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백지동맹’ 사건의 주역, 최순덕 선생 별세
1929년 학생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백지동맹’ 사건의 주역이신 최순덕 선생께서 22일 오전 10시경 별세하셨기에 알립니다.
▲ 최순덕(崔順德)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여고보(현재의 전남여고) ‘백지동맹’ 투쟁 사건의 주역. 당시 3학년 재학 중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최순덕 선생은 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일본 학생들과의 시비가 도화선이 돼 발발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11월 3일 광주역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가전이 벌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치마폭에 돌을 나르며 남학생들의 시위대에 전달하는 등 반일시위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최 선생은 이날 대규모의 시위 과정에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체포․구속되자, 이에 반발해 11월 10일부터 치러질 예정이었던 중간고사를 전면 거부하는 것으로 일제에 온 몸으로 항거했다.
전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던 선배들로부터 시험거부 투쟁을 일으킬 것을 전달받은 최 선생은, 거사가 사전에 발각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이날 밤 집으로 귀가하지 않고 절친한 동급생 집으로 찾아들었다.
이날 밤 동급생과 함께 ‘구속학생 석방과 조선 독립을 위해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고 연필도 들지 말자’는 내용의 백지동맹 호소문 150여장을 밤새워 미리 작성한 최 선생은 시험 당일 날이 밝자 마자, 학교에 미리 가 삐라를 책상 안 서랍에 넣는 방식으로 이날 있 을 ‘거사’를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1교시 시험이 시작되자 각급 교실 연단을 일일이 돌며 투쟁을 호소했고, 이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 교생이 단 한명도 예외 없이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들은 곧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무려 1주일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항의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투쟁은 당시 유교적 사고가 지배한 사회에서 연약한 소녀들이 일제에 맞서 벌일 수 있었던 최대의 투쟁 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발발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어 “핵심적으로 참여했던 200여명의 학생들 중 100여명은 일제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해 후손들까지 찾을 길이 없다”며 “당시 평양 등 전국 194개 학교에서 참여한 것으로 알고
학교 당국은 결국 그해 11월 17일 학년 반장을 맡았던 주동자 최순덕 선생과 가담자 46명을 무기정학 처분했으며,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듬해 1월 30일 결국 첫 번째로 강제 퇴학 처분했다. 광주여고보 최초의 강제 퇴학생이었던 최 선생은 1954년 뒤 늦게 그 공로가 인정돼 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이 수여됐다.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 시대에 일어난 3대 항일운동 중의 하나로 광주가 도화선이 돼 전국적으로 번져, 당시 194개 학교 조선학생의 절반이 넘는 5만4천여명이 이 항쟁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기본 사항
1911년생(올해 103세). 슬하에 6남 1녀 남김.
○ 유족
이재균(이재균 치과 원장) 이재민(전 광주광역시부교육감. 현 순천향대학교 교수)
○ 장지
담양 천주교묘역
○ 빈소
한국병원(쌍촌동) 장례식장 1호실
○ 발인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오전 8시
○ 연락처
☎062-380-3444, 011-605-9601(이재균)
▲ 가운데 고 최순덕 선생, 오른쪽 이금주 회장님
첫댓글 삼가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안타까운 소식이군요. 삼가 명복을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