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 편 올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mail : tsher@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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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머릿속엔 미연이 있다
3
다시 시작되는 하루를, 나는 내 머리통을 빠갤 듯이 울리는 소리로 시작해야 한다.
‘으악~~~~! 악~! 악~! 악~!‘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울리는 저 년의 비명소리. 분명 어제 일에 대한 앙심으로 저러는 걸
거다. 너무 억울하다. 하늘이 저 년에게 너무 불평등한 힘을 줬다. 난 저 년을 조금이라도
괴롭힐 방법이 없는데, 저 년은 내 머릿속에 기생하며 너무도 쉬운 방법으로 날 괴롭힌다.
이렇게 ...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 오늘 아침은 정말로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온다.
난 아픈 머리를 감싸안으며, 침대에서 기어나와야 한다.
‘그만 해. 벌써 일어났어.’
‘그랬어? 착하네. 우리 돌쇠! 어유! 귀여워. 한번에 바로 일어나고.’
날 놀리려고 자꾸 저런다. 하지만 응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내가 아무 대꾸가 없자 그
녀가 더 자극을 주려 한다.
‘약속 대로 30분 일찍 깨웠어. 불만 없지? 괜찮지?’
불만 많다. 불만 없으면 사람 아니다. 하지만 아무 소리 안 한다. 더 해 봐야 결국 나만
손해라는 걸 이번 일로 절실하게 느꼈다. 어제 일의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 ... 씨!
난 그냥 옷을 갈아 입고 새벽운동을 하고, 아침밥을 챙겨 먹고, 출근을 서두른다. 1등으로
출근해서, 어제의 사실상의 꼴등을 만회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오늘도 1등으로 출근 못한다. 고마운(?) 미연 덕택에 그렇게 바삐
서둘렀는데 ... 1등은 어제의 그놈 배대리다. 나의 현선을 똥차로 채간 그놈 말이다. 뭐 저
정도 부지런한 놈이라면 나의 라이벌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해야겠다.
나의 뒤를 이어 줄줄이 은행 사람들이 출근을 한다. 내가 잠시만 더 늦장을 부렸다면 난
뒤로 뒤로 밀렸을 거다. 비명 마구 질러서 날 깨워준 미연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그러기는
싫다. 하여간 이곳 은행 사람들 참말로 부지런하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철저한 준
비가 된 사람들이다. 난 그들 속에서 언제나 2등만을 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좀 투덜거리던 말든, 오늘도 바쁜 은행업무가 시작된다. 어제와 달라진 게 전혀 없
다. 출근 이틀만에 이런 소리 하면 좀 그렇지만, 이렇게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이 지겹다. 이
런 지겨움을 잊게 해 준 건 감격스러럽게도 나의 현선이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현선이 내가 쉬고 있는 쪽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삼돌씨! 점심 안 드세요?”
“먹어야죠?”
“혹시 약속 있는 건 아니죠?”
“약속 같은 건 없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저기 요 앞에 보리밥집이 있는데, 거기 열무김치가 정말 맛있거든요. 된장 부어서 비벼
먹으면 끝내줘요. 같이 가실래요.”
뭐 생각할 것도 없이 나야 당연히 오케이해야 했다.
“저야 좋죠. 안 그래도 뭘 먹을까 고민했는데 ...”
나는 정말로 기대했다. 현선과의 오붓한 식사를 상상하면서 ...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싱
글벙글하기까지 했다.
‘입 좀 다물어. 바보야!’
내 들뜬 기분에 초를 칠려는 미연의 잔소리였다. 난 바로 반격을 했다.
‘조용히 해.’
‘왜~? 그냥 침까지 질질 흘리면 딱일텐데. 남들이 보면 완전 바보천치로 볼텐데.’
더 이상 두면 안되겠다 싶었다. 좀 더 하면 내 좋은 기분을 망쳐놓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근무시간이야. 내가 너보고 말해도 된다고 허락한 거 아니잖아.’
‘체! 알았어. 흥! 두고 봐.’
미연이 또 ‘두고 봐’를 외쳤다.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새벽에 그리 절실히 배웠으면
서도, 나는 후회 안 했다. 내일 새벽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면서도, 절대 사과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현선과의 오붓한 점심식사를 맘껏 즐기기 위해서는, 미연이 좀 삐쳐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난 정말 많이 실망했다. 그건 현선과 단 둘이 하는 그런 오붓한 점심이 아니었다. 현선의
단짝인 수빈을 비롯한 은행 여직원들 서넛과 배대리까지 끼어 있는 단체식사(?)였다. 냉정
하게 말하면, 그들의 점심 자리에 내가 낀 모양새였다.
