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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인 병법서인 코요군감을 보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을 금기로 하고 있다. 말이란 타고 이동하는 것이지 말위에 올라타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풍림화산의 정예기병으로 유명한 가이의 다케다가도 사실은 이동하는 데만 말을 이용할 뿐 정작 싸움에 임해서는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서 싸웠다. 기병이라기보다는 유럽의 드라군과 마찬가지로 기마보병에 더 가까웠던 것이 전국시대 일본의 기병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을 가장 괴롭힌 것이 조선과 명의 기병이었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불과 8천의, 그것도 지형적으로도 한참 불리한, 당나귀며 노새까지 끌어모은 구색조차 갖추지 못한 기병의 돌격에도 일본군의 전열이 일부 무너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결국에는 일본군의 방진을 뚫지 못하고 돈좌된 끝에 포위섬멸당하고 말았지만. 함경도에서도 함경도 기병을 맞아 가토의 정예 일본군은 상당히 고전하다가 야습으로 겨우 물리치고 있기도 했다.
또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조선의 마상기예였다. 말을 타고 온갖 기기묘묘한 동작을 취하는 조선의 마상기예는 그러한 기마술의 전통이 없던 일본인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래서 어느샌가 조선의 무관들에게서 마상기예를 배우는 사람들이 나왔고, 이들에 의해 일본에서도 마상기예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통신사에 동반한 조선의 무관들이 일본의 기마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전에는 아예 그러한 기마문화가 없었느냐? 사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원래 기병이었다. 그것도 기마궁병이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과 가장 교류가 깊었던 가야는 4세기 고구려에 크게 패한 이후 고구려의 중장기병 전술을 받아들여 중장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싸우면서 중장기병을 경험했고 남조와도 교류하면서 남조의 앞선 군사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록을 보더라도 이미 백제에는 명광개라 불리울만한 갑주가 생산되고 쓰이고 있었다. 명광개는 찰갑을 이어 나타난 보다 선진적인 형태의 갑옷이었다.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군사기술에 대해서만 예외로 두었으리라 여기는 것은 역시 합리적이지 못하다. 전해주려 하지 않으면 모를까, 아니 전해주려 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서든 최우선순위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 군사기술일 터였다. 그리고 마침 한반도에는 중장기병의 기술과 전술이 전해져 한창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본에도 그것이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본도가 지금과 같은 곡도의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이미 8세기 헤이안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당태도의 영향을 받은 키리하즈쿠리가 킷사키모로하즈쿠리로 발전했다가 마침내 헤이안시대에 들어 마상에서 베기에 좋은 만도 형태의 시노기즈쿠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시노기즈쿠리로 보다시피 찌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오로지 베는 한 가지 목적에만 충실한 형태의 검이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일본도보다는 샴시르에 더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다. 그리고 실제 시노기즈쿠리가 만들어진 이유도 샴시르와 마찬가지로 말 위에서 적을 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 무사계급이 급속히 성장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헤이안시대의 끝에 겐페이의 전쟁과 가마쿠라 바쿠후가 있었으니.
당시 사무라이의 무장은 일단 마갑을 두르지 않은 일본의 조랑말과 오오요로이라는 찰갑종류의 갑주, 그리고 말위에서 근접전에서 적을 베기 위한 바로 이 시노기즈쿠리라는 이름의 만도와 가장 중요한 활이었다. 무려 2미터가 넘는, 특이하게도 활의 위와 아래가 비대칭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은 말 위에서 쏘기 좋도록 그리 특화되어 발전한 것이었다.
더구나 흔히 아는 바와 달리 일본의 활 역시 복합궁으로써 대나무와 여러 종류의 나무를 섞어 겹쳐 만들었는데, 그래서 어떤 활들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당길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을 당겨 쏠 수 있는 것이 그 무사의 실력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 남아 있는 일본의 궁도라는 것은 평화시대의 살기를 잃어버린 하나의 유희로써 일본활의 원래 위력과는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무로마치 이전까지 사무라이의 실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이 활솜씨였다. 그냥 활솜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쏘는 기마궁사였다. 에도시대에도 이와 같은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표적을 맞추는 것이 무사의 교양이자 유희로써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사무라이의 가장 주된 전술이었다. 말을 타고 적을 보면 활을 쏘아 잡고, 가까이 다가가면 칼을 휘둘러 베어 쓰러뜨리고,





어차피 사무라이 자체도 특권신분이라 소수였기에 소수의 특화된 전사집단인 사무라이끼리의 유희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자기 가문과 이름을 외치며 상대에게 싸움을 걸고 싸움에서 이기면 그 목을 베어 자신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전쟁이라기보다는 전사와 전사 개개인의 싸움의 연장이 당시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주를 이룬 것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전사계급인 사무라이였다. 그리고 이때 사무라이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 기마술과 궁술이었다.
