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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한국 첫 쇄빙선 ‘아라온호’
2009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
조선소에서 순수 국내 기술로 건조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진수식이 열렸다.
아라온호는 남극 대륙 주변이나 북극해
처럼 얼어있는 바다에서 단독으로 항해
할 수 있는 쇄빙선(6950t급)으로 길이1
10m, 폭 19m 규모다.국토해양부 산하
극지연구소의 발주로 1030억원이 투입
돼 제작된 아라온호는 마무리 작업을 거
쳐 9월 말 인천에 있는 극지연구소에
인도될 예정이다.
쇄빙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 항해를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인 탐사와 연구활동에
투입될 예정이다. 한국은 그동안 쇄빙선
이 없어 다른 나라 배를 빌려 사용했다.
아라온호는 60여종의 최첨단 장비를
갖춰 연구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라온’이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로 바다
를 의미하는 ‘아라’에다 전부나 모두라는
뜻이 있는 관형사 ‘온’을 붙여 지었다.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비라’는 의미와 ‘어떠
한 상황에서도 역동적으로 활약하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2015년 위안부 피해자.
포항 김달선 할머니 90세로 별세
▶2015년 위안부 피해
김외한 할머니 별세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2010년 FIFA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7월 11일)
▶2009년 대한민국의 우주기지 나로
우주센터가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짐. 세계에서 13번째
로 우주기지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2009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
신뢰회복네트워크 명동 청아람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포럼' 개최.
주제발제 장신대 임성빈 교수
▶2009년 세계보건기구, 인플루엔자
AH1N1의 전염병 경보수준
‘대유행’으로 격상.
▶2004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현대 비자금 150억원 받은 혐의로 징역 12년 선고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2000년, 대북 불법송금에 개입하고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항소심에서도 징역12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주흥·李宙興)는 11일 박 전 장관의 범죄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 징역12년에 추징금 148억5200여만원을 선고했다. 박 전 장관은 이날 녹내장을 앓고 있는 오른쪽 눈에는 거즈를 댔지만, 한 달간의 구속집행정지 기간 허리디스크가 다소 호전된 듯 휠체어를 타지 않고 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가 현대로부터 카지노·면세점 허가 청탁과 함께 150억원을 받았다는 정몽헌(전 현대아산 회장), 김영완, 이익치(전 현대증권 회장)씨의 진술은 믿을 수 있고, 대북송금 과정에서 북한에 불법으로 송금하도록 지시한 혐의 등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항소심 진행 중 추가기소돼 1심에서 2년6월이 선고된 알선수재 혐의도 1심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은 3000만원을 포함해 모두 유죄를 인정했으나, 남북화해와 경제협력 확대에 기여한 공로와 녹내장 등 병세를 감안해 형량을 원심보다 무겁게 정하지는 않았다.
재판부는 특히 박 전 장관에게 돈이 흘러갔다는 직접적 물증이 없고 유죄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익치, 김영완씨의 진술이 일부 엇갈리는 데 대해 “전달시점에서 3년이나 지나 세부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지만, 중요 부분에서는 대부분 일치해 믿을 수 있다”며 ‘물증이 없다’는 박 전 장관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뇌물전달 시점에 연극을 관람했다는 박 전 장관측의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 주장도 다른 날 관람한 것으로 돼 있는 문광부 내부결재 문서를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박 전 장관은 유죄가 선고된 순간 굳어진 얼굴로 방청석의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지인들과 악수를 나눈 뒤 구치소로 향했다. 박 전 장관측은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표지판 헌정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에 도산 안창호 선생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도산 안창호 기념 인터체인지’ 표지판.
지난 2002년 8월 도산 인터체인지 법안을 상정한 케빈 머레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측은 9일 “도산 안창호 후손들을 초청한 가운데 오는 11일(현지시각)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10번과 110번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표지판 제막식이 열린다.”고 밝혔다.
한국인의 이름이 미국 고속도로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불리게 된 이 길은 하루 평균 57만여 대의 차량이 통과해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미국 연방하원은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6가와 하버드 코너에 위치한 ‘6가 우체국’을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바꾸는 법안을 이미 통과시켜 도산 이름을 딴 우체국도 곧 생길 전망이다.
▶2003년 프로 테니스선수
앤드리 애거시, 1000번째 경기 수립
강철의 사나이’ 앤드리 애거시(33·세계2위·미국)가 생애 1000번째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애거시는 11일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퀸즈클럽 테니스 1회전에서 페테르 루사크를 2대0(7―6,6―4)으로 제압했다. 이 경기는 애거시가 지난 86년 프로 입문 18년 만에 맞은 통산 1000번째 경기였다. 애거시는 1000경기 이상을 출전한 8번째 선수가 됐으며 766승234패로 다승부문 6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3년 6월 11일 런던에서 열린 퀸즈클럽 테니스 1회전에서 앤드리 애거시가 상대 페테르 루사크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있다. 애거시는 자신의 1000번째 경기를 2대0 완승으로 장식했다.