그나마, 나의 현선이 내 맞은 편에 앉아 있었고, 그녀가 음식을 먹는 거, 말을 하는 거,
휴지로 입을 닦은 거 등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위로가 되었다. 아니 난 그 예뿐 모습
들을 보면서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나의 현선이 내게 말을 걸어온 순간에는 기분이
너무 좋아 미치는 줄 알았다.
“아침부터 너무 바빴죠? 오늘은 어찌나 손님이 많든지, 휴우! 난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요. 어때요? 삼돌씨는 그 일 할만 해요?”
“뭐 저야 ... 그런저럭 ...”
“아 참, 여기 음식맛 어때요? 열무김치 맛있죠? 여기 식당 주인 할머니는 30년째 이 자리
에서 장사하고 있대요. 요 근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맛이래요. 된장도 직접 담아서 만든거라,
딴 데하고는 완전 틀리다고 해요. 괜찮아요, 음식맛?”
“뭐 그럭저럭 ...”
난 경상도 남자다. 다들 알 거다. 경상도 남자들 말이 짧다. 말투는 엄청 무뚝뚝하다. 그
러니 말 길고, 말투 사근사근한 서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곤 했다. 화낸다고 오해를 사고,
불만많다고 오해를 사고 했다. 촌스런 경상도 사투리도 고쳤는데, 이걸 못고치겠는냐면서
힘껏 고쳐보려 했다. 정말로 노력 많이 했다. 하지만 내 성격이 무뚝뚝해서인지, 잘 안되었
다. 난 여전히 말이 짧고, 무뚝뚝하고 그랬다.
그런 내가 그 순간에는 너무너무 미웠다. 그 따위로 밖에 대답을 못하는 내가 미웠다. 그
러니 그녀의 대화상대가 바로 배대리 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난 더 이상 현선과의 정겨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배대리와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나의 현선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난 그녀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종알종알 끊임없이 입을 놀리는 나의 현선, 참 말이 많은 여자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예술 어느 부분도 빠지지 않고, 온갖 것에 다 끼어서 말을 거
들고, 수다를 떨었다. 남들이야 뭐라 하든 난 그게 예쁘게만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대화도 끝나고, 모두 자리에게 일어났다. 밥값은 내가 계산했다. 같이 식
사를 했던 은행 사람들이 돈을 모아 주려고 했지만, 난 거절했다. 참고로 이게 경상다 남자
의 방식이다. 폼 잡기 좋아하고, 자질구레한 몇 푼 돈에 신경 안 쓰는 게 경상도 남자다. 난
그런 남자였다.
돈 안 내고 식사한 사람들이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배대리도 인사를 했다.
“엄삼돌씨! 고마워. 다음엔 내가 한 번 사지.”
배대리의 뒷편에서 나의 현선이 끼어들었다.
“배대리님이요? 어머머! 뭐 사실 건데요? 배대리님은 삼계탕 정도는 사야 하는 거 알죠?”
“물론이죠? 현선씨! 말 나온 김에 내일은 다 같이 삼계탕이나 한 그릇 하죠?”
“어머! 좋아라.”
현선은 배대리의 팔짱을 끼면서, 깔깔깔 웃으며, 좋아라 했다. 배대리는 그런 현선 때문에
껄껄껄 웃으며, 좋아라 했다. 허물 없이 얘기하고 행동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난 어쩐지 허
전해졌다. 배대리를 둘러싸고, 덩달아 좋아하는 여직원들을 보면서, 난 이곳에서 여전히 외
톨이구나 했다. 그래서 혼자 먼저 식당을 나와서 은행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 뒷편에서 현선이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삼돌씨!”
난 돌아서 현선을 보았다. 현선이 달려와서 내 팔짱을 꼈다.
“왜 먼저 나갔어요? 찾았잖아요?”
착 달라붙어 있으니,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큼 좋
았다. 그래도 말은 여전히 짧고, 무뚝뚝했다. 미연 말대로 난 정말 바보인가 보다.
“왜요?”
“점심 잘 얻어 먹고, 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잖아요.”
“뭘요? 별로 맛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
말실수를 한 거였다. 현선이 눈이 동그레지며 도로 물었다.
