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는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개인이 가지는 자유의지에 반하거나 법률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양도 불가능한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성체 또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여 자본의 흐름이 경제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경제체제이다. 즉, 자본을 굴려서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체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을 단순한 '부(富)'와 구별한다. '자본(capital)'이란 투자를 목적으로 생산에 투입되는 돈, 재화, 노동 등을 말한다. 반면에 '부(wealth)'는 금고나 땅 속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소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나 대부분의 수입을 연회, 궁궐, 전쟁 등에 쓰는 중세 프랑스의 귀족은 '부자'일 수는 있으나 '자본가'는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리브 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도 자본가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여 수입의 일부를 주식에 투자한 노동자는 자본가다. 즉 생산에 따른 이윤을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하는 사람들을 '자본가(capitalist)'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발달한 것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정치/사회/경제적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관찰을 수행한 최초의 인물이 다름 아닌 카를 마르크스인 것이다.
폴리코사놀은 식물 왁스에서 추출한 알코올의 복합물질. 사탕수수, 풀, 잎, 과일, 곡물 등에 들어 있다. 주로 사탕수수에서 채취한다.
저밀도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고밀도 콜레스테롤을 높일 뿐 아니라, 고지혈증과 같은 혈관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폴리코사놀이라는 이름은 긴사슬알코올 배합이라는 뜻이다.
쿠바 국민들의 심장병을 예방하기 위해, 쿠바 공산당 독재정부가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심장병 사망률을 현저히 낮추었다.
현재 사탕수수 농장은 카리브해에 밀집되어 있으나,
8000년전 뉴기니에서 작물화가 시작된 사탕수수는, 유럽에 설탕이 알려지고 점차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가 지나서다.
아랍인들이 711년 스페인을 침략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지역을 점령하면서 설탕 제조술이 퍼져 나갔다.
아랍인들은 기후가 따뜻한 지중해에 있는 시칠리아, 키프로스, 몰타, 로도스 섬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연안에 사탕수수를 들여와 경작하고 설탕 제조 기술을 보급하였다.
유럽인들은 1096년부터 약 200년 동안 진행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설탕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경제적 가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고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설탕 생산을 주도하기도 했다.
중세에 대상들은 사막 너머로부터 지중해 동쪽까지 설탕을 운반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설탕은 훌륭한 식품이자 비싼 약품이어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사치품이었다.
향신료와 비단처럼 설탕은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996년에 세워진 베네치아 공국은 중부 유럽과 흑해와 슬라브 국가로 설탕을 수출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육로를 통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설탕을 운반하려면 여러 곳에서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비싼 설탕의 가격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나 영주들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통행세를 가급적 피하기 위해 지중해 및 대서양의 해상로를 통해 설탕을 운반하고자 했다.
베네치아, 제네바, 북부 유럽의 한자 동맹의 항구들이 향신료와 더불어 설탕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299년에 프랑스 백작부인이 남긴 가계부를 보면 설탕 가격은 같은 무게의 은값과 같았다.
16세기 초에도 손톱만 한 크기의 설탕이면 훌륭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호사품인 설탕이 국가에 커다란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유럽 시장을 겨냥해 그들이 장악한 대서양 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450년 무렵에 리스본에서 남서쪽으로 906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의 섬 마데이라에서, 스페인은 인근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설탕을 생산했다.
은과 비슷하던 설탕값을 현저히 낮춘 것은 콜롬버스였다.
그의 장인이 카나리아 제도에서 설탕공장을 해서 설탕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 그가 발견한 카리브제도에 사탕수수 묘목을 심은 것이다.
카리브제도는 사탕수수의 재배의 적격이었으나,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노예무역이었다.
아프리카의 노예상인들은, 노예 사냥꾼들에게 총 세 자루나 비단 한 필을 주면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었다.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설탕은 중국에서 수입한 차와 역시 남미 플렌테이션 농장에서 수입한 커피와 함께 유럽 귀족들의 기호품이 되어갔다.
설탕 가격의 급격한 하락과 동시에 일반인들의 필수식품이 되었다.
그러다가, 남비 볼리비아에서 세계 최대의 은광이 발견 되었다.
노예무역과 설탕 무역의 판매대금이 은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카리브해에서 무역선은 설탕을 싣고 유럽에 갔다가 다시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싣고 카리브해로 왔다.
은을 실은 무역선은 필리핀 마닐로 와서 중국 상인들에게 은을 주고 차와 비단을 사서 유럽으로 향했다.
드디어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가 완성되었다.
글로벌 경제는, 노예와 설탕과 은과 차와 비단이 富를 창조한 것이다.
이전에는 부의 개념이 지구 상에 없었다.
부는 영국 산업혁명의 자산이 되었고, 영국 금융, 은행, 보험회사, 주식회사, 증권회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의 상품가격의 한 단위 플로레타리아를 탄생시켰다.
플렌테이션의 노예처럼 임금을 주어야 했기에,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제시했던 스피넘렌드법이 생겼다.
보험사기 주가 조작 노동착취 등 현재의 모든 자본주의 문제점이 그때 시작되었다.
마닐로 싣고 간 은은, 중국 상인들에게 비단과 차를 받고 넘겼다.
그 전에는 전부 실크로드를 통하던 것들이었다. 실크로드 대신에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국은 세계 은의 삼분의 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영국의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남미를 침략은 피사로는, 잉카황제 아타우알파를 죽이고 엄청난 금을 스페인으로 가져 온다.
금은 유럽 자본주의 통화량을 두배 이상 늘렸다.
자본주의는, 살인과 약탈과 사기와 전쟁과 노동착취와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