애거시는 “(1000번째 경기의 상대로)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선수를 만났다”며 “첫세트 출발은 좋았는데 상대가 강하게 반격해 오는 바람에 고전했다”고 말했다.
필생의 라이벌 피트 샘프러스와 90년대를 양분한 애거시는 강력한 스트로크와 튀는 패션, 재치 넘치는 말솜씨로 팬들을 사로잡은 대중스타였다. 애거시는 96년 인기 여배우 브룩 실즈와 세기의 결혼을 해서 화제를 뿌렸고 이후 랭킹이 급전직하, 100위 밖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애거시는 브룩실즈와 이혼한 후에 2001년 ‘테니스 여제’ 슈테피그라프와 재혼해 다시 화제를 모았다. 한때 “애거시 시대는 끝났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올해 초 호주오픈 정상을 차지하고 랭킹 1위에 재등극하는 등 최근 ‘제2의 전성기’를 열고 있다.
그는 “코트에는 늘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고 고심한 날들이었다”면서 “지금도 이렇게 경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2003년 ‘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 그레고리 펙 별세
로마의 휴일’과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To kill a mockingbird)’의 배우 그레고리 펙이 12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87세.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배우들의 위엄있는 아버지”(스티븐 스필버그) “성실과 정직의 상징”(커크 더글러스) “완벽한 신사”(폴리 버건)로 그를 기리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는 행복한 배우였다. 배우로서 명성을 얻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 명성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그는 50년이 넘는 연기생활 동안 6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내내 관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단 한 번의 스캔들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영화와 실제 삶 모두에서 성공한 스타였다.
펙은 1940∼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했던 스타였다. 그리고 그는 스크린 스타이기에 앞서 미국인의 영웅이었다. 그의 별세 1주일 전, 미국영화연구소(AFI)는 ‘미국 영화 속 최고의 영웅 50’을 선정해 발표했다.
수퍼맨, 제임스 본드, 인디아나 존스를 제치고 1위에 뽑힌 캐릭터는 바로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의 에티커스 핀치였다. 이 작품에서 그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억울하게 투옥된 흑인을 구명하는 일에 앞장선 정의로운 변호사 역을 훌륭히 해내 196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때까지 46년을 살아오는 동안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연기였다. “지금 이 법정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외쳤던 그의 영화 속 대사는 민권운동의 슬로건으로 활용됐다.
1944년 ‘영광의 나날들’로 데뷔한 이후 두 번째 작품 ‘천국의 열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일찌감치 스타가 된 그는, 사실 나치 전범(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 서부영화 악당(듀얼 인 더 선) 같은 악역들도 연기한 배우였다. 그러나 팬들은 언제나 그를 과묵하고 성실하면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인(義人)으로 기억했다. 링컨이나 맥아더 같은 실존 영웅이 그의 단골 배역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펙은 “난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만큼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다. 때론 용기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고 했지만, 팬들은 그런 겸손 때문에 그를 더욱 사랑했다.
그는 연기 외에도 자선단체를 포함한 여러 비영리단체에서 맹렬히 사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케이프피어’ ‘스펠바운드’ ‘신사협정’ 등 많은 대표작이 있었지만, ‘로마의 휴일’은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과 함께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신문기자 역을 맡아 유럽 소국의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햅번과 함께 로마의 거리를 누비며 가장 달콤한 50년대의 사랑을 그려냈다.
그의 삶은 마지막까지 평온했다. 48년간 해로해온 아내 베로니크의 손을 잡은 채 그레고리 펙은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
새벽 4시. 만물이 막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Gregory Peck 출연작 - Old Gringo(1989), The Boys from Brazil(1978), MacArthur(1977), The Omen(1976), To Kill a Mockingbird(1962), Cape Fear(1962), The Guns of Navarone(1961), Roman Holiday(1953), The Million Pound Note(1953), Captain Horatio Hornblower R.N.(1951), Twelve O'Clock High(1949), Gentleman's Agreement(1947), The Yearling(1946), Spellbound(1945), The Keys of the Kingdom(1944), Days of Glory(1944)
http://www.imdb.com/name/nm0000060/ http://en.wikipedia.org/wiki/Gregory_Peck
▶2003년 이라크전쟁,
사망자 민간인만 3,240명
▶2001년 일본 벤처 자프코
"한국에 340억원 투자"
▶2001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78번째 이탈리아 총리에 취임했다.