그러면 어쩌다 일본에서 그러한 기마전술이 퇴보하게 되었느냐? 여기에는 세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몽골의 침입이었다. 일본인이 카미카제神風이라 부르는 그대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군은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였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이 자랑하던 그 대단하다던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몽골의 기병과 고려의 정예 앞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신이 불러 온 태풍이 아니었다면 일본 역시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들처럼 몽골기병의 발굽 아래 멸망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니, 당연히 여몽연합군이 물러나고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사무라이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에 뒤이은 전쟁의 규모의 확대다. 이전까지는 앞서 말했듯 전쟁이란 소수의 특권적인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싸움이었다. 전국시대와 같은 농민징집병인 아시가루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보병조차 영지나 녹봉을 받는 직업전사였고, 특화된 전사인 사무라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비로 무장을 갖추고 자신들만의 화려한 유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몽골의 침입 이후 사무라이의 권위는 떨어지고 그 자리를 천한 징집병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 확장된 전선은 더 이상 특화된 전사계급은 사무라이를 필요치 않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징집병을 조직하고 운용할 지휘관이지 직접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 적을 쓰러뜨릴 전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일본 토종의 조랑말이 체구가 너무 작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기병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유럽이나 아랍의 말들은 기본적으로 체구가 크다. 그만큼 힘도 좋고, 그래서 더 많은 무장을 실을 수 있었다. 여전히 더 튼튼한 갑주를 씌우고, 더욱 엄중히 무장한 기병을 태우고도 필요한 만큼의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말은 그보다 훨씬 작았고 따라서 힘도 약했다. 무장을 하기에도 무장한 전사를 태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일찌감치 중장기병이 도태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기병이 갖는 가장 큰 이점 가운데 하나가 말이라는 한참은 덩치 큰 짐승에서 오는 위압감이었다. 한참 높은 위치에서 내리치는 창칼도 위협이거니와 무엇보다 그 거대한 덩치가 달려든다고 하는 위압감이야 말로 앞에 선 보병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토종의 조랑말은 너무 작았다. 당시 일본인의 체구가 워낙 작았으니 타고 다니는데야 문제가 안 되었지만 창을 곧추세우고 있는 보병의 진을 상대하기엔 사무라이들의 말은 너무 작았고, 따라서 그 파괴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마궁병으로서의 장점을 살리려 해도 사무라이라는 것이 워낙 소수의 특화된 전사집단이다 보니 이미 감당할 수 없이 확장된 전장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기란 이제 거의 불가능했다. 갑주를 두르고 있으니 기병 특유의 돌파력으로 적진을 허물려 해도 말이 너무 작았고 또 약했다. 더 이상 말을 탄 사무라이란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결국 무로마치시대를 거치면서 전국시대에 들어서자 전통적인 사무라이는 그 쓰임을 잃고 사실상 거의 소멸하게 된다.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 창을 든 보병 - 아시가루들, 그리고 활 대신 창을 들게 된 사무라이들, 그들은 더 이상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말 위가 아닌 말에서 내려 도보로 적을 상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말은 버려지고 전사들은 땅으로 내려오고, 고상하고 우아한 전사들의 유희는 어느새 처절한 개싸움이 되어 버렸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전쟁도 바뀌고 사무라이도 그 속에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뎃포가 등장하고 에도시대의 평화가 시작된 뒤로는 또 다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고.
일본도가 지금의 형태를 띄게 된 것도 사실 이러한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쇠퇴와 무관하지 않다. 이전까지의 타치가 기병도라면 이후의 카타나는 보병도였다. 말 위에서 적을 베기 위한 타치에서, 지상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 그래서 말 위에서 휘두르는 것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그러면서도 찌르기와 베기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도검이 이로부터 발전해 에도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일본도가 된 것이다. 그 무렵 일본도는 사무라이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다.
사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사무라이란 일본문화나 역사에 익숙한 경우가 아니면 상상하기가 참 힘들다. 워낙 알려지기를 일본도를 들고 휘두르는 모습만이 알려진 터라. 그러나 전통적인 사무라이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고, 오랜기간 그러한 사무라이가 일본의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단지 시대가 바뀌면서 그 쓰임을 다하자 도태되어 잊혀지게 되었을 뿐. 쓰임을 다하면 잊혀지는 것이야 말로 하나의 역사의 법칙일 테니까.
참고로 내가 고구려 후기기병의 모습이 마갑을 두르지 않은 - 그러면서도 활을 함께 사용하는 중기병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리라 여기는 데에는 일본의 사무라이의 모습도 한 몫 한다. 아무래도 당시 일본과 가장 교류가 활발하던 것이 한반도였으니. 물론 중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과연 한반도 남부에서도 그와 같은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워낙 자료가 부족한 터라. 아무튼.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퍼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시고 건강히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