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식탁> 빈 전투와 베이글
베이글 말 ‘등자’를 닮았네
‘기독교 vs 이슬람’ 전투서 승리한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
기리기 위해 만들었단 주장
커피·크루아상도 빈 전투로 알려져, 터키 음식문화의 유럽 전파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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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33년 전인 1683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오스트리아·폴란드·신성로마제국 연합군과 오스만 튀르크 군대가 충돌했다. 유명한 빈 전투다.
우리와 관계도 없고 한국사람 대부분이 알지도 못하며 관심도 없는 전쟁인데 무엇이 유명하냐 싶겠지만 따져보면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먼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전투다. 유럽을 향해 세력을 넓혀가던 이슬람의 오스만 튀르크가 빈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에 패배해 기세가 꺾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오스만 튀르크 군이 승리했다면 지금 유럽은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 문명권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우리와 관련 있는 부분은 거창한 세계사적 의미가 아니라 음식이다. 커피가 빈 전투를 통해 터키에서 유럽으로 전해졌고 베이글과 크루아상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기병대의 승리 기념하는 등자 모양
베이글과 커피의 유래는 모두 빈 전투를 승리로 이끈 기독교 연합군의 지휘관이자 폴란드의 왕이었던 얀 조비에스키와 관련이 있다.
빈 전투의 경과는 이렇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사령관 카라 무스타파가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쳐들어가 빈을 포위했다. 오스트리아와 현재의 독일에 해당하는 바바리아 연합군이 오스만 튀르크 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계속되는 오스만 튀르크 군의 공세에 밀려 빈이 함락되기 직전, 조비에스키 폴란드 국왕이 이끄는 코사크 중무장 기병대가 언덕에서 오스만 튀르크 군을 향해 돌진했다.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친 중무장 기병에 오스만 튀르크 군 수비 진영이 무너졌고 여세를 몰아 기독교 연합군이 일제히 공격하면서 오스만 튀르크 군이 패주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튀르크 군사령관 카파 무스타파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됐다. 반면 중무장 기병대를 지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비에스키 국왕에 대해서는 민중이 여러 형식으로 그의 승리를 찬양했다. 베이글 빵도 이때 조비에스키 국왕의 승리를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빈의 유대인 제빵업자가 왕이 이끈 기병대를 기리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말 탈 때 발을 딛는 등자 모양으로 둥글게 빚어 구운 후 뷔겔(Bugel) 빵이라고 이름 지었다. 뷔겔은 독일어로 등자라는 뜻인데 이 말이 변해서 베이글이 됐다.
베이글의 유래는 거짓말일까
이런 베이글의 유래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99%다. 빈 전투 이전에도 이미 먹었던 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인 입장에서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조비에스키 폴란드 왕의 업적을 어떻게든 기리고 싶었기에 베이글과 빈 전투, 그리고 조비에스키 왕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것도 빈 전투 그리고 조비에스키 왕과 관련이 있다. 빈 전투에서 패한 오스만 튀르크 군이 퇴각한 후 이들이 머물던 주둔지에서 이상하게 생긴 콩 자루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를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은 커피 원두가 낙타 먹이일 것이라고 생각해 태워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쿨치츠키라는 장교가 커피라는 음료를 알고 있었다.
그는 조비에스키 왕의 허락을 받아 전리품인 커피 원두를 가져다 빈에서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그러면서 유럽에 커피가 퍼지게 됐고, 빈은 커피에 생크림을 넣어 마시는 비엔나커피를 비롯한 커피의 도시로 유명해졌다. 사실 여부는 역시 증명할 길이 없지만, 유럽에 커피가 퍼진 유래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파우웰 카스틸 작 빈 전투 장면(왼쪽).폴란드 얀 조비에스키 3세 국왕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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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빵 크루아상도 유럽으로 전해져
크루아상의 유래도 빈 전투와 연결된다. 바게트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으로 유명하지만 크루아상은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빈을 포위한 오스만 튀르크 군이 도시 중심부를 기습 공격하려고 땅굴을 팠다. 이때 새벽에 일어나 빵 만들 준비를 하던 제빵업자가 땅굴 파는 소리를 듣고 신고함으로써 오스만 튀르크 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공을 세운 제빵업자에게 적국인 오스만 튀르크 깃발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해 크루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크루아상(croissant)은 ‘초승달’이란 뜻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만들어진 빵이 프랑스 대표 빵이 된 것은 오스트리아 공주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 루이 16세에게 시집올 때 가져와 퍼트린 덕분이다.
베이글과 크루아상의 유래, 커피의 유럽 전파가 왜 모두 빈 전투와 연결됐을까?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만 해도 터키는 제빵 기술이 발달한 선진국이었다. 이런 터키의 빵이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에 먼저 전해진 후 빵 굽는 기술을 발달시킨 오스트리아를 통해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1683년의 빈 전투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전쟁을 통해 베이글·크루아상·커피로 상징되는 터키의 음식문화가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비에스키 폴란드 국왕이 뜬금없이 음식 유래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유럽 민중이 이슬람 문명을 저지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에게 영광을 바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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