▶2001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범 멕베이 사형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사건의 범인 티노시 맥베이(33)가 2001년 6월 11일 오전 7시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교도소에서 독극물 주입 방식으로 처형됐다.
당초 맥베이는 5월 16일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연방수사국(FBI)이 일부 자료를 그의 변호인측에 넘겨주지 않아 사형 집행이 연기됐었다. 그는 1963년 이후 처음으로 연방정부에 의해 처형된 죄수로 기록됐다. 맥베이는 이에 앞서 6월 8일 사형 집행 연기를 위한 모든 법률적 노력을 포기했으며, 6월 9일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처음으로 용서를 구했다.
8분간의 독극물 주입에 의한 사형 집행장면은 처형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희생자 유족 10명, 취재진 10명, 친지·친구 등 맥베이의 초청인 10명 등 모두 30명이 지켜봤다.
▶2000년 교황 남북정상회담
특별메시지 발표.
▶1999년 월북작가 함세덕 희곡
‘무의도 기행’ 국립극단서 처음 공연
국립극단이 1940년대를 풍미한 희곡작가 함세덕(1915∼1950)의 `무의도 기행`을 1999년 6월 11일부터 22일까지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우리 국립극단이 월북 작가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창단 이후 처음이었다.
함세덕은 35세로 요절했기에 10여년 밖에 작품 활동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 암흑기, 광복 전후 혼란기를 통해 희곡 20여 편을 써내며 연극계 중심에 섰다. 대부분 유치진 연출로 공연됐던 함세덕의 작품은 잘 짜인 드라마 속에 암울한 시기의 꿈을 담아, 조국 잃은 사람들 가슴에 큰 울림을 안겼다. 1988년 우리 정부의 해금 조치로 그의 희곡들이 햇빛을 봤으나, 이번 공연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본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
`무의도 기행`은 1930, 40년대 서해의 작은 섬 무의도가 배경.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시대를 암울하게 살 수 밖에 없던 어느 섬 소년의 고독한 성장기, 처참한 종말에 이르는 비극적 삶이 그려진다. 친딸까지 팔았던 비참한 가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대사엔 우리말 특유의 맛이 배어 있다. 이번 공연은 월북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묻혔던 우리 연극사의 한 부분을 재발견하는 일에 국립극단이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98년 중-일 공산당, 문화대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상호관계 정상화하기로 합의
중국 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은 지난 60년대의 중국 문화대혁명 등으로 사실상 단절됐던 상호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11일 보도했다. 양당은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다이빙궈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니시구치 히카루 일본 공산당 국제부장간의 회담에서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열어간다는 정신으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1997년 제2차 북미 미사일 회담
(뉴욕. -13일)
▶1995년 설치미술가 전수천,
베니스비엔날레서 특별상 수상
1995년 6월 11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관 개관 원년행사에 출품한 전수천씨의 작품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이 한국국적 작가로는 최초로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전씨가 한국관에 출품한 설치작업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 은 지난해 가을부터 경주에서 구운 토우 8천개와 비디오 모니터 8대,각종 산업폐기물을 함께 설치해 고대와 현대,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며 몽환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전수천씨의 작품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
특히 손으로 직접 빚은 신라시대의 토우 형상들과 각종 산업폐기물, 첨단 비디오설비 등을 결합해 한국의 전통세계를 보편적 조형언어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한국관 개관 이후 국제미술계 인사들의 호평과 찬사를 받았다.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1988년 사회정화위원회 폐지
▶1985년 소련의 금성탐사위성
베가1호의 착륙선이 금성에 착륙
▶1984년 이탈리아의 공산당 서기장
베를링구에르 사망
▶1981년 이란의 켈만주에 대지진,
1500~3000명 사망
▶1981년 제1공영호(선원21명)
서해북방한계선서 납북
▶1980년 음주측정기를 이용한
음주운전 단속 시작
1980년 6월 11일 치안본부는 차주 운전자가 늘어나면서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급증하자 미국에서 음주감지기 4백대를 도입, 전국 경찰에 나누어주고 음주 운전자를 강력히 단속토록 했다.
이 음주 감지기는 소형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정도의 크기로 상단에 붙어 있는 파이프에 운전자가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버튼을 누르면 알콜의 함량이 숫자로 표시되게 제작됐다. 이 감지기는 주로 교통경찰이 휴대, 지그재그 운전을 하는 운전자나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의 음주여부 및 호흡 1ℓ당 알콜흡인량을 알아내는데 쓰였다.
