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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29일 토요일 말씀묵상 ♣
성경:히브리서2:1-4(신354P)
제목: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
.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할렐루야!오늘도 말씀을 사모하시고 묵상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만나를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제목}***“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
본론의 첫 주제는 하나님 아들이 천상적 피조물인 천사보다 뛰어난 신적 존재라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가 아들을 천사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4).
둘째로 아들은 천사의 경배 대상이라는 점에서 뛰어나십니다.
셋째로 아들은 통치 주권을 가진 점에서 뛰어납니다.
넷째로 아들은 영존하는 불변의 존재라는 점에서 뛰어납니다.
다섯째로 아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다는 점에서 뛰어납니다.
여러분!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세상의 어떤 보배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세상과 함께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히2:1-4)
소설이나 영화에 보면 주인공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거나 기관 고장이 생기는 바람에 표류를 하게 되면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배는 그저 물결치는 대로 따라 흘러가다가 으레 어떤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고 그런 후에 그 섬에서 신나는 모험이 시작되든지 혹은 예기치 않았던 로맨스가 싹트게 되든지 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표류를 하게 되면 일단 항로를 벗어나면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뿐 아니라 좌초의 위험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동력을 잃고 표류 상태에 빠진 배는 약간의 파도만 들이닥쳐도 전복되기 십상입니다.
(지난해 태국 파타야에 노회원 수련회에 갔을 때 30분의 배를 타는 동안 안개가끼어 앞이 보이지 않아 1시간 이상 바다 가운데 표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표류란 뱃사람들이 풍랑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그처럼 원래의 항로를 벗어나
“흘러 떠내려가게 되는 표류의 위험”이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1절 하반절에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것은 “바람에 밀려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상태” 즉 표류 혹은 조난을 의미하는 말로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구원의 항구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표류하다가 결국 파선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 하면, 그것은 현상 유지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불신앙의 바다 깊은 쪽으로 점점 더 표류해 갈 위험이 다분하다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치명적인 영적 표류에 자칫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 중에 “ 흘러 떠내려가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의 표류를 깨닫게 해 주는 기준은 “성경 말씀”입니다(1-2절).
1절과 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공한 보응을 받았거든”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들은 것”이란 바로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계시를 여기서 유독 “들은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앞의 1장에 나오듯이 이 성경이 하나님께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결과 우리가 “듣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까지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귀에 대고 말씀해 주신 직접계시”를 통해서 “듣게” 된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이보다 더 크고 뚜렷하게 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므로” 이제는 그 모든 계시를 들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말씀을 “더욱 유념함으로”라는 순서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모든 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고 자기 심령에 굳게 간직함으로써 혹 영적 방심에 빠져서 떠내려가게 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란 “아들을 통해 직접 주신 말씀”의 이전 단계의 계시인 구약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 구약을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천사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천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계시 수단을 통하여 전해 주신 말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 구약의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라는 말은 율법의 말씀 역시 “강력한 구속력이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어기는 범죄, 율법을 거역한 불순종도 다 “공정한 보응” 즉 “공의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에야 GPS 덕분에 지구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다물결만 보고서는 그 배가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지, 조류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움직이지 아니하는 기준점”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등대나 해안에 높이 솟아 있는 산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북극성을 기준으로 해서 “위도”를 측정하고, 현위치에서 태양이 남중하는 시간을 잰 후에 그것을 출발지의 시간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계산함으로써 “경도”를 측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지형지물이든지 별이든지 하여튼 어떤 “부동의 기준점”이 있어야만 자신이 표류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바로 그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설교 시간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들었던 모든 말씀들을 평소의 생활 속에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 기준”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서 과연 내 영혼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나의 신앙생활이 진보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혹은 똑바로 가고 있는지 곁길로 빠지고 있는지를 늘 체크하면서 살아야만 그런 영적 표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적 퇴보나 이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인 동시에 유일무이의 예방책인 것입니다.
군대에서 “차렷!”이라고 하는 구호를 영어로는 “attention!”(주의집중)이라고 합니다.
