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주 )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창세전 언약을 믿습니다(엡 1:3-6, 딛 1:2).
그러나 이 죄인은 그 언약을 나의 뜻대로 생각하여 자유한다고 하면서 방종의 삶에 이용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죄과를 내가 아오니 이런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그저 나를 죽여주옵소서.
오늘은 10월의 첫날이며 주일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옛 사람의 속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의 심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난하여져서 나를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역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이 하나님의 공의는 나를 처단하는 칼이오나 그렇게 죽을 때 주님의 은혜가 나를 덮는 진정한 십자가가 되어 나를 살리는 줄 믿습니다.
땅의 것 곧 만물 안의 것에 매몰되지 않고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1-19
제목 : 이기적인 신앙에서 이타적인 신앙으로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18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 나의 묵상
잠언은 솔로몬 외에도 여러 사람이 썼지만 주로 솔로몬의 잠언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의 이름은 아버지 다윗이 지어주었다.
솔로몬의 뜻은 ‘샬롬’으로서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살아온 아버지 다윗의 평안을 추구하는 간절한 바램이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솔로몬이란 이름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과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 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심판을 통하여 다시금 공의가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앙고백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솔로몬에게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외에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여디디야’로서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과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 등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견디기 힘든 심판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를 병들어 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치심으로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다윗은 땅에 엎드려 금식하며 아이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7일 만에 죽자 그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었다.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합리화 하고 변명하여 그 결과에 대해서 벗어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다윗은 단번에 하나님의 심판은 옳다고 인정한다.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심판은 받으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기꺼이 수용하는 다윗을 기뻐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여디디야’라고 지어주신 것이다.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거칠고 아프지만, 그 심판의 결과 의를 세우고 의의 결과 솔로몬(샬롬), 즉 평화가 임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하였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쉐마하는 순종의 마음으로 ‘듣는 마음’을 구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광도 받았다.
(대하 1:12)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이로 인하여 솔로몬은 한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쉐마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런데 나라가 굳건하게 세워지고 기강이 잡히자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쉐마하기 보다는 이방 여인들의 말을 쉐마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는 통치 말년에 다시금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의 경험을 토대로 이 잠언과 전도서를 쓰게 되는데 전도서를 시작하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잠언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나온다고도 고백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본들 모든 것이 헛될 뿐임을 실증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또한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그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과 사람의 지혜는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식만이 참된 것임을 그는 신앙고백적으로 말하고 있다.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오늘날 젊은 사람들의 지식은 나이 든 어른들이 따라갈 수가 없다.
그들의 지식의 양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정말 그들이 연구하고 깊이 고민하며 사색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서핑하여 얻은 얄팍한 지식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얄팍한 지식이라도 지식은 이러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지혜는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기에 아무리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 시대라 할지라도 참 지혜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솔로몬과 같은 현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얻은 참된 지혜서인 잠언을 기록하면서 이것을 통하여 지혜와 훈계 및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지혜 있는 자는 더 지혜롭게, 명철한 자는 더 명철하도록 모략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문제는 솔로몬에 비해 인생의 후배인 우리들이 솔로몬의 이와 같은 잠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그토록 몸부림치면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그지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는 일에 너무 소홀하며, 요즘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마치 고루한 사람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이는 누구랄 것도 없이 내가 바로 그런 자였음을 고백한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고 지식을 고루 갖추기를 원하면서도 지혜와 지식의 보고인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했던 자이다.
물론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대부분이 땅의 것을 구하며 만물 안에 신앙의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나의 이기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계획한 것, 내가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그것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것을 받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고백하고, 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면서 신앙이 흔들리고 혼미해지기 일쑤였다.
쇠락의 법칙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만물 안의 세계에 신앙의 근거를 두고, 만물 안에 갇힌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그 신앙이 온전할 리 만무한 것이다.
이제 나는 만물 안에 근거를 두었던 신앙에서 벗어나 만물 위로 올라간다.
나의 신앙은 만물 안에 갇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앙하여 현실에서 내게 닥치는 어떠한 상황이든지 수용하며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이기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주님의 도구로 드리는 이타적인 신앙으로 바뀌었다.
나에게든지 아니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든지 고난이 닥친다 해도 그것이 그를 진멸하고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임을 알고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는 기회로 삼는다.
고난은 비록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지만 거칠고 투박한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은 장사됨이라는 무덤을 통하여 말씀 속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짐으로 의를 세우는 복음, 즉 장사복음의 핵심이다.
나에게는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 즉 파레시아가 있다.
다 빼앗길지라도 이것만은 빼앗길 수 없기에 내 안에 아들을 힘입는 파레시아는 나의 최후의 보루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부터 잠언을 묵상합니다.
성경의 잠언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금언집(金言集)이 아닙니다.
이 말씀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하여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참된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이 주신 복음 안으로 들어가 말씀으로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도 하늘문을 여시어 이 종이 주님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내 영이 주님으로 인하여 자유하며 춤을 추오니 나를 받으소서.
내게 주신 주의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