 역사화가 되었다, 라고 합니다. 이안 부루마라는 네덜란드 양반이 쓴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정말 좋은 책입니다. 시의성도 떨어지고 나온지도 좀 되었으며, 일본정치예측 - 1993년의 정권교체 이후 일본의 정치도 달라질 기미가 보인다 예측했는데, 현실은... - 도 틀렸지만, 인상깊은 내용이 많은 책이네요)라는 책에서는 이 개념을 나치스에 적용하고 있죠. 나치스는 아직도 정치적 적대자들에 대한 욕으로서 그 이상의 것이 없을 만큼 훌륭히 "정치화" 되어 있죠.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탈린은 이미 역사의 관짝으로 들어간지 오래지만, 히틀러는 언제나 사라질런지... 후대에의 영향을 보자면 승자인 스탈린은 패자인 히틀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커녕 40년전의 박정희조차 역사화가 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덤에 들어간 박정희 나와라! 되고 있는게 현실이긴 합니다만 역사적 존재라는 것, 아니 모든 존재는 언젠가 역사화될 것이고, 그것은 그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가능한 것이기에, 아직 많이 이르고 무리하며 부족하게나마 나름대로 제가 생각하는 노무현이라는 존재의 역사적 의의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설이 길었네요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토록 고대하시던 님을 확실하게 만나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부우운~ 짝~
거두절미하고 결론격인 이야기부터 하자면 현대 한국정치에 있어서 2002년은 그 전의 여러 사건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획기입니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획기적인 존재죠. 그리고, 그의 획기성이 1948년, 1960년, 1961년, 1980년, 1987년과 가장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2002년이라는 획기는 한국정치에 있어서 최초의 "비폭력적인 획기" 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의 사건들에 비해 정치적 전환이란 점에서는 비견할만 하면서 폭력적이지 않은 획기라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성장했고 성숙했다는 이야기기도 하면서,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갖는 역사성과 위상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이 그 전과 다른 획기인 또 다른 이유는 가장 대중적인 획기였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물론 87년은 민중항쟁의 승리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것은 준비밀결사적으로 조직된 대중의 승리였던 면이 큽니다. 그러나, 2002년은 심지어 노무현 본인조차도 대중의 부름에 응해 나온 측면이 있을 정도로 대중의 승리인 것이죠. 노무현 정권기에 들어 포퓰리즘 논쟁이 가시질 않았던 이유기도 하구요.
역사적 존재가 등장하는데는 역사적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이회창이라는 화려한 조연이 존재하죠. 말 나온김의 이야기인데, 이회창이란 인물은 역대 한국 보수정치인중 최고로 많은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이승만이나 박정희보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말하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회창이란 인물이 그들과 다른 것은 한국 우익의 영웅들과 달리 그는 철저히 "한국사회가 성립한 이후 성장하고, 그 시스템내에서 만들어진 최대 최강의 엘리트" 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모든게 엘리트였고, 그놈의 아들만 아니었으면 분명히 대통령을 하면서, 한국사회가 그동안 이뤄온 성과를 "집대성, 혹은 정리"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죠. 그러나, 1997년과 2002년 그는, 조연에 그치면서 그 시기가 집대성의 시기가 아닌 "평가와 반성" 의 시기가 되는데 밑거름이 되는데 그치고 맙니다. 저는 이 양반이 한 20년쯤 더 살고나서, 지금의 이 갈등의 시대가 가라앉은 다음, 이 시대를 돌아보는 회고록을 꼭 내었으면 합니다. 넷규하, 아니 최규하 양반은 회고록도 안쓰고 죽어버리고 말이지...--
97년 대선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이제는 많이 잊혀진
"독수리5형제"
입니다. 지금 대구시장으로 나름 선전하고 있는 김부겸을 위시한 다섯사람이죠. 구체적인건 찾아들 보시고... 이게 왜 중요하냐면, 9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에서 벌어진 가장 큰 논쟁의 희생자아닌 희생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이죠. 92년 대선(자꾸 시대가 앞으로 가는데...--)에서 패배하고 은퇴한 김대중은 95년 지방선거의 승리를 계기로 복귀하였는데, 이 복귀의 와중에, 기존의 민주당을 와해시키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김대중을 최고의 대통령으로 치는 제가 보기에도 폭거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하여튼 김대중은 복귀했고 97년 대선은 다가오는데, 야권에서는 어떤 논쟁이 벌어졌냐면
"정권교체 VS 3김청산"
이라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아니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야권이면 당연히 정권교체가 중요한거 아닌가? 라는게 지금의 입장에서의 상식이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3김정치라는 것은 한국정치의 구태를 상징하는 어휘와도 같았습니다. 군부독재는 이미 청산되었으나, 줄세우기, 돈정치, 조직정치, 명망가 정치라는 구태의 구체적 체현자인 3김이 청산되지 않으면 한국정치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3김청산 구호를 주장하며 김대중을 반대한 진보진영사람들의 논리였죠. 물론 저는 그 구호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라서 슨상님한테 한표 찍기도 했구요. 슨상님이 살아계실적엔 이런일이 ?었는디!!! 그 논쟁의 앞머리에 선 사람은 유시민이었다는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죠. 나중에 유시민은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 되지만, 저 당시에는 "정권교체가 최우선이다" 면서 김대중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김대중 밑으로 들어간 노무현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으니까요.
