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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장 위기의 유럽(43~50쪽)
우르바누스는 교황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이 클레멘트 3세와 그의 후원자인 하인리히 4세 때문에 취약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힘을 빌려 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했다. 그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콘스탄티노플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긍정적 신호에 재빨리 반응했다. 우르바누스가 클레멘트 3세와 교권 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런 돌파구는 우르바누스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도착한 사절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비잔티움제국이 붕괴 직전에 있으므로 도움이 긴급하다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는 그 사태에 내포된 의미를 즉각 파악했다. 교회를 영구히 하나로 단합시킬 좋은 기회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북쪽인 클레르몽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2장 콘스탄티노플의 회복(62쪽)
동부의 여러 주들이 투르크족의 수중에 떨어지고 제국이 무릎을 꿇은 상태였으므로, 비잔티움은 제국의 사절이 피아첸차로 찾아가 우르바누스 교황에게 투르크의 위협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아시아가 근 15 년 전에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은 왜 1095년에 들어와서야 갑자기 극적인 구원 요청을 하게 되었을까? 이 절망적인 호소와 교황의 즉각적인 반응의 타이밍은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비잔티움의 호소가 전략적인 것이었다면, 우르바누스의 반응은 이기심에다 서방 교회의 라이벌들을 제압하고 단독 교황으로 우뚝 서려는 욕망이 가미된 것이었다. 따라서 제1차 십자군전쟁의 핵심에는, 소아시아발 위기와 현실정치라는 복잡한 스토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킨 불꽃의 배후에는 만지케르트의 참사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비잔티움제국의 통치자로 등장한 젊은 청년이 있었으니, 곧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였다.
7장 서방의 반응(170~171쪽)
기독교인의 고통, 정신적 보상, 예루살렘이라는 목적지 등을 한데 뒤섞은 수사적 칵테일은 사람들을 도취시켰다. 우르바누스는 또 다른 강력한 수단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면서 방돔의 성 삼위일체 교회와 마르무티에와 무아삭의 수도원 교회 등 많은 교회들을 축성했다. 교회의 신자들은 성스러운 십자가의 조각을 선물로 받았다. 사실 십자가의 조각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보관되어왔고 4세기(이 당시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 중요한 유물을 로마의 세소리아노 왕궁에 하사했다)부터 제국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성스러운 십자가는 비잔티움이 국제 외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수단이었다. 우르바누스가 교황청 보물 창고에 들어 있던 조각들을 나누어 주었다고 추정해볼 순 있으나, 그보다는 알렉시오스가 콘스탄티노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 유물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8장 제국의 수도를 향하여(212~214쪽)
알렉시오스는 서방 지도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대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보에몬드, 부용의 고드프루아, 툴루즈의 레몽, 베르망두아의 휴, 노르망디의 로베르, 플랑드르의 로베르, 블루아의 스티븐 등에게 자신을 향해 충성 맹세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받은 여러 저명한 귀족들은 자기 땅의 통치자로서, 아무런 의무나 책임을 느끼지 않는 알렉시오스에게는 물론이고 그 어떤 다른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강하게 반대했다. 알렉시오스가 충성 맹세를 요구한 것에는 두 가지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 앞으로 서방의 기사들이 소아시아에서 탈환하게 되는 모든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장기적 목표다. 둘째, 십자군이 비잔티움 영토 내에 들어와 있으므로, 콘스탄티노플 내에서 황제의 지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단기적 목표다.
10장 갈등하는 십자군의 영혼(254~255쪽)
1098년 1월 말, 타티키오스는 “옥수수, 보리, 와인, 고기, 밀가루, 각종 생필품을 선적한 수송선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면서 십자군 캠프를 떠났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타티키오스의 이탈 사건은 그와 알렉시오스 황제가 십자군을 안티오크 성벽 앞에 버려둔 채 십자군을 배신한 사건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프랑크인의 행적》의 저자는 이렇게 평가를 했다.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평가들은 부당한 것이다. 타티키오스가 현장을 떠난 지 몇 주 뒤인 1098년 3월 4일, 성 시메온 항구에 배들이 입항하여 식량, 보급품, 장비, 물자 등을 부려놓았다. 선단이 도착한 타이밍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를 함께 타고 왔던 루카의 브루노가 확인해주었듯이 선원들이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알렉시오스는 라오디케아를 탈환한 후에 그곳에 잉글랜드인으로 구성된 경비대를 설치했다. 따라서 안티오크에 비상 보급품을 싣고 온 사람들이 이 잉글랜드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타티키오스는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그럼 왜 십자군과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원정부대 내에서는 이미 비잔티움 황제의 역할에 대한 커다란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타티키오스가 현장에 부재한 상태에서, 만약 안티오크가 함락된다면 그 도시를 누구에게 넘겨주어야 할지 막연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을 때 앞으로 탈환할 도시와 지역은 비잔티움 관리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부대 내에 불안감을 유발했다. 십자군은 비잔티움 사람들이 공성 작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나아가 이처럼 엄청난 사상자 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이 과연 공격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안티오크가 기독교의 관점에서 중요한 도시인 것은 틀림없었다. 성 베드로의 초대 교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함락은 성묘의 해방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12장 제1차 십자군의 후일담(318~319쪽)
