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만드는 노동을 기쁨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이렇게 갖은 정성이 깃든 음식을 어찌 엄두나 내겠나. 남원 사람들 즐겨 먹던 음식엔 특별히 손이 많이 간다. 이 지역 사람들도 은근한 자랑으로 여기는 눈치다.
추어탕이야 남원 사람들도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번 고개를 젓는다.
추어탕 정도는 집집마다 손쉽게 해 먹는 음식이며 그깟 것 일도 아니라는 눈치.
“예전엔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일만 있으면 체와 바가지 들고 논두렁에 나갔어요.” 추어탕에 쓸 시래기 한 뭉치 부엌 바가지에 물 받아 담가 놓고는 미꾸리 잡으러 논으로 바삐 뛰어갔을 남원의 옛 아낙들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추어탕 하나를 끓여도 꼭 쌀뜨물에 생들깨를 갈아 그 물을 육수로 쓰고 고춧가루 대신 고추와 마늘, 생강 등을 섞어 갈아 양념을 만들어 쓴단다.
음식 맛에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도 남원에선 집집마다 멸치젓을 한두 짝씩 담갔다가 그걸로 김치를 담근다.
엿기름에 고두밥 넣고 아랫목에 두었다가 온종일 달여 조청도 만들고, 조청 만드는 날이면 도라지, 박, 동아(박의 일종) 등을 준비해 조청과 함께 달여 정과도 해둔다. 살림이 궁핍하지 않던 옛 남원의 어머니들은 아침부터 밤중까지 음식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조청이며 유과에 강정, 젓갈까지 손 많이 가는 것들을, 어렵게 일 삼지 않고 생활처럼 뚝딱 해낸 것이다.
그렇게 유별난 음식 정성에, 전통문화를 고수하려는 전라도 사람들의 의지가 깃들어 지금까지도 남원 지역 음식은 전통대로 잘 전수되어 오고 있는 편이다.
무밥에 고들빼기 김치로 차린 밥상
“어릴 적 추운 겨울날, 온기 많은 이불 속에서 새벽 단잠을 즐기고 있으면 머리맡에서 또각또각 도마질 소리가 들린다. 무를 쌀알처럼 잘게 써는 소리. 가족 중 제일 먼저 눈을 뜨신 어머니가 무밥을 준비하신다. 겨울철 차디찬 무를 부엌에서 썰다간 얼기 십상이니 우리들 자고 있는 방 안에서 혼자 도마질을 하시는 거다. 형편 넉넉하지 않던 옛날 사람들은 대개 밥에 무를 넣어 무밥을 먹었다. 무도 쌀처럼 보여 밥그릇 풍성하라고 일부러 잘게 잘게 쌀알처럼 썰었다.”
음식 시연을 해주신 전북음식연구회 홍순자 회장의 말이다. 배고프던 시절의 얘기지만 듣고 있으니 머리맡에서 또각거리는 도마질 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따스운 이불 속에서 엄마의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 ‘아, 아침밥 다 되려면 조금 더 자도 되겠네’ 생각하며 눈 붙이고 누워 있다면 그 잠이 얼마나 달까. 무밥에 들기름, 양념 간장만 있으면 쓱쓱 비벼 맛있게 한 그릇 뚝딱 먹는다. 남원 사람들 많이 먹는 고들빼기 김치와 머위나물, 매실 장아찌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다.
무밥
무에 아린 맛이 많이 나면 잘게 썬 무에 뜨거운 물을 한 번 끼얹어 아린 맛을 없앤 후 밥을 안친다. 이때 밥물은 조금 적게 잡을 것. 남원 지역에서는 무를 많이 먹는데, 채 썬 무를 말려 보관했다가 숭늉을 끓이기도 한다. 냄비에 기름 없이 볶다가 물을 붓고 끓여 먹는데, 옥수수차처럼 구수하다고.
머위나물
시골에 흔한 잎채소인 머위를 데쳐서 집된장, 참기름, 마늘을 넣고 무쳐 나물로 먹는다.
매실 장아찌
무르지 않고 유독 아삭거리는 매실 장아찌는 전북음식 연구회 홍순자씨가 직접 만들어 주문 판매를 하고 있다. 제철 매실을 소금에 절인 다음 일일이 씨를 빼고 설탕을 뿌려 버무려두었다가 일주일 후 물이 나오면 따라내기를 3번 반복해서 만든 것. 이 과정에서 저온 창고에 보관을 해야 발효가 되지 않아 식감이 좋다.
고들빼기 김치
남원에서 많이 먹는 고들빼기 김치는 소금물이나 쌀뜨물에 며칠 담가두어 씁쓸한 맛을 뺀 후 김치를 담근다.