할 말이 많다보니 좀 난잡해지는데, 차분히 봐 주십셔... 저 글 잘 못씁니다...--
하여튼 저 때, 운동권의 거성들이자 야권의 촉망받던 미래였던 독수리 5형제는 김대중에 대한 증오를 접지 못하고 3김청산 깃발을 들고 이회창의 밑으로 갑니다. 그들이 야권에 돌아올 수 있었던게 언제였는가를 생각하면... 명분으로나 그들의 정치적 진로로나 참 잘못된 선택으로 오랜 세월을 허비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노무현(드디어 나왔네...)은 여기서 정권교체를 택합니다. 이때 동행한 사람들이 원혜영 김정길 김원기 등등 그 이후 한국정치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진. 이 사진은 노무현 성애자인 일베충이 쓴 글에서 확보한겁니다. 그들이 사라질 때가 노무현이 관속으로 들어갈 때인데, 그들은 그걸 알까요? 좌로부터 유인태, 노쨩~, 슨상님, 김정길, 박석무, 원혜영
결과는 다들 아시듯이 정권교체의 승리입니다. 승리인데... 그렇다고 여기에 가세한 노무현의 앞길이 창창해지고 그런건 아니었죠. 당시 노무현은 96년 총선에 패배(이명박한테!)하고 자리가 없었던 상황인데, 9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굴러들어온 돌인 노무현이 너무 커지면 안된다고 겐세이 받아 못나가고 하던 그런 상황입니다. 만약 그 때 서울시장이 되었다면 지금과는 역사가 달라졌겠지요. 노무현 대신 시장이 된건 고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2000년 총선이 일어납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을 일찍부터 들고 나왔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더 쉬운 곳으로 나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자기의 정치적 고향(생물학적 고향은 부엉이바... 아니 김해)인 부산에 출마합니다. 이 때도 여론조사는 이겼는데, 선거는 졌죠. 물론 상대인 문정수가 김영삼의 상도동계로서 김영삼의 신뢰를 받던 인물인데다, 본인도 상당히 괜찮은 인물이기도 했지만서도...
2000년 총선에 대한 자료는, 2002년을 거쳐온 분들이라면 영상이나 이야기등을 통해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 당시 상대였던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가 첫 유세에서 이랬답니다.
"요즘 살림살이 좋아진 분 있습니까? 있다면 손 들어보세요. 아, 저기 손 드신분 있으신데, 저 분은 전라도에서 오셨나 봅니다"
이게 유세하는 꼬라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양반은 박근혜정권 초대 비서실장...-- 나중 이야긴데,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후보로 정해지자 이회창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그러면 우리는 허태열 의원을 내보내면 되겠구먼~" 이라며 대인배의 여유를 부렸다고 전해집니다. 킁킁~
노무현은 이 당시에도 종로에 출마하면 쉽게 당선될 수 있으니 종로에 나가라는 권유를 받으나, 다시 사지인 부산으로 뛰어들었고, 이 때도 여론조사는 앞섰으나 결국 투표에서 패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달변간인 노무현의 어록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 말을 남깁니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말입니다만, 저 말을 한 상황과 합쳐서 보세요. 저렇게 짠한 감동을 주는 정치적 발언은 거의 없으리라 단언합니다. 그런 감동을 먹고 노뽕을 맞은 사람이 저 뿐 아니었고, 그 뒤로 한국정치의 흐름을 바꾼 노사모는 그때 그 사건을 계기로 생겼습니다. 처음에 1500명으로 출발했다는데, 저는 6천명쯤에 가세했으니 상대적으로 초창기 멤버긴 하죠.