보에몬드가 비잔티움을 네 번이나 정복했다는 주장은 억지다. 이 노르만인이 에피루스를 공격한 세 번의 전투(1081~1083, 1084~1085, 1107~1108)는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십자군전쟁은 보에몬드가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가 디아볼리스에서 치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카노사대성당의 천장에 새겨진 글자 외에도 이 시기에 진실 왜곡이 이뤄졌다는 증거는 또 있다. 프랑스의 루아르 지방에 살았던 어떤 수도자가 쓴 시는 보에몬드의 마지막 제국 공격이 대성공이었다고 노래한다. 안티오크의 영웅은 궁지에 몰린 수퇘지처럼 싸운 알렉시오스 황제를 거칠게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맞서는 제국 군대를 지푸라기처럼 날려버렸다. 그 전투는 비잔티움의 대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보에몬드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보에몬드는 강화 조약에 동의했고, 노르만인의 우월함을 흔쾌히 받아들인 황제는 그 조약에 기꺼이 서명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 의하면 보에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황제였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에몬드에 관한 한 기억과 현실은 서로 무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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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유럽의 중세를 뒤바꾼 십자군전쟁의 진짜 배후는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 중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유럽에서, 중세는 물론 서양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제1차 십자군전쟁이다. 제1차 십자군전쟁은 가장 잘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은 관련 서적이 나온 역사적 사건들 중 하나다. 많은 연구자와 문학가들이 ‘교황 우르바누스 2세’, ‘클레르몽에서 행한 선동적인 연설’, ‘보에몬드로 대표되는 십자군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면모’ 등에 관심을 집중하여 이를 주제로 십자군전쟁사를 주도해왔다. 십자군전쟁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에서 한 연설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도로 출발한 수천 명의 서구 기사들이 1099년 7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킴으로써 정점에 도달한 역사적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동방의 부름》의 저자 피터 프랭코판은 십자군전쟁의 진짜 배후는 동방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라고 말한다. 십자군전쟁은 사실 알렉시오스의 커다란 그림 아래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서유럽 주류 학계는 의도적으로 알렉시오스를 십자군전쟁사에서 배제하고 왜곡하였는데, 그 결과 십자군전쟁사에서, 특히 이 전쟁의 근원과 관련해서 그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십자군전쟁사의 주변부에 머무르며 우르바누스 2세와 십자군 지도자들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단역으로 이용되었고, 이러한 역사관은 자연스레 제1차 십자군전쟁을 해석하는 데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말한다.
피터 프랭코판은 십자군전쟁의 진정한 근원과 맥락을 알기 위해선 알렉시오스 1세와 비잔티움제국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천 년 가까이 이어져온 십자군전쟁사에 도전장을 던지며, 알렉시오스 1세와 비잔티움제국을 십자군전쟁사의 중심부에 등장시킨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가 그린 십자군전쟁이라는 큰 그림
그렇다면 알렉시오스는 왜, 어떻게 십자군전쟁이라는 큰 그림을 기획했을까? 저자는 ‘십자군전쟁 전야’의 비잔티움제국의 상황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11세기에 들어와 제국은 이전의 영광을 상실했다. 투르크 침략자들이 여러 중요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제국의 영토 일부는 노르만인들에게 빼앗겼다. 이때 비잔티움제국의 구원자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다. 1081년, 25세의 나이에 제위를 찬탈한 그는, 집권 초기에 비잔티움을 노리는 외부의 위협을 막아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에 대한 통제권도 확립해야 했다. 그러나 1090년대 중반에 이르자 그는 정치적 권위를 잃기 시작했고 더불어 제국은 온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침략을 받아 그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그리하여 1095년에 알렉시오스는 긴급한 메시지와 함께 사절을 우르바누스에게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저자는 11세기 비잔티움제국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며, 제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1095년까지 이르렀는지 살펴본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전투들의 결과, 알렉시오스가 투르크인 용병들에게 주요 도시들을 맡긴 전략과 비잔티움 귀족들을 상대로 한 태도가 제국을 어떻게 붕괴로 몰아넣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제국의 붕괴 상태에서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전쟁이라는 선택지를 어떻게 생각해내고 활용하려 했는지와 같은 전쟁 전야의 주요 맥락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그런데 왜 우르바누스 2세는 알렉시오스의 구원 요청에 기꺼이 화답했을까? 황제의 절망적인 호소와 교황의 즉각적인 반응의 타이밍은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서유럽에서 두 명의 교황이 옹립한 상황에서 알렉시오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입장이었지만 동방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익숙한 상대였던 우르바누스에게 사절단을 보낸다. 더 편리한 협상 상대라는 계산에서 나온 접근이었다. 우르바누스 역시 동방에서 온 사절단의 메시지를 듣고,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 내포된 의미를 즉각 파악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유럽에서 자신의 힘과 위상을 높일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한 우르바누스는 알렉시오스와 밀접하게 관계하며 동방과의 관계에 집중했다.
