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대웅보전 뒤편 외벽의 벽화 속 부처님은
대웅보전 본존불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벽화의 조형감각이 현대회화와 흡사하다.
영조대왕의 효심 어린 보광사 아래 보리밥의 귀족 `시골보리밥집'
조선시대 훌륭한 왕을 꼽자면 둘째쯤에
21대 영조(1694~1776, 재위 1725~1776)가 있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다.
최숙빈은 임금의 '은총'를 입기 전에는 무수리였던 것으로 전한다.
무수리는 대궐에서 일하는 여자들 가운데 신분이 가장 낮다.
상궁이나 나인의 세숫물을 떠 나르고 빨래를 하는 소임이다.
영조는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콤플렉스가 많았다.
어머니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효자인 경우가 많은데 영조도 그랬다.
청와대 서쪽 궁정동에는 칠궁(七宮)이 있다.
이름은 궁이지만 궁은 아니다.
조선시대 왕(추존왕 포함)의 생모이면서 대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의 사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대표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여
전문가들이 상찬해 마지않는 곳인데 현재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1725년,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숙빈묘라 했다.
이것이 칠궁의 시초다.
임금의 어머니로 정비면 신위를 종묘에 모셔야 한다.
영조는 생모의 신위가 종묘로 가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이웃에 특별히 생모의 사당을 마련했다.
1908년 다섯 신위를 옮겨 오며 육궁이라 했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 신위가 더해지면서 칠궁이 됐다.
일곱 가운데 둘은 숙종의 후궁이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와,
영조의 이복형이자 선왕인 경종의 생모 장희빈이다.
숙종 20년 연잉군(뒤의 영조)을 낳은 최숙빈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5년 전인 숙종 44년(1719) 49세로 서거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생모가 죽자 무덤 가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봉했다.
사대부의 무덤은 묘(墓),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기타 왕족 무덤은 원(園)이다.
영조는 능으로 봉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듯하나
왕이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영조의 마음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소령원을 능으로 추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속셈을 알아차린 영조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생모의 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조가 오열했다는 기록은
실록에 몇 차례나 나온다.
건강이 안 좋아 소령원 거동을 만류하자 울고,
거동 시각을 급히 바꿔 신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아뢰자
행차 때마다 뒷말이 돈다며 눈물짓고….
소령원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다.
고양시 벽제에서 됫박고개를 넘어 보광사 앞에서 3㎞쯤 가다
영장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기산리 방향으로 1㎞ 더 가면
왼쪽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건너 숲 속에 소령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령원도 비공개 문화재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마을에는 영조와 소령원에 얽힌 많은 야화들이 전해온다.
조선시대 이곳은 깊은 산골이었다.
벽제에서 넘어오는 고개가 됫박고개인데
멀지 않은 곳에 용미리로 가는 혜음령 고개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혜음령에 도적과 맹수가 들끓어
해마다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도 임두령이 서울로 가다
도적패를 만나 혼내주는 장면 등 혜음령 얘기가 이따금 등장한다.
됫박고개는 지금도 혜음령보다 험하다.
유래담이 여러 가지다.
우선 고봉으로 퍼 놓은 됫박처럼 고개가 가파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6.25때 중공군이 많이 죽어 고개 아래로 흘러내린 피가
됫박으로 퍼낼 정도였기 때문에 그리 부르게 됐다고도 한다.
영조와 관련된 얘기도 있다.
영조가 생모 묘에 다닐 때 가마꾼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고개가 낮아지도록 "더 파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파기 고개'였는데 음이 변해
더팍고개→되팍고개→됫박고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깊은 산골의 생모 묘에 영조가 오래 머문 이유는
효심도 효심이지만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했을 때
그는 매우 병약했고 아들도 없었다.
그래서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피비린내 나는 정치투쟁을 거듭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왕세제는 몇 차례나 퇴위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영조는 철이 들면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묘살이를 핑계로 깊은 산중으로 몸을 감춘 것이다.
마을에 전하는 얘기로는 영조가 시묘살이를 하는 중에도
자객의 기습이 몇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 위험을 알렸고
마을에 장사가 숨어 지내다 자객들을 물리치곤 했다.
그래서 영조는 이 마을 사람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10만 5천평에 이르는 소령원은 규모나 조경 면에서
웬만한 왕릉에 빠지지 않는다.
특히 영조의 친필로 새겨 세운 입구의 신도비는(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어느 왕의 비보다 크다.
비석의 귀부(돌거북)는 나라 안에서 손꼽힐 정도로 크다.
영조의 한이 그렇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야화에 따르면 보위에 오른 영조는 소령원이
'고령릉'이라 불리기를 원했고 고령산 일대에서 벌목을 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복으로 민정시찰에 나섰다.
