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영수 여사의 일화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할 때.일 국의 대통령으로서 전세기 하나 없는 그
초라한 모습으로 김포공항을 출국했다.그때 박정희대통령의 서러움이 얼마나 사무
쳤을까...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나라가 살 만 하니까 노무현대통령도,김대중대통령도 유럽을 방문하니, 노벨
상을 받으러 가니.. 태극마크도 선명한 겨레의 날개를 타고 자랑스럽게 거들먹 거리
고 있지만 당시 그 서럽고 모멸투성이의, 그것도 남의 나라가 동정하듯 보내준 비행
기를 얻어타고 돈 빌러 가는 박대통령 내외.. 그 서럽고 한맺힌 여행을 우리 후세들
이 어떻게 필설로 표현해야 하나..
나환자촌 방문(1970.6.17)
방독중에 일어난 다른 장황한 이야기는 이미 다들 잘 아실 것이니까 빼기로 하자.
방독을 앞 둔 청와대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듯이(?) 아우성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인 본관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다른 기록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관이던 살림채
에서 육영수여사와 관계되는 기록은 지금까지 전무하다고 한다.
당시 박대통령을 이모부라 부르는 여인(이름 생략)의 자필서를 잠간 보자.
모든 준비는 완벽할 정도로 되었다. 육여사의 머리는 갈현동에서 미장원을 한다는
서 모씨가 담당을 하고, 종로 네거리 신신백화점 앞에서 주단집을 하는 윤 모씨가
한복을 담당하기로 했었다.그리고 구두는 칠성양화에서 제작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육여사가 들고 갈 마땅한 핸드백이 없다.얼마 전,북에서 온 미녀응
원단들 처럼 지들 국제적으로 강냉이 원조받는 주제파악도 못한체 이브생 로랑이
라는 어울리지 않은 명품을 들고 갈수도 없고...
육여사의 수행담당 의전수석이었던 한경희 여사는 무척 고민을 하지 않을수가 없
었다. 당시 국내 굴지의 백화점 재벌로 일컫던 P씨의 부인이 해외 여행중 특별히
사 온 것이라며,이번 여행에 육여사님이 들고 가시면 좋겠다고 당시 세계 최고급
명품을 선물로 내놓긴 했지만 과연 여사님이 좋아 할지 어떨지.. 걱정이었다.그러
나 그렇더라도 선물한 사람의 성의도 있고 해서 육여사께 일단 말씀을 드렸다.
"여사님, 다른 것은 다 되었는데 정작 핸드백과 구두가.. 외국의 원수를 접견 하시
려면 많이 걸을수도 있는데 국산구두는 가죽의 신축성이 없어서 발이 많이 아프
실텐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육영수 여사는,
"한복이 덮으니까...구두는 그만하면 되었어요. 제 발이 조금 아프더라도 참아야지
어떡하겠어요? 그리고 핸드백은...."하며 잠시 생각하던 육여사는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한복에는 구슬빽에 제일 수수하잖아요? 이대 입구에서 내
려 대흥동쪽으로 가면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청실홍실이라는 구슬빽 가게가
있는데....거기 가셔서 한복 색갈에 맞추어 두 개만 사다 주시면 되겠네요."
한경희여사는 불이나케 청와대 짚차를 타고 이대입구 대흥동에 도착, 이대입구를
바라보니 과연 정확하게 다섯 번 째 간판이 청실홍실이었다고 한다.
육여사의 기억력이 그만큼 좋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한 편으론,육영수 여사가 이
나라 서민들의 시장골목에 대한 애증을 맘속 깊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그 증거이기
도 했다.
파월용사 가정 방문(1968.3)
그런데 독일에서,드디어 문제는 구두에서 터졌다.서독 대통령의 연회석이니 육여
사도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하루종일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여기도 좋네요, 저기도 참 아름답네요. 독일이란 나라는 분더발이네요.]라며 알
랑방귀를 뀌어야 할 것 아닌가.돈 빌러 간 주제이니..