즉 지금 상관이 앞에 나타났으니 부하들은 온 정신을 그 상관이 하는 말에 완전히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그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도 “간절히 유념하고 주의를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사령관이 분명히 내린 명령도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병사와 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흘러 떠내려가서 신앙생활에서 남보다 뒤처지거나 혹은 아주 이탈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에 이처럼 자주 그리고 명백하게 들려주시는 모든 말씀에 더욱 주의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 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표류를 붙잡아 주는 중심은 “구원의 확신”입니다(3절).
3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계시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시는 내용의 핵심은 바로 “구원”입니다.
세상에 온갖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죄인 구원”을 주제로 기록된 책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타종교의 소위 “경전”이라는 것들 역시 사실상 “윤리, 도덕, 철학”에 관한 내용이지 성경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사불란하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특히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구원”이라는 단어는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무슨 “가난에서의 구원”, “질병에서의 구원”, “소외와 압제로부터의 구원” 이런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두고 “큰 구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작은 구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큰 구원”은 바로 “사람을 죽음의 저주에서 살려 주는 것”이며, 이런 “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도 이런 엄청난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응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등한히 여김”이란 말은 영어로는 “neglect”(무시하다)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 십자가 구원을 “우습게보고 무시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자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구원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명백히 계시된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그처럼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피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는 바로 앞 2절에 기록된 사실 곧 “율법을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써 받게 된 공정한 보응”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 역시 “영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구원을 아예 안 믿는 것이나 겉으로는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가볍게 여기는 것이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피장파장이요 오십보백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적어도 확고부동한 기독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절대로 그렇게 “등한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처음부터 확실하게 선포하신 대명제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 즉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성육신하신 것이요 바로 이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그 구원의 복음을 “들은 자들” 즉 제1차 목격자들이 “확증한” 사실이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역시 “구원의 확신”이라는 닻에 확실히 뿌리를 박고 있으면 아무리 표면에는 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쳐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좀 가난해도 천당 갈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그까짓 돈 때문에 “신앙까지 흔들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같이 큰 구원”, “예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이 영생구원”을 한순간이라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늘 확실하게 붙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표류를 막아 주는 힘은 “성령의 능력”입니다(4절).
4절 말씀에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신앙을 확고부동하게 유지시켜 주는 “큰 구원”은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증언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이란 바로 “성령의 선물들” 즉
종합해서 말하자면,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고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마음대로 나누어 주신 선물”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구원 사건의 제1차 목격자들의 증언 즉 복음이 진짜인 것을 사람들로 믿게 하시기 위하여 초대교회들을 통하여 이런 여러 가지 기적들과 은사들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함께 증언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친히 선포된 “구원의 말씀”은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증거”되었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각 신자의 심령과 삶 속에 실제적으로 체험된 표적과 기사들이며, 그 구원은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온갖 성령의 역사와 은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증되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고통, 세상의 환난, 마귀의 시험 등등의 강력한 도전 앞에서도 “구원 신앙”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잡게 해 주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입니다.
나 자신의 인내력이나 열성이나 노력이나 간절함이 그 구원의 확신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성령께서 지금 그 사람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결론}***
여러분!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 중에 “ 흘러 떠내려가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1. 신앙의 표류를 깨닫게 해 주는 기준은 “성경 말씀”입니다(1-2절).
2. 신앙의 표류를 붙잡아 주는 중심은 “구원의 확신”입니다(3절).
3. 신앙의 표류를 막아 주는 힘은 “성령의 능력”입니다(4절).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구원의 확신”을 중심으로 붙잡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함으로써 이 압도적인 “불신앙의 조류”를 거슬러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말씀”에 더욱 주의를 집중하고 “예수 구원”의 감격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며 “교회 중심의 생활”을 통한 성령의 강권적인 힘을 입음으로써 끝내 “저편 하나님의 나라”의 영화의 자리에까지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히브리서2:1-4절 말씀입니다.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끝까지 승리하겠다는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