독립문 밖 무악재에 앉아 쉬다가 근심 어린 표정의 노인을 만났다.
영조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뭐 하는 사람이신가."
노인이 답했다.
"고령릉에서 온 숯쟁입니다.
고령릉이란 말에 영조는 흠칫 놀랐다.
물론 속으론 감동의 도가니였다.
"고령산에 능이 있단 말이오?"
"있고 말고요. 주상전하의 생모 능이 있잖습니까."
영조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라도…?"
"벌목을 금해 숯도 못 굽고, 나무라도 팔아야 먹고살 텐데
나무도 안 팔려 이러고 있지요."
영조는 수행원에게 뒤따라가 나무를 다 사주고
다음날 오전 대궐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노인은 영문도 모른 채 대궐 조회 자리 한가운데로 이끌려 갔다.
가까이서 보니 용상에 앉아 있는 분은 어제 무악재에서 본 그 얼굴이 아닌가.
노인은 '이젠 죽었구나' 하고 벌벌 떨며 그저 엎드려 있었다.
임금은 만조백관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겁에 질린 노인이 답했다.
"고령릉에서 왔습니다. 하지 말라는 나무 해다 판 죄밖엔 없습니다."
영조가 말했다.
"저런 배움 없는 백성도 능이라 하거늘 경들은 어찌 안 된다고만 하는가."
신하들은 말이 없었다. 임금이 노인에게 물었다.
"소원이 뭔가."
"능참봉이나…."
영조는 노인에게 능참봉 직을 내리고
능 주변의 꽤 넓은 산을 하사하며 숯을 굽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노인의 후손이 지금도 소령원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확인은 안 해 봤지만).
영조는 소령원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고령사를
생모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절 이름을 보광사로 고치고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大雄寶殿' 현판을 써 줬다.
현재의 대웅전과 현판이 그것이다.
대웅전 둘레의 벽은 다른 곳과 다르게
흙벽이 아니라 나무 판인데 벽화가 참 이채롭다.
흔히 보는 탱화와 다른 민화풍으로,
언제 그렸는지 조형감각이 매우 현대적이다.
특히 뒷벽 오른편의 연지(蓮池) 그림은
현대 회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표현기법이 독특하다.
연꽃 봉오리에는 부처님들이,
작은 연잎에는 아기동자들이 부처님을 우러러보고 있다.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천진무구한 모습들이어서
늘 앞에 두고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길 정도다.
자세히 보면 그리다 만 꽃들도 있어 궁금증이 더해진다.
동쪽 벽 가운데 칸의 민화풍 그림은 바둑이 비슷한 동물이
아기보살을 등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면서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듯한 표정이 앙증맞고
그림도 깔끔해 사진에 담아 가는 사람들이 많다.
대웅보전 동쪽의 원통전은 최근에 중건하고 벽화도 새로 그렸는데
이 또한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그림이다.
서쪽 벽의 경우, 1980~90년대 운동권의 걸개그림 같은 화풍으로
민족통일과 겨레의 화합를 주제로 담고 있다.
20세기 스타일의 탱화라는 평을 듣는다.
원통전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서 있다.
깊었던 영조의 효심을 증언이라도 하려는 듯
강건한 수세(樹勢)로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향나무 뒤에 있는 어실각(御室閣)은 숙빈 최씨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놓쳐서는 안될 보광사의 보물은 종각에 걸려 있는 목어다.
원래는 만세루 추녀에 걸려 있던 것을 만세루를 보수할 때 종각으로 옮겼다.
여의주를 물고 귀와 뿔까지 우뚝해 상상 속의 용이 살아 온 듯한 형상이다.
새롭고 이채로운 벽화나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한 목어에서 보듯,
우리 문화사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진경시대의 성군(聖君) 영조의 원찰답게,
보광사 곳곳엔 진경시대 예술정신이 배어 있다.
보광사로 올라가다 영묘사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 있는 약수도 명물이다.
수질검사표를 보면 각종 검사항목 대부분이 '불검출'이고
수소이온농도(PH) 7.1로 약알칼리성이다.
식수로 가장 적합한 수소이온농도는 7.0이라고 한다.
유량이 많다고 좋은 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물맛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보광사는 또 우리나라 실천불교운동의 한 중심이다.
절 입구 왼쪽 언덕의 '戀友之石'이라고 새긴 비석이 그 기념비다.
'벗을 그리는 돌'이라는 뜻이다.