기준 이상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적발되면 1년 이하의 징역과 30만원 이하의 벌금 이외에 30일간의 운전면허 정지기간이 길어지고 자동차 사용 정지처분이 병과되도록 했다.
치안본부가 음주감지기를 도입하게 된 것은 1979년 한해동안 전국에서 음주운전으로 인해 2006건의 사고가 발생, 1백50명이 사망하고 1천7백11명이 부상했기 때문인데, 이 사고 건수는 1978년에 비해 45.9%가 증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음주감지기를 이용한 음주운전자 적발-처벌은 개개인에 따라 다른 알콜반응도, 다시 말하면 술이 센 사람과 덜 센 사람, 맥주 한 병을 마시고도 운전할 수 없는 사람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감지기보다는 운전자로 하여금 직선 위를 걷게하여 똑바로 걷는가의 여부로 판정했다.
▶1980년 알지에석유수출국기구
(OPEC)총회, 원유의 가격통일 실패
▶1979년 미국 민간대외원조협회
(CARE) 한국서 철수
▶1979년 영화배우 존 웨인 사망
지난 반세기동안 2백여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인을 대표해 온 영화배우 존 웨인이 1979년 6월 11일 사망했다. 15년에 걸친 암과의 끈질긴 투병 끝에 이날 오후 5시35분 캘리포니아주립대 메디컬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1938년 ‘역마차’로 각광을 받은 이래 서부극의 카우보이 기병을 비롯, 각종 영화에 해병대, 파일럿, 선장 등으로 등장해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한 ‘정의의 투사’로 전세계 영화팬의 심금을 울렸으며 ‘미국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홍보한 대변인으로 군림했다.
1907년 5월 26일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난 그는 192cm의 거구를 이용 남가주대 시절 미식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 후 영화계에 입문, 포드 감독에게 인정받아 배우가 됐다. 그후 10년 이상을 한결같이 값싼 B급 서부극에 출연하던 중 1939년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역마차’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붉은 강’ ‘기병대’ ‘그린 베레’ 등에 출연, 강인한 미국인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1970년 ‘진정한 용기’(1969)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그가 보지 못하고 받은 명예훈장에는 다음의 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존 웨인, 그는 미국인이다’라고...
▶1979년 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1977년 네덜란드군, `몰루카`
테러범 습격 인질 51명 중 49명 구출
▶1976년 김영삼 총재사퇴 선언
▶1974년 브라질의 대통령(1945-50)
두트라 사망 - 입헌민주주의 회복
▶1971년 리비아,
대만과 단교 중국 승인
1971년은 `죽의 장막`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첫 해였다. 대표권 분쟁을 둘러싼 대만과의 외교경쟁에서 우위에 서는 일이 첫 관문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대만을 지지했지만, 실리적으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타진하고 있었다. 4월에는 탁구 선수단을 중국에 보내 이른바 `핑퐁 외교`의 물꼬를 터뜨렸고, 6월에는 대(對)중국 금수조치 해제를 단행, 화해 제스처를 내비쳤다.
중국의 유엔 가입이 결정되는 순간 환호하는 찬성 국가 대표들.
이 와중에 6월 11일, 리비아 대통령 카다피가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었던 수교국가 수(數)가 하루 만에 역전됐다.
중국은 여세를 몰아 유엔가입을 추진했다. 10월 25일,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과 대만의 유엔축출을 명시한 이른바 `알바니아안(案)`이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 중국이 건국 22년 만에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순간이 보기 싫었던지 대만 대표는 표결에 앞서 유엔탈퇴를 선언하고 총총히 대회장을 떠났다.
▶1970년 러시아 총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사망
▶1969년 캄보디아,
미국과의 국교재개를 통고
▶1968년 프랑스,
반드골 학생데모 격화
▶1965년 베트남 쿠데타(5차)로
웬반티우 장군, 웬까오끼 장군 공동 집권
▶1942년 미국-소련
상호원조조약 조인(워싱턴)
▶1930년 중국 중앙위,
이입삼노선 채택 (도시무장봉기 결의)
▶1925년 삼시협정(미쓰야협정)으로
재만(在滿)한인의 단속강화
▶1923년 경성무선전신국 설치
▶1908년 의병장 허위 피체
▶1901년 바이올린 연주자 채동선 출생
▶ 1899년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출생
▶ 1895년 1955~1958년 소련총리로 재임한 불가닌 출생
▶ 1894년 동학군 전주성포기 동학혁명 종식 관군 전주성 점령
▶ 1880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랜킨 출생
▶ 1864년 20세기 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출생
▶ 1847년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지도자 포셋 출생
▶ 1815년 영국의 초상 사진작가 캐머런 출생
▶ 1475년 신숙주 사망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조선 전기의 명신, 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내리는 이런저런 평가일 것이다. 작은 사실, 그것도 정확치 않은 풍문에 기대어 발설되고 어느새 널리 퍼져있는 비방을 들을 때, 그 당사자는 절망하거나 분노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신중한 판단과 섬세한 표현은 어떤 사람에 관련된 평가에 특히 중요하다. 짧은 내용이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쓰면서 그런 민감성을 자주 생각했다.