슨상님께서는 노무현이 너무 크면 곤란하니 주저앉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주저앉아도 안되는 인물이기에 커리어관리 차원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시켜줍니다. 이 때에도 무용담이 있던데, 그런건 패스. 사실, 요즘 굽본좌가 그리고 whermacht 님이 카페에 퍼오시는 이이제이에 이 당시의 이야기가 더 자세하고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굳이 제가 구구하게 쓸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이 길고 난잡한 글을 챙겨보실 정도의 분이라면 그 만화는 보고 계실텡게, 자세한건 각설합니다. 혹시 안보는 분들은
http://www.podbbang.com/ziksir/toon/gubsinist/eej/1
여기 가서 보셔요.
각설하고, 하여튼 그렇게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탄핵을 먹고, 총선에서 이기고, 삽질을 하다 인기 말아먹고, 야 기분좋다! 하고 고향에 갔다가 정치적 곤경에 처하고 자진으로 삶을 마칩니다. 2009년 5월 23일의 일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생략. 하나만 말하자면 그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빈소를 만드느라 몸싸움 한 사람중 하나가 접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내내 의구심을 가졌으나, 단 한번도, 인간 노무현을 싫어하거나 그에 대해 회의를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노무현의 정치가 초창기부터 그랬던건 아니나, 노무현의 정치를 크게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지역주의극복, 시민참여
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의 정치시작은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에서부터 긴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정치에 투신한건 1988년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에게 발탁되어서부터 였거든요. 이미 87년 대선의 아수라장을 겪고 난 다음이었지만, 지역연고라던가 명성이나 조직등에서 김영삼을 등지고 부산사람이 부산에서 정치할 수 있는건 아니니께. 그리고 이 때는 아직
3당합당
이 전이니까요. 2014년 현재의 정치를 만든게 뭐냐고 하면 거의 전적으로 저거라고 해도 무방...--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저게 지금 우리가 아는 지역구도를 만든 원인이거든요. 3당합당에서도 본질은 그 전까지는 별개의 집단이었던 PK와 TK가 "영남" 으로 하나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니까요. 지역주의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은데, 그 근원을 물론 박정희에서 찾을수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1971년 이후 14년이나 선거가 없었던 상황, 거기에 1985년 총선에서는 우리가 아는 지역주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상황을 종합해 보면, 지금의 지역주의는 1990년에 생긴게 맞습니다. 물론 그 원형은 1987년에 배태됩니다만...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에요. 박정희를 싫어합니다만, 모든 문제가 박정희때문에 생긴건 당연히 아니며, 아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 시기에 가장 유명한 사진은 역시
화려한 조연 김상현(노무현 오른쪽)에 주목. 저 양반도 저 당시는 상당한 명사였고 오히려 노무현보다 위상이 더 컸는데, 다만 역사적 존재가 되기에는 그릇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노무현을 만든 두 사건은 전두환에게 명패던진 것과, 바로 이 사건
"이의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문회스타로 전국구명성을 얻었던 노무현이, 지역주의에 맞서는 투사로 다시 태어는 순간이죠. 그 전까지 그냥 똑똑하고 유능한 일개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한 시대의 정신을 담지하는 존재로서 태어난 순간이랄까나요...
앞서 말해왔던 노무현의 지난한 패배 릴레이는 이 뒤로 시작됩니다. 1992년 총선 패배, 1995년 부산시장 선거 패배, 1996년 총선 패배, 2000년 총선 패배. 물론 중간에 1998년 종로 재보궐 선거에서 잠깐 당선되긴 합니다만, 그런건 스토리가 안나오니까 스킵되곤 하죠~ 흔히 "바보 노무현" 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모습은 저 사진에서 시작됩니다 전적으로.
시민참여부분은 특별한 계기나 기원을 찾을 수 없는데, 사실 찾을 수 없고 찾을 필요도 없어야 정상입니다. 시민참여는 당연한거니까요. 다만, 그 시민참여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한건 역시 노사모 이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주의는 사실 이미 많이 완화되고 있기도 하고(단지 인종주의로 비화하고 있을 뿐)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지속적 의미를 갖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노무현이라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라는 인물이 성장한 모태가 되기에 중시되기도 하죠. 물론 노무현은 그 지역주의극복을 "지역균형발전" 이라는 테제로 발전시켜내긴 합니다. 세종시라던가, 혁신도시 같은 것은 그의 정치적 구현이죠. 따지고 보면 세종시는 대통령을 두 명이나 만들어낸거라능...--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진정으로 역사적 존재가 된 것은 이 시민참여입니다.