이 당시 우르바누스가 유럽을 돌며 한 연설의 내용은 알렉시오스의 철저한 통제와 관리에서 나왔다. 알렉시오스는 동방 기독교인들이 받는 고통, 죄의 사면이라는 정신적 보상, 성물과 성지 예루살렘이 주는 매혹을 적극 활용하며 서방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직였다. 이는 곧 서방 기독교인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이어졌고, 십자군전쟁은 시작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_cWtBpwo04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십자군전쟁의 진정한 전장이 펼쳐진다
십자군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알렉시오스는 전천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십자군을 제국에 불러들이고, 십자군전쟁을 치르면서 황제는 여러 부침을 겪기도 했다.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황제가 수립한 행동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며 혼란을 만들었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해오는 와중에 온갖 악행을 저질러 제국 내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도저히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그들은 전혀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또한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온 십자군 지도자들이 언제 마음을 바꿔 수도를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데 대비해야 했고, 동시에 제국 내에서 점증하는 황제에 대한 반란 모의도 신경 써야 했다. 그리고 십자군 지도자들의 이권 다툼과 수복한 도시들에 대한 야심과 권력욕을 통제해야 하기도 했다. 알렉시오스에게 십자군전쟁은 손쉽게 통제할 수 없는 너무나 위험한 게임이었고, 감수해야 할 위험과 부작용도 아주 많았던 것이다.
십자군전쟁을 다룬 가장 대표적 서방 측 자료인 《예루살렘에 도착한 프랑크인의 행적》은 보에몬드 같은 십자군 지도자들의 용맹성을 일방적으로 기록하는 한편, 알렉시오스 황제는 교활함과 기만술로 십자군을 이용할 생각만 한 존재라고 비난한다. 직접 원정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십자군을 제대로 지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알렉시오스는 실제로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할 의무가 없었고, 제국 내부 사정상 그럴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식량 지원을 비롯한 군사 지원도 때에 맞춰 적절히 이루어졌음을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입증한다. 서방 측 자료들이 십자군전쟁에서 황제의 희생과 노력, 업적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은 교황과 십자군 지도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십자군전쟁사에서 알렉시오스의 역할이 부각되는 게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십자군전쟁에서 알렉시오스가 보인 모습을 아주 공정하게 보여준다.
알렉시오스는 서방의 힘을 빌려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주 효율적이고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십자군 지도자들의 원정 경로를 정하는 일, 식량 배급을 비롯한 군사적 지원 여부를 선택하는 일, 십자군 지도자들과의 충성 맹세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고 향후 십자군이 차지한 지역은 모두 황제에게 넘겨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일 등 십자군전쟁 곳곳에 알렉시오스의 기민한 구상과 전략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니케아, 안티오크,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과정을 엄밀하게 기술하며,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진면목을, 그리고 제1차 십자군전쟁의 진면목을 생생히 보여준다.
《실크로드 세계사》의 저자 피터 프랭코판이 쓴 정통 십자군전쟁사
이 책을 읽다 보면 독특한 독서의 맛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풍부한 사료를 토대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십자군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맥락과 판도를 시원하게 풀어낸다. 이는 마치 엄밀한 학술서를 어떤 역사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게 읽는 느낌을 준다. 바로 여기에서 피터 프랭코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피터 프랭코판은 2015년 출간한 《실크로드 세계사》에서 고대 종교의 탄생부터 현대 중국의 일대일로까지, 세계의 척추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2천 년 세계사를 풀어내며, 서유럽 중심주의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지정학적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이번 책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균형 있고 객관적인 관점,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필력과 구성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옥스퍼드대학 비잔티움연구센터 소장이자 동대학 우스터칼리지 선임 특별연구원, 비잔티움 역사 전공자인 그는 직접 번역한 12세기의 중요한 역사서 《알렉시아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나온 그리스어와 라틴어 사료, 스텝 유목민들의 세계, 콘스탄티노플의 고고학과 유물 문화, 발칸반도·소아시아의 역사, 중세 교황청, 성지에 수립된 라틴 식민지에 대한 사료 등 풍부한 동서방 사료와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십자군전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전개되었는지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속내와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풀어낸다.
지금껏 국내에 십자군전쟁 관련 서적이 여러 권 나왔지만 이 책처럼 십자군전쟁을 전문적으로 다룬 정통역사서는 없었다. 단언컨대 이 책은 가장 균형 잡히고 공정한 십자군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이 책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세를 끌어들여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굴욕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가 다른 나라에 의해 어떻게 지워지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한반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고 있던 신라는 당나라라는 강력한 동맹국을 등에 업고 그들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루어내긴 했지만, 당나라의 외교적 간섭 등으로 인해 여러 부침을 겪었다. 근현대사는 물론 주변 세력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큰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