실천불교운동을 함께 전개하다 먼저 입적한 종태 스님을 기리며
종태 스님의 본사인 구례 화엄사의 돌을 가져다 도반들의 마음을 새겨
불기 2540년(서기 1996)에 실천불교 전국승가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15~16년 전쯤 보광사에 오가던 사람들은
일주문 밖 노점에서 평상 펼쳐 놓고 팔던 보리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벌교가 고향인 이 동네 아주머니가 그저 손님들이 해 달라는 대로
보리밥을 지어 열무김치와 이런 저런 나물과 함께 내놓던,
꾸밈없고 깔끔하면서 입에 붙던 그 맛,
그 밥상에 대한 기억이다.
정해진 값도 없었다. 손님이 주는 대로 받았다.
아주머니는 나향자(羅香子·60)씨.
벌교에서 보광사 아래로 시집 온 친구에게 놀러 왔다가
남편 박인형(朴寅亨·66)씨를 만나 이 마을 사람이 됐다.
음식장사를 하기 전에도 워낙 솜씨가 알려져
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올라가 음식 일을 돕곤 했다.
그러다가 반쯤은 심심풀이로 1985~1986년부터
절 앞 길가에 평상 펼치고 노점 음식점을 열었다.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리자 1989년부터 3대를 살아온 살림집을 고쳐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시골보리밥집'이라고 간판도 달았다.
지금의 음식점 자리다. 일이 잘되느라 그랬는지
마침 집 옆으로 보광사 계곡에서 흘러 온 보광천이
좁고 긴 협곡을 이루며 지나가 입지도 그만이었다.
춥지 않은 계절에는 계곡에 그늘막을 치고 평상을 놓으면
수십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손님들도 1등석으로 꼽으며 좋아하는 자리다.
다만, 워낙 자리가 좋으니까 손님들이 막무가내로 고스톱판 벌이고
노래방 기계 빌려 달라고 떼쓸 때는 난감하다고 한다.
장사가 잘돼 5년마다 건물을 한 채씩 지었다.
1998년에는 이웃에서 갈비집을 운영하던 장남 박석은(朴奭恩·40)씨가
갈비집을 접고 합류해 지금은 경영을 도맡고 있다.
갈비집과 보리밥집 중 어느 쪽이 수입이 나았느냐고 묻자
겸연쩍은 표정의 박씨는 보리밥집이 나았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성공의 조건은 특별하지 않았다. 좋은 재료와 정직한 음식뿐이다.
보리밥 상에는 보통 20가지의 채소가 올라온다.
대부분의 채소는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이다.
음식점에서 멀지 않은 1천2백평의 밭에서 직접 기르는 것이다.
朴씨 부자는 매일, 손님이 적은 오전과 오후 3시 이후에는
밭에 나가 야채를 가꾼다.
야채 다음으로 중요한 장과 기름 모두 주인 아주머니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전라도 김제의 친척이 사는 동네에서 매년 콩 20가마니를 사다가 메주로 쑨다.
집에서 띄워 직접 장을 담근다.
다른 가족들은 도와주기만 할 뿐 몸이 불편해도 모든 과정을 여주인이 손수 한다.
한해 3천5백근쯤 사용하는 고추는 전라북도 고창산을 쓴다.
여주인은 고추 철이 되면 아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수확부터 건조까지 직접 챙겨 저장해 두고 사용한다.
그 가운데 1천5백근 정도는 고추장을 담그는 데 쓴다.
고추장 또한 여주인의 손끝에서 맛이 익는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기 때문에 맛도 전통적일 수밖에 없는데
신세대는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중장년들은 맛있어 한단다.
그리고 맛을 마무리하는 기름. 이 집에서는 들기름만 사용한다.
개운하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얕은 맛"이 나물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들깨는 7~8년째 김제 어느 마을의 생산량을 모두 사 놓고 1년을 쓴다.
필요할 때마다 기름을 짜 택배로 받는다.
이제는 이골이 난 농민들이 연락을 안 해도 때맞춰 기름을 짜서 보내 준다.
기름 보내라는 연락을 오래 안 하면 장사가 잘 안되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할 정도다.
밥상에 올라오는 야채는 철 따라 약간씩 달라지지만 대략 20가지다.
쌈은 상추, 호박잎, 데친 양배추, 풋고추 등 4가지가 오른다.
쌈장은 여주인이 직접 담가 양념을 다시 한 고추장과 된장이 따로 나온다.
비빔용 나물은 데쳐 소금과 기름으로 한번 무친 것들로 콩
나물, 고사리, 부추, 참비름, 애호박, 청경채, 가지 등 7가지다.
아이스크림을 퍼 담은 듯 한가지씩 동글동글 뭉쳐 한 접시로 낸다.
상추 겉절이는 실파, 채친 당근과 양파를 구성지게 섞고 기름도 넉넉히 둘러 버무렸다.
배추와 열무를 섞어 새우젓국으로 맛을 낸 겉절이도 맛이 깔끔하다.
