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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조선시대 ‘가평 조종암’ 어땠을까… 150년전 그림 공개
이애주 문화재단 ‘정석일-조종암도’ 공개
산세·하천·건물·바위 배치 사실적 묘사
조선후기 ‘숭명공간’ 이해 중요 자료 평가
지난달 30일 양정순 이애주 문화재단 상임이사가 ‘조종암도’ 작품 입수 배경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가평군 조종면 조종암 일대의 실경 그림이 150여 년 만에 공개돼 화제다.
이애주 문화재단(이하 재단)은 지난달 30일 북면 이애주 춤마당집에서 양정순 재단 상임이사·신동진 이사, 신용남 잠곡김육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철 가평학연구소 연구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석일-조종암도’(수묵담채, 41.2x30.5㎝)를 공개했다.
이애주 문화재단은 지난달 30일 북면 이애주 춤마당집에서 ‘정석일-조종암도’(수묵담채, 41.2x30.5㎝)를 공개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지난해 9월 ‘칸옥션 제39회 미술품경매’에서 재단이 낙찰받아 이날 공개한 조종암도는 가평 조종면의 역사적 명소인 조종암 일대의 산세와 하천, 건물과 바위의 배치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다.
1874년 정석일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조종암 일대를 그린 실경 기록화로 ‘朝宗巖(조종암)’, ‘二忠壇(이충단)’, ‘大統行廟(대통행묘)’, ‘九義行祠(구의행사)’ 등 실제 지명이 정확히 표기되어 있어 조선 후기 숭명 공간의 실체와 배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 상단에는 ‘조종암도’라는 제목과 ‘황명유민정석일사’라는 서명이 있다.
현재 조종암 전경.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조종암은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글씨를 바위에 새겨 넣은 암각서이다. 당시 군수였던 이제두와 유생 허격, 백해명이 주도해 만들어진 조종암 글씨는 모두 22자로 정면에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가 쓴 ‘朝宗巖(조종암)’, 왼쪽 제일 높은 곳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인 ‘思無邪(사무사)’, 그 아래 조선 선조의 글씨인 ‘萬折必東 再造蕃邦(만절필동 재조번방)’, 그 왼쪽으로 조선 효종의 글을 송시열이 옮겨 쓴 ‘日暮道遠 至痛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이 있다.
또 중앙에는 순조 4년(1804) 조종암을 세운 이유와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조종암기실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적 오른쪽 바위에는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가 쓴 ‘見心亭(견심정)’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조종암에 설치된 안내판.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조종암은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인 청나라를 멀리하고 사라진 명나라 문화를 이어받았다는 숭명배청 사상을 보여 주는 국가 유산이다.
대통묘는 명나라 태조와 9의사(九義士,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봉림대군이 1645년 귀국할 때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 사람들)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으로 1831년 명나라 9의사의 후손인 왕덕일(王德一)·정석일(鄭錫一)·풍재수(馮載修)·황재겸(黃載謙) 등이 지방 유림과 함께 조종암 근처에 새로 제단을 만들고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매년 음력 1월4일 명나라 건국일에는 명나라 태조에게, 1월6일에는 명나라 9의사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30일 ‘정석일-조종암도’ 공개 자리에 참석한 양정순 재단 상임이사 등이(사진 오른쪽부터 양 상임이사, 김철 연구원, 신동진 이사, 신용남 회장)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만절필동 아래에 새겨진 각자입니다.
崇禎 再周壬申, 臣 李秀得, 李命益, 宋必重, 李奎燮, 再拜摸勒
숭정 즉위 후 두 번째 임신년(1692년), 신하 이수득, 이명익, 송필중, 이규섭이 두 번 절하고 새기다
萬折必東(만절필동)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2017. 12. 18.
조선 중엽 정치계를 휘어잡은 송시열은 친명(親明) 중화주의자였다.
일상생활에서도 명나라 복식을 하고 명나라 예법을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자 중원(中原)의 문화 정통성을
이은 어버이 같은 나라라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속리산 계곡은 모화(慕華)사상의 요람이자 발신지 같은 곳이었다.
▶1689년 송시열이 죽자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화양서원'이라고 이름했다. '화양(華陽)'은 중국 문화가 햇빛처럼 빛난다는 뜻도 된다.
제자들은 또 명나라 황제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을 짓고 '만동묘(萬東廟)'라고 했다.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순자(荀子)가 쓴 말이다.
중원의 젖줄인 황하(黃河)는 수만 번 물길을 꺾어 흐르지만 결국은 동쪽을 향한다.
중국에선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는 이 말이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겐
중국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게 됐다.
경기도 가평에는 조선 선조 임금의 글씨로 '만절필동'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노영민 주중 대사가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萬折必東 共創未來(만절필동 공창미래)"라고 쓴 것으로 밝혀졌다.
노 대사는 한·중이 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좋은 관계를 회복할 것이란 뜻으로
썼을 것으로 믿는다. 실제로 이 말은 사필귀정(事必歸正)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쓰인 배경과 맥락을 알면 쉽게 나와선 안 될 말이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일각에선 "의미를 알고 썼다면
국가 독립을 훼손한 것이고 모르고 썼다면 나라 망신"이라는 말도 나온다.
▶노 대사는 부임 전에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피해가
중국의 사드 보복 때문만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국이 우리와 이웃한 세계 2위 경제 대국이고 북핵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치면 미국·일본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이 땅의 진보·좌파는 무슨 까닭에 중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중 기간 중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에 비유해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그 꿈을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외교에는 겸사(謙辭)도 필요하다지만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