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국내 언론은 영국 대중지 더선의 보도를 인용해 오른손 떨림을 호소하던 70세 미국 남성이 뇌를 여는 수술을 받는 중에도 밴조 연주를 들려줬다고 보도한 일이 있었다. 밴더빌트 대학 메디컬센터에서 수술을 진행했는데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블루그래스 거장 에디 애드콕이었다.
그는 블루그래스 음악의 초기 형성기와 1970년대와 그 뒤 이를 혁신한 뉴그래스 운동에 다리를 놓은 에디 애드콕이 지난 19일 테네시주 레바논의 한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26일 전했다.
블루그래스 음악은 국내에는 생경한 장르인데 여느 컨트리 음악보다 빠른 템포에 다양한 현악기의 즉흥 연주, 강한 리듬을 특징으로 한다. 두세 명이 함께 하는 화음을 강조하는 것도 있다. 뉴그래스란 블루그래스 음악에 록의 리듬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시를 결합한 것이다.
에드워드 윈저 애드콕은 1938년 6월 21일 일곱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식구들 각자 하나씩 악기를 연주해 매일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이 낙이었다. 홈스쿨링을 할 정도로 외진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였다. 사춘기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날품팔이에 나섰다.
열다섯 살 때 에디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 밴조를 연주했다. 2년 뒤 맥 와이즈먼 앤드 더 컨트리 보이스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958년 빌 먼로 앤드 더 블루 그래스 보이스에 합류했다. 그래도 보수가 시원치 않자 자동차 정비나 트럭 운전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1958년 컨트리 젠틀멘을 결성해 대표 앨범 '투 리틀 보이스'를 녹음했다. 이 4인조와 10년 남짓 활동한 뒤 캘리포니아로 이주, '클린턴 스페셜'이란 컨트리 음악 밴드를 만들었다. 일 년 뒤 동부로 돌아와 만돌린 연주자 지미 고드로와 뉴그래스 앙상블 'll 제네레이션'을 만들었다. 1973년 마사 히어론을 만나 리듬 기타리스트로 합류하게 됐다.
3년 뒤 둘은 결혼해 듀오 '에디 앤드 마사 애드콕'으로, 아니면 다른 포맷으로도 무대와 스튜디오를 오가며 활동했다. 1989년 고인은 블루그래스 슈퍼 그룹 레코딩 '더 매스터스'에 함께 했다. 1996년 블루그래스 음악 명예의전당에 입회했다.
고인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한사코 밴조 연주 일인자 얼 스크럭스와 돈 레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초등학교 1학년 때 교사 폴린 메이요가 음악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줬다고 했다. 고인은 스코츠빌 먼슬리 인터뷰를 통해 "동네 밴드들이 연주하는 힐빌리(미국 남부의 교육 수준이 낮고 가난한 백인을 가리키는 말, J D 밴스 부통령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자서전이 '힐빌리의 노래'였다)와 심지어 스코츠빌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너머로 내 음악세계를 확장시키는 데 메이요가 날 촘촘하게 감싸준 모든 형태의 음악, 오페라와 재즈, 컨트리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돌아봤다.
유족으로 50년 가까이 해로한 마사와 전처 소생의 세 자녀를 남겼다. 여섯 피붙이 모두 먼저 세상을 등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