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부원귀, 권975,「외신부」〈交侵〉, 永徽五年十月 條에는 경관에 대한 다음 용례가 보입니다.
"654년 고구려는 당시 당의 지배를 받은 거란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전쟁은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으로 맞선 거란군에게 고구려군이 크게 패배를 했다. 거란군은 고구려군의 시체를 모아서 경관을 건설하고, 전쟁에서 이긴 사실을 당에 사신을 보내 알려주었다"
함마디로 말해서 경관은 적의 시체를 모아서 건설한 승리의 기념물입니다.
경관에 관한 첫 용례는 『춘추좌씨전』「선공(宣公) 12년조에 "君蓋築武軍, 而收晉尸以爲京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랜 풍습입니다.
자, 그런데 631년 당나라 사신 장손가 와서, 수나라 병사들을 해골을 거두어서 파묻고 그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다시 더 나아가 경관을 헐어버려 고구려인의 분노를 사게 했습니다.
여기서 고구려가 만든 경관은 당연히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자랑하기 위해 수나라군의 시체를 모아 만든 기념물입니다. 형태는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분명 탑이나 무덤과 같이 높게 쌓아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분명 평양 일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는 있는 장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612년 전투에서 고구려는 평양성 전투에서 내호아의 수나라 해군을 격파합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이 바로 영류왕이 된 건무장군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자신의 전공을 기념이라도 하듯 경관을 세웠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612년 전투에서 빈 절터에 복병을 숨겨놓았다가 기습해서 이겼다고 기록이 나오므로, 아마도 그 자리가 가장 경관을 세우기에 좋은 자리였을 것입니다.
첫댓글 경관에 대해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당의 일개 사신이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었는데 왜 고구려는 가만이 있었습니까? 당시 온건주의 영류왕 때문에 그런건가요?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