남원 시장 구경
3월 중순, 남원 장엔 봄이 왔다. 살짝 데쳐 양념에 무쳐 먹는다는, 들꽃처럼 곱상한 연노란 무순, 쌉싸래한 머위 잎, 쑥과 쑥부쟁이, 달래의 향까지 죄다 반갑다. 5월이 되기 전 들가에 핀 것은 다 약이 돼, 밭에 난 풀을 먹어도 좋다는 소리에 약 되는 채소 한 봉지를 후딱 사본다. 남원 지역에는 17개 읍면이 있는데 그중 600m 고지대에 4개 면이 있다고 한다. 지리산 뱀사골도 남원 지역에 속한다. 대관령처럼 높은 고 지대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고산 지역 식재료는 모두 시장에 나온다고 보면 된다. 고산 지대의 흑돼지는 남원 지역의 소문난 먹을거리 중 하나. 고랭지 상추도 많이 나는데 뜯어 두어도 쉽게 무르지 않고 잎이 비들비들하지 않아 맛이 좋다.
토란, 고사리와 여름에 나는 하지 감자도 지리산 고산 지대에서 생산되는 것들. 남원은 곡창 지대도 넓지만 지리산과 인접해 있어 채소와 약재가 두루 풍성한 편이다. 남원의 명물 미꾸리, 인근 섬진강에서 잡아 건진 재첩도 남원 시장에서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시장의 가게마다 집에서 직접 만든 부각을 팔고 있다는 것. 남원 지역에서는 유독 부각을 밑반찬으로 많이 활용하는데 가죽잎 부각, 김 부각, 고추 부각 등 브랜드 이름 박히지 않은 봉지봉지 부각들이 가게마다 한 자리를 차지한다. 남원 시내의 상설 시장 중 가장 큰 곳은 용남시장. 공설시장은 4일, 9일마다 열리는 5일장이 가장 크게 열리는 곳이다.
1 남원에서는 호박고지보다 박고지를 더 흔히 볼 수 있다. 예쁘게 묶어두고 파는 박고지.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호박고지.
2 남원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꾸리와 미꾸라지.
3 지리산에서 나는 갖가지 한약재는 장날 공설시장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4 물에 담가둔 상태로 파는 건채나물들. 토란대와 고사리 등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육개장이나 보신탕, 돼지뼈국 등에 넣어 먹는다.
남원 오면 꼭 먹고 가는 추어와 박 음식
남원에서 단 하루를 보낼 거라면 그 점심 메뉴는 당연히 추어탕이다. 저녁까지 챙겨 먹고 하루 묵어 간다면 ‘박’을 주제로 한 상 푸짐하게 나오는 식당에 가보면 좋을 것이다. 어쩌면 별것 아닌 식재료일지 모를 ‘박’을 남원 사람들은 무던히 열심히도 챙겨 먹고 산다. 남원 지역에서 제사 때면 도라지, 고사리와 함께 상에 꼭 오른다는 건채 나물이 바로 박고지다. 외지 사람들은 남원을 ‘춘향’의 마을로만 기억하지만 ‘흥부전’의 발상지이기도 하기에 흥부전에 나오는 박이 다양한 음식으로 육성된 것이다. 여름에 나는 박의 하얀 속살을 돌려 깎아 널어 말리면 일 년 먹을 박고지가 만들어지는데 이 박고지로 연포탕, 들깨탕, 갈비찜, 나물, 정과 등 못 만드는 음식이 없다. 차례 지낼 때면 박고지와 고사리, 토란대를 들깨 양념으로 각각 나물이든 탕이든 만들어 먹는데 그 다음 날이면 토종닭 한 마리 푹 고아 이 세 가지 나물을 넣고 육개장을 끓여 먹었단다.
1 흑돼지 수육과 깻잎 장아찌
지리산 고산 지역에서 나는 흑돼지 역시 남원 지역의 대표 음식. 특이하게도 남원 지역에선 흑돼지 수육을 깻잎 장아찌에 싸 먹는다.
2 도라지, 박고지, 동아 정과
박의 일종이지만 더 큼직한 동아는 남원 지역에서 정과로 많이 만들어 먹는 재료. 박과 마찬가지로 동아도 속살만 저며내어 꼬막 껍데기 가루(석회 가루)에 버무린 다음 자박하게 물을 붓고 하루 두었다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박박 헹군다. 이 과정을 거치면 아삭아삭한 식감의 동아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엿기름으로 고아낸 조청을 넣고 은근한 불에 하루 종일 졸이면 동아 정과가 만들어지는 것. 생도라지는 그대로, 박고지는 물에 불렸다가 조청에 졸여 정과로 만든다.
바가지 비빔밥
말 그대로 바가지에 갖은 나물과 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바가지 비빔밥. 다른 재료는 일반 비빔밥과 같지만 남원 지역의 바가지 비빔밥에는 박고지나물이 들어간다. 박고지나물은 불린 박고지에 참기름과 깨, 마늘, 조선간장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만든다.
남원 전통 추어탕 만들기
남원의 명물 미꾸리는 소싸움에 나가는 소에게 먹였을 정도로 영양가 많은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