그런데 여사의 구두가 신축성이 없어서 발이 부르트기 시작한 것이다.이미 둘 째날
저녁에 호텔인 숙소로 돌아와서 보니까 발이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부랴
부랴 찬 물을 떠다가 발을 담그고...소금을 부어야 한다느니, 익지않은 바나나를 잘
게 썰어 넣어야 한다느니 부산을 떨고 있었다.
결국은 안되겠다 싶었던 한경희 여사가 우선 급한대로 근처의 구둣가게에 가서 구
두를 한컬레 사 와야겠다 생각하고 막 사람을 내 보내려는데 육여사가,
"안되요, 절대로 안되요"하며 막무가내로 막었다고 한다.
"여보세요, 정신들 차리세요! 내가 독일에 와서 구두나 사 신었다면 우리나라의 야
당사람들이 애기아빠를 어떻게 보겠어요? 무슨 돈이 많아서 샤핑이나 다닌 것으로
치부 해 버릴것이 분명하잖아요? 그리고, 또 이 나라(독일)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 할 거냐구요..? 쥐뿔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돈 빌러 온 주제에 무슨 넘의 샤
핑이냐며 낼 아침 신문에 대서특필 할 것 아녜요? 당장 중지하세요!"
육여사의 그 추상같은 명이 내려지는 순간,한경희 여사를 비롯한 모든 수행원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쏘다지기 시작했다.
"여사님...!"
"여사님...!"
일행중 한 명이 또 다시 나가서 찬물을 떠오고 소금을 풀었다.몰래 사온 설익은 바
나나를 잘게 썰어서 찬물에 섞고 나서는 한여사가 직접 육여사의 발을 주물렀다.
그리고 다음날은 독일대통령과의 마지막 만찬이 있었다.거기에는 대한민국의 간호
사, 광부들이 모여와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그 행사 말이다.
그런데 왠걸? 한경희여사는 육여사님가 혹시나 발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독일대통령부부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게 될텐데....걱정이 태산 같
아서 맘을 졸이고 있었는데,육여사는 아주 가볍게 그리고 아주 경쾌하게 걸음을 옮
기더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총칼로 정권을 빼았은...." 이라며 남아
있었던 오기가 스르르 사라지고 있었다.
"여사님이야 말로 우리민족에게는 하늘이 나리신 선물이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
이다.바로 이 장면, 이 현장에서 한경희 여사는 "내 한 목숨 다 바쳐서 저 분을 모시
리라....!" 굳게 맹세를 했다고 한다.
한양대학교 방문
대한민국 간호사, 광부들의 그 서러운 눈물과 한의 눈물이 범벅이 되던 날, 마지막
만찬이 끝이 났다.뤼뷔케수상 내외분과 나란히 한 차에 타고는 박대통령 내외분이
묵고있는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그런데 뤼뷔케수상 부인이 유난히도 육여사의
핸드백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지난 삼사일 간 방문일정 내내 육여사의 가슴에는 언
제든지 신체의 일부이듯 아주 소중하게 들려져 있던 그 핸드백에 호기심이 갔다.
보잘 것 없이 조악한 구슬이지만 그것을 감치고,재치고,메이고, 되돌리고...神이 준
손 재주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정교하게 맺어질 수가 없는 수많은 구슬들의 순열을
본 것이다.이윽고 독일수상 부인이 말을 건넸다.
"저희 나라에 이것(구슬백)도 수출을 해 보시지요. 한국이 아직은 화공(化工) 기술
이 발달치 않아,구슬의 색갈은 쉬 변하겠지만 이 정도의 손재주라면 독일산 구슬에
꿰면 아주 진귀한 명품이 되리라 확신하는데 여사님의 의견을 어떠한지요.."