얇게 저민 오이와 부추를 섞어 무친 무 생채도 보리밥과 잘 어울린다.
거기다 머윗대 나물,
매콤한 맛이 나는 독특한 오이 피클
(오이 대신 마늘이나 풋고추를 절여서 낼 때도 있고, 3가지를 함께 낼 때도 있다),
삭힌 고추지 무침(때론 메추리알 크기의 알감자 조림),
멸치로만 맛을 낸 호박·
두부 된장찌개가 더 차려진다.
그리고 보리밥에 빼놓을 수 없는 열무김치.
열무김치는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담갔다.
국수대접에 얼음을 동동 띄워 내는데
간은 삼삼하고 알맞게 익은 맛이 부드러워 자꾸 숟가락이 간다.
밥은 완전 꽁보리밥과 쌀-보리 반반 중 식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차려진 상을 보면 웬만한 한정식 집 큰상이 부럽지 않다.
상이 차려지면 먼저 비비지 말고 나물 하나 하나를 따로 맛보는 것이 좋다.
이때 주의할 것은 밥은 조금 먹고 나물이나 쌈을 많이 먹어야 한다.
차려진 나물들이 워낙 풍성하기 때문이다.
나물 순례가 끝나면 비벼서 먹는다.
나물마다 이미 간이 되어 있으므로 된장찌개나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지 말아야 한다.
비벼 놓으면 풍성한 나물들 사이로 밥알은 드문드문하다.
치렁치렁 나물이 넘치도록 푸짐하게 한 숟가락 떠 입 안 가득
우물우물 씹으면 한민족의 비빔밥만 낼 수 있는 맛!.
아삭한 나물과 나물이, 나물과 밥이, 된장 맛과 고추장 맛이,
기름 향과 야채 향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며 어우러지는
오묘한 하모니엔 말이 필요없다.
혀가 맛에 둔해질 무렵,
비빈 보리밥을 데친 양배추와 호박잎 겹으로 깔고
풋고추 손으로 뚝 분질러 얹어 한 쌈에 싸 먹어도 별미다.
상차림에서 이미 눈으로 본 대로 전체적으로 음식 맛은 정갈하고 담백하며,
화학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아 뒷맛도 깔끔하다.
유기농으로 가꾼 푸짐한 야채에 풍성한 맛,
이쯤되면 밥이라기보다는 보약에 가깝다.
"5년 동안 값(1인 6천원)을 올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떤 손님들은 멸치 꽁댕이 하나도 안 올라왔는데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항의해요.
요즘은 야채가 풍부한 철이니까 조금 낫지만
겨울엔 야채도 귀하고 손님도 적어 밑지는 장사하는 날이 많아요."
'시골보리밥집'은 8월이 성수기다.
그 다음엔 가을 단풍철과 봄 새싹 나올 때 손님이 많다.
보광사가 있는 고령산 일대는 나무의 바다(樹海)라 할만큼 활엽수 숲이 우거져
새순이 돋는 초봄이나 단풍드는 가을 풍경이 그만이다.
장흥이나 기산리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로도 좋다.
대중교통은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보광사를 거쳐
금촌까지 오가는 33번이 30~3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광화문, 시청, 서울역, 경찰청 앞에서 158-3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양 삼거리에서 내려(바로 앞이 택시회사) 택시를 타면 10분(6천원).
158-3번 버스 종점에서 주인에게 전화를 하면
바쁘지 않거나 손님이 많으면 승합차가 나온다. (2003년 8월 취재)
. 주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2리
. 위치: 고양시 고양 삼거리에서 우회전, 158-3번 버스종점 지나 고개를 넘으면(3㎞)
보광사가 나온다. 고개 넘어 다리 건너기 전(보광사 일주문 맞은편)
좌회전해 100m쯤 들어간다.
버스 종점에서 전화하면 주인이 바쁘지 않을 때는 승합차가 오기도 한다.
. 전화: 031-948-7169, 946-0173, 017-224-609
. 주메뉴: 시골보리밥(6천원), 오리구이(3만5천원)-탕(3만원), 토종닭(3만원),
손두부·녹두전(5천원), 도토리묵(6천원)
. 영업시간: 설-추석 하루씩만 쉼. 오전 11시∼밤 9시
. 좌석: 250석(겨울엔 120석)
. 주차: 주차장 넓음.
▶사진설명:일곱 가지 나물이 소담스럽고 정갈하게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사진설명:한정식 큰 상이 부럽지 않게 잘 차려진 시골보리밥집 보리밥 한 상.
첫댓글 모 청장(?)은, 한치 혀바닥으로.현존권력 앞에서 <정조대왕>과 동격이란 말로 아부를 했던데....우리모임 에서도 그분모친(?)사당을 지어줘야 점수를 따지 않을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