빼어난 자질과 능력
신숙주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참판이라는 벼슬이 보여주듯 신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사장(詞章) 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死因)이 되었다(세종 15년 2월 8일).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屈原)과 송옥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세조와의 만남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에게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뒤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그전에도 서로 알고 일정한 교류는 있었겠지만, 운명이라고 말할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35세 때인 1452년(문종 2)이었다. 그때 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그 사행은 야심이 큰 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시키려는 좌천의 의미가 큰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가장 핵심적인 신하가 되는 신숙주의 만남을 실록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8월 10일 세조는 정수충(鄭守忠)이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집 앞을 지나갔다. 세조는 “신 수찬(申修撰)”이라고 그를 불렀고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셨다. 그때 신숙주는 수찬이 아니라 직제학이었지만, 세조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눴다. 세조는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고 화답했다. 세조는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갑시다.”(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 짧은 대화는, 세조와 한명회(韓明澮)의 만남과 함께,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 뒤 서장관으로 수행한 사행에서 세조와 신숙주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흉금을 터놓고 국가의 대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구했던 ‘구국의 방안’들은 한 해 뒤인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구체화되었다..
화려한 출세
신숙주 초상화. 비단에 채색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초상화 중 흉배(胸背)형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가로 109.5센티미터, 세로 167센티미터. 보물 제613호. 충북 청원군 가덕면 구봉영당 소장. <출처: 한국사기초사전>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62년, 세조 8).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구치관(具致寬)과 함께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예종이 급서하고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 가까이 재직했다(성종 2년 10월 23일~성종 6년 7월 1일, 45개월). 어린 국왕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행된 이때의 정황은, 마치 단종 때의 국면처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훈구대신 들과 함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화려한 관력 외에도 그는 정난(2등), 좌익, 익대, 좌리(이상 1등)공신에 책봉되는 유례 없는 훈력(勳歷)을 누렸다. 이런 관력과 훈력은 당시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대신이었던 한명회와 더불어,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국제적 안목
그의 경력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을 가졌다는 측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그는 젊은 시절 서장관으로 일본과 중국에 다녀왔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과 통신 수단이 작동하던 그때, 그런 여행은 전 세계를 체험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신숙주는 다시 중국에 주문사(奏聞使)로 파견되어 임명 교서를 받아왔으며, 관직 생활 전체에 걸쳐 중요한 외교문서를 대부분 작성하고 검토했다.
이런 폭넓은 국제적 안목이 산출한 중요한 업적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저술이다. 그 책은 앞서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지어 세종에게 올린 것으로, 1471년(성종 2)에 간행되었다. ‘해동의 여러 나라’는 일본 본토와 큐슈, 쓰시마(대마도), 이키도(壹岐島), 류큐국(琉球國)이다. 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인 그 책은 조선 전기와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의 한일 관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기초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해동제국기]의 표지와 본문 일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밖에도 신숙주는 1460년(세조 6) 강원ㆍ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 정벌에 뛰어난 전과를 올렸으며, [세조실록]과 [예종실록],[동국통감],[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을 주도하는 학문적 업적도 남겼다.
그에 대한 평가
세조는 이런 그를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魏徵)에 견주었고,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신숙주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고 격찬했다(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단종을 저버리고 세조를 선택한 결정일 것이다. 세조의 정난은 도덕적 명분이 희박한 정치적 야심의 소산이 분명했다. 복잡한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현실과 정연한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은 거의 언제나 대립한다. 인간의 선택은 그러므로 대부분 그 사이에서 이뤄진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숙주가 그 모의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성공시킨 사람은 다 알 듯이 한명회였다.
신숙주에게 세조의 집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졌던, 그러니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공식적 삶의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30대 후반의 인재에게 그런 선택은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무의미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그의 경력은 아부나 언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학식과 실무적 능력과 국제적 감각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업적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삶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1455년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에 즉위
보덕사 산신각의 단종대왕화상
(강원 영월군 영월읍).
https://youtu.be/LgeYKyYIf-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