독일 말을 정확히 못 알아 들은 육여사는 수출이라는 말에만 신경을 쓰고 "당케,당
케!"라고 하였는데,바로 옆자리에서 수행하던 독일어를 아는 여인(박대통령을 이모
부라고 부른다는..)은 그 말을 알아 듣고서 뛸 듯이 기뻤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육여사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대뜸,
"쿼터는 얼마를 줄 것이며 수량은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독일어로 직접 물었다.
그러자, 수상부인은
"이것은 장식품으로서 수입 쿼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독일산 구슬을 써서 만
드는 한국에서 만드는 구슬빽은 수량 제한없이 독일에 수출할 수 있도록 조치 할수
있겠네요.."
이 말을 한국말로 통역을 받은 육여사는 너무나 기쁜나머지 얼굴이 발그랗게 달아
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져 허릴없이 자동차의 안전벨트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 해,인천에 연안부두가 생기기 전,그야말로 황량한 인천항의 초라한 선적
장.당시 72명의 여공을 24시간 총 동원해서 대한민국 중소기업 역사상 최초로,유
래없이 수출 12만US달라를 기록하는 "청실홍실"의 유홍실(석?..확인요)사장의 눈
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록 오늘은 독일산 구슬에 의한 주문생산이었을 망정,내일은 우리가 직접만든 구
슬로 핸드백을 만들어 세계를 누비리라.....!
"우리도 할수 있다!" "하면 된다!" 라는 강한 신념이 생겼고 며칠 후 청와대를 찾은
유홍실 사장은 박대통령 앞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각하! 우리도 할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훗날 이 말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어록에 실린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이것 아닌가..?
오늘날 유럽으로 수출되는 우리나라 수예공품의 액수는 벌써 몇 억불에 이르는데
그 초석을 바로 육여사가 놓은 것이다.
서독
방문(1964.12.6)
그리고 또 한 가지는,누군가 우리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닦을 때 남들도 알아
준다는 하늘의 법칙을 말하고 싶다.
당시 만 몇백환(화폐개혁후 천원에 해당)하던 보잘 것 없는 그 구슬빽도 이나라의
국모였던 육여사가 아끼고 애지중지 항상 옆구리에 끼고 살았고, 그 모습이 또한
아름다웠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공예품이 전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이게 바로 경제 아닌가..!
이 나라 이 민족의 내일를 가늠할 줄 아는 통치자가 아니라면 과연 그 누가? 대북
무상원조를 하고 전기를 주고, 비료를 주고..조금은 풍요하달 수 있는 오늘날의 이
경제를 누가 만들은 것이던가, 누가? 누가 이룩한 경제의 열매인가...
오죽이나 분통이 터지면 대한민국 경산의 한 잡화상주인이 자신의 상호를
"박대통령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라고 써 붙였을까..?
(viva-corea 참조)
++++
마지막으로,이제 8순을 헤아리는 한경희 여사, 아직도 열흘에 한 번,혹은 달포에
한 번.육여사의 묘소를 찾아 행여 잔디가 상했을까,행여 주석(柱石)이 휘었을까..
노심초사 한다고 한다.
남자들 끼리만 피를 나누는 우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게 아니다. 여자들 간의 우정,
그리고 의리.남자들처럼 말은 번드르르르..는 못하지만 그 농도는 피보다 더 진한
것이라 한다.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현충원에 가서 지키고 있다가 한경희 여사를
한 번 만나보는 일이다..
[출처: 조선닷컴]
육영수 여사 생전 동영상
[1973~1974]
첫댓글 좋은글 감사함다 가슴이 져며오는군요,,, 부천에서,,,
육영수 여사님의 생전에 공덕은 모든 국민이 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부산갈매기님의 잘 정리 된 글 감사히 읽습니다.
정말 감명깊게 잘보았습니다 언제보아도 다정다감 하시고 인자하신 육영수 여사님 겨례의 꽃입니다 부산갈매기님 정말 감사합니다
참잘보았습니다.너무나훌륭하신분입니다.
우린 여사님 서거하신날 얼마나 슬퍼했는지 온화한 모습으로 우리 국민을 사랑하셨는지 우린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생전모습보니 마음 아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