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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삼은 1999년 LG에 야수로 입단했지만 지난해까지 투수로 활약했다. 통산 성적은 23승29패 방어율 5.24다. 김광삼은 “그동안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며 “김용달 타격코치의 권유를 믿고 타자 전향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코치가 김광삼의 타격 재능을 높게 산 건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코치는 “김광삼은 입단 당시 타격 재능이 뛰어났으나 팀 사정상 투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LG는 서용빈(37,LG), 이병규(34,주니치 드래건스), 김재현(33,SK) 등 타자가 풍부했던 반면 투수진은 세대 교체가 시급했다. 김코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김광삼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번 타자 전향으로 김코치의 오랜 염원이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왜 방망이를 들었나 김코치는 1997년 동대문구장에서 벌어진 명승부를 기억한다. 제51회 황금사자기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그해 고교야구 최대 라이벌로 꼽힌 광주일고와 신일고가 맞붙었다. 조재영, 현재윤, 봉중근, 안치용, 김광삼으로 짜인 신일고와 이현곤, 정재열, 정성훈, 최희섭, 송원국으로 이뤄진 광주일고는 이 경기 전까지 전국대회에서 1승1패로 팽팽했다. 3시간4분 동안 동점 3차례와 역전 2차례가 오고간 끝에 10회말 끝내기 안타 한 방으로 신일고가 8-7로 이겼다.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은 김광삼이었다. 김광삼은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고 다음해 청소년대표팀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했다. 프로에서도 타격 재능은 이따금씩 드러났다. 2001년 상무에 입대한 뒤 2군 경기에서 선수 부족으로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때렸다. 당시 LG 2군 감독이던 김인식 충훈고 감독은 “타격훈련을 하지 않으면서도 맞추는 능력이 뛰어났다. 타자로서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김광삼은 우투좌타다. 야수로서 수비나 타석에서 활용가치가 높다. 김코치는 “신체 조건뿐만 아니라 우직한 성격도 타자에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김광삼이 타자로 전향한 가장 큰 이유는 투수로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해마다 7승 이상을 거뒀지만 2006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뒤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해 성적은 승패 없이 방어율 12.27이었다.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한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김응국(42) 현대 타격코치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김코치는 1988년 롯데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2군 경기에서 선수 부족으로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뽑아내곤 했다. 김코치는 “투수들과 아이스크림을 건 홈런 내기에서 매번 이겨 야수로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며 “이성득 <PSB> 해설위원과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계속 야수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지만 결정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타자 전향은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일까. 김코치는 1989년 조동래 구단 사장이 관전한 OB와 2군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때려 타자의 길을 걷게 됐다. 김코치는 “조사장에게 타자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듣고 ‘이게 내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신인이나 다름없었기에 전향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장정석(35) 현대기록원은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경우다.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장채근 당시 KIA 배터리코치가 광주 진흥고에서 훈련하고 있는 장정석의 너클볼을 보고 투수 전향을 권유했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야수로서 부진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타자로 전향을 한 경우도 있다. 1986년 신인왕 김건우(45)는 1987년 9월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다쳐 타자가 됐다. 김건우는 일 년 넘게 재활한 뒤 마운드에 올랐지만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거둔 승수는 6승(6패)에 불과했다. 한화 권준헌(37)은 1995년 타율 3할6리를 기록했지만 1996년 쌍방울전에서 김원형이 던진 공에 왼 손등뼈가 부러져 투수로 전향했다. 권준헌은 “부상으로 타격폼이 흐트러졌고 1998년 프로야구에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돼 투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김광삼은 권준헌과 같은 28살의 나이에 전향을 결심했다. 아마추어 때 투타에서 모두 활약했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다. 권준헌은 “부서진 모래성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늘 괴로웠다”며 “오로지 강한 어깨 하나만 믿고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털어놨다. 29살에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인철(37) 제주 제일중학교 코치는 “아내의 반대가 무서워 ‘일 년 안에 1군에 올라가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야수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김용달 코치는 “선수들의 불안한 심리는 오히려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김코치는 “야구를 꾸준히 해 온 선수들이라 오프시즌 동안 훈련에 집중한다면 3개월 안에 적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고행의 길
손바닥 아래쪽에 있는 더 크고 시퍼런 물집 흔적은 왼손타자들이 방망이를 잡을 때 아래 부분을 쥐는 오른손이 스윙을 할 때 배트와 마찰을 일으키며 생긴 상처의 자국이다. 김광삼은 “피부가 건조해 물집의 흔적이 더 심해 보이는 것”이라며 “어차피 겪어야 할 일”라며 웃었다. 어쩌면 물집은 그의 웃음처럼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부상이다. 투수와 야수가 사용하는 근육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투수는 공을 던지면서 어깨와 팔꿈치 근육을 단련하는 데 이런 과정이 부족할 경우 다치기 쉽다. 실전 경험 부족으로 마운드에서 무리하다 부상이 찾아오기도 한다. 장정석은 너클볼 외에 다른 구종이 없어 직구 스피드를 늘리려고 전력 투구를 하다 어깨를 다쳐 은퇴했다. 장정석은 “투수에게 필요한 근육을 제대로 강화하지 못한 가운데 무리한 게 아직까지도 아쉽다”고 털어놨다. 현대 전준호(33)도 이같은 아픔을 잘 알고 있다.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한 전준호는 1999년 5월 5일 원당구장에서 두산과 치른 2군 경기에서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전준호는 “15개의 공을 던졌는데 9개를 던진 뒤부터 팔꿈치에 통증이 왔다. 마운드 경험이 없다 보니 그 통증이 부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한 황두성(32,현대)도 “처음에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부자연스러운 투구폼도 부상을 일으킨다. 권준헌은 “투구폼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던졌을 때 어깨와 팔꿈치 관절이 저려 고생했다”고 말했다. 2004년 포수에서 투수로 변신한 KIA 임준혁(24)은 그해 오른 팔꿈치를 다쳐 내측 측부인대 수술을 받은 뒤 아직까지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투수보다는 덜 하지만 타자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타격과 수비, 주루플레이 등을 고루 익혀야 해 투수보다 적응시간이 많이 걸린다. 미국에 진출한 뒤 투수로만 활동하다 지난해 야수로 삼성에 입단한 채태인(26)은 2군 경기 때 외야에서 '만세'를 부르거나 1루수로 출전해 원바운드 송구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실수를 자주 저질렀다. 김인철은 “적응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며 “슬라이딩을 하다 옆구리 뼈를 다치고 다이빙 캐치를 하다 엄지가 부러져 남몰래 병원에 가 여러 차례 피와 물을 뺐다”고 밝혔다. 윤덕규 LG 수비코치가 지난해 9월부터 김광삼에게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강조하는 것도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윤코치는 “야수의 근육 사용법을 익히는 게 늦어지면 피로 회복속도가 떨어져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응국 코치는 “투수 때 안 쓰던 근육을 얼마나 빨리 만드느냐가 성공으로 가는 키포인트”라고 말했다. 전준호, 황두성, 권준헌이 투수로 전향했을 때 현대는 투수왕국이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전향하고 나서 괜히 했다는 생각이 몇 번씩 들었지만 끝까지 가본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운동했다.” 김인철은 “난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은퇴하던 날 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타자로 전향을 선언한 날부터 남들보다 두세 배 열심히 훈련해야 했지만 이를 이겨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용달 코치는 “(김)광삼이는 정신력이 강해 올 시즌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지금의 자세를 유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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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응원이나 할렵니다.힘내세요. 광삼선수..~!!
서승화선수도 타자전향 아니지않나요...걍 이광환감독이 이상한짓(?)한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