앞서 3김청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3김은 1997년 대선에서 청산되지 못하고, 2002년 김대중의 퇴임과 김종필의 쇠락으로 완결되게 되어버렸죠. 그러나, 3김이 사라져도 정치는 이어져야 합니다. 어차피 생물학적 수명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3김의 퇴장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니.(정작 슨상님말고 다른 두 양반은 아직도 건재하다는게...)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김 이후의 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노무현의 답변이 시민참여였던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적인거야 말할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불신이 강한것도 사실입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뭐, 라는 말이 남녀노소 가릴거 없이 누구에게나 쉽게 나오는게 한국의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자기의 현실에서 실감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자유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자기 일상의 권위에게는 굽신굽신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이 권위가 되는 현상또한 너무 쉽게 볼 수 있죠. 거대한 위선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노무현의 시민참여는 그러한 한국사회의 심성적 조건에서 설득력과, 깨시민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어휘인 진정성을 발휘했죠.
이런 사진은 권위라는 것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를 진솔하게 보여줍니다. 공적영역으로서의 정치에서 권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시민참여, 사적영역으로서의 개인적 상황에서 탈권위적 모습으로서의 노간지. 이 둘은 노무현이라는 존재의 탈권위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의경출신이라서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노무현의 시민참여라는건, 입으로만 시민참여를 말하는 다른 정치인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죠. 저러한 개인의 인성차원에서 구현된 것이었기에, 그것이 설득력을 갖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시민참여라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정치적 파괴력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그것은 정치노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이미 2002년 국민경선에서 나왔습니다. 자세한게 궁금하시면 앞서 올려드린 굽본좌의 만화를 보신다면... 그 이야기도 제 버전으로 쓸 수 있지만, 그러면 이미 구구한 글 또 너무 길어지는지라...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라는 노무현의 한마디는 이러한 그의 정치역정의 구현 그 자체입니다. 저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저 그랬겠지만 노무현이 했으니까 설득력이 있는거죠. 자기 삶을 통해 자기가 구현한 가치를 실현하고, 그 설득력을 보인 사람으로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은 대단한 매력을 지녔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정치적 관점과 노선을 실제 정치현장에서 구현함으로서 그의 정치는 인물의 매력, 구체적 방법론, 실제적 성과를 아우르는 정치노선, 주의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죠. 3김이후의 정치는 그렇게, 노무현이 깔아놓은 레일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일베충들또한 노무현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팩트골룸질이라는, 자기들만의 방법론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만, 일간베스트라는 존재 자체는 기본적으로 우익행동주의의 연장선에서의
"우파대중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다만 이 동원은 거의 대부분 자발적, 국정원이 암약하고, 알바가 설쳐도 거의 대부분은 자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됩니다)되는 우익포퓰리즘"
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습니다. 다만, 우익에는 그러한 대중들이 참여할 공간이 없기에, 우파정치세력과 우익대중들은 결합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정치세력과 대중의 결합을 달성했다는 점에서도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탁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전부터 엘리트주의와 민중주의의 관계에 대해 말해왔으며, 현재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민중주의는 약진하고 있습니다. 남미나 타이등지에서는 진보적 민중주의가, 터키 인도나 유럽등지에서는 보수적 민중주의(프랑스 국민전선 같은것도 따지고 보면 우파 행동주의니까요)라는 차이는 있습니다만, 공히, 기존 정치엘리트들에 대해 대중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경향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또한 그러한, 대중의 약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한 물결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는, 당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행동의 결과로서만 드러난다는 것이겠죠. 한국에서의 민중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의해 규정되어버렸습니다. 노무현에 의해 3김 이후의 정치, 좁게는 김대중 이후 한국의 진보세력의 진로가 정해졌고, 그 존재에 맞서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나라 - 새누리 집단의 혁신이 이뤄지고 박근혜의 성장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보자면 노무현이라는 존재는 21세기 한국정치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체제는 앞으로도 한 동안 이어질거라는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노무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기에 한 시대를 규정하는 관념으로서 노무현정치는 그 시대의 그늘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죠. 어지간하면 귀찮아서 안할거 같긴 하지만...--
친노들 병신짓은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읽다가 생물학적 고향....에서 뿜어버렸습니다.
노짱 개그는 자제해 주세욧!
실은 저도 과거엔 노사모의 행동대원(? -_-)이였습니다.
대부분 공감이 가고 이해가 잘가는 글입니다.
저도 글쓴 님과 비슷한 생각을 따라가고 현재도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탈권위를 실천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좋게 평가해 주고 싶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언제나 알기쉽게 풀이한 좋은글이네요. 덧글창의 글들에서도 정말 도움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