“맛 없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 비싼 거 아니라는 의미였어요. 거기 음식맛은 정말 좋았습니다. 현
선씨한테 정말 고마워 합니다.”
“다행이네요. 난 또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은행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의 현선은 계속 떠들었다. 나는 아주 조심하며, 말을 받았다.
그녀는 은행을 찾아오는 고객들에 대한 평을 했고, 나는 또 말실수를 할까 조심조심, 아주
가끔씩 맞받아 주기만 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우리가 근무하는 은행 앞에 도착했다.
팔짱을 풀며 현선이 뜸금없이 내게 물었다.
“저기 삼돌씨! 오늘 저녁 때 시간 있어요?”
여자의 빤한 질문에 난 또 바보같이 도로 물었다.
“왜요?”
“그냥요. 삼돌씨 선약 있나 보네요?”
“아뇨. 뭐 다른 약속은 없는데 ...”
“그럼 나랑 술 한 잔 할래요? 단 둘이서만 ... 괜찮죠?”
“저야 뭐 ... 현선씨랑 마신다면 영광이죠.”
현선이 내게 생긋 웃어주며, 먼저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난 좀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기
분이 좋기도 하고 그래서 ,.. 솔직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보야! 입 좀 다물어. 침 흐르겠다.’
‘헤헤헤! 그래. 그래.’
‘흥! 하여간 서울 애들은 너무 헤퍼.’
‘헤헤헤! 저건 적극적인 거야. 난 서울 여자들의 저런 솔직하고 적극적인 면이 좋더라. 헤
헤헤!’
‘흥! 좋긴 뭐가 좋아? 서울 여자들은 ...’
미연은 헤픈 서울 여자들에 대해 욕을 해 대기 시작했다. 꼭 옛날 시골 할머니들 같은 고
리타분한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미연이 뭐라 떠들들간에 내 들뜬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
었다. 내 들뜬 마음은 미연의 고리타분한 잔소리들을 소 귀에 경읽기로 만들기만 했다.
저녁때, 약속대로 나와 현선은 둘만의 데이터를 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고,
분위기 좋은 대학가 호프집으로 장소를 옮겨 술을 마셨다. 너무 들뜬 상태라 미연이 조용히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란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낮에 들었던 ‘두고 봐’ 란 끔찍
한 말을 잊고 있었다. 미연의 존재마저 잊고 마냥 싱글벙글하고만 있었다. 싱글벙글하며 현
선과 오붓한 대롸를 나누고만 있었다.
이미 밝혔듯 난 경상도 남자다. 대개의 그쪽 지방 남자들 여자랑 단둘이 오붓한 대화하는
걸 힘들어 한다. 분위기 맞춰주는 말 못하고, 재미있는 얘기 못하고 그런다는 거다. 난 분
명, 그 대개의 경상도 남자들 중 하나다. 미연의 방해가 아니더라도 여자 많이 사귈 능력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선과 대화하는 건 다행히 쉬웠다. 내가 고민하고 대화 주제를 찾을 필요가 없었
고, 재미난 얘기를 하려고 말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현선이 떠들면, 난 거기에 동
조해 주기만 하면 됐다. 역시 나의 현선은 내가 아는 여자 중 최고라고 생각했다. 날 너무
편하게,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맥주도 몇 병 비우고,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그때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삼돌씨! 저기 나 삼돌씨 처음 봤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 혹시 예전에 해난사고 같은
거 겪은 적 있어요?”
난 내가 당한 사고 얘기를 떠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아니 될 수 있으면, 내 기억속에서
지우려고만 했다. 오죽하면,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그렇게 정다웠던 고향친구들을 꺼려하기
까지 했겠는가? 난 동창회는 물론 그 친구들의 결혼식에도 참가하지 않았었다. 가끔 전화
연락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지만, 사고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현선
이 그 끔찍한 사고를 알고 있는 듯 물어온 거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큰소리로 물었다.
“현선씨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맞구나. 역시 ...”
현선이 애매하게 말을 중단했다. 나의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시 질문
을 하려는데, 현선이 먼저 설명을 했다.
“처음 삼돌씨 얼굴 보고 혹시나 했어요. 그때 카페리 침몰 사고 때 살아남았던 생존자가
아닌가 해서 ...”
“도대체 어떻게 ...?”
“사실 나도 그 사고 때 살아남았던 생존자 중 하나예요. 부모님들은 다들 그때 사고로 돌
아가시고, 나하고 동생하고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그럼 ...?”
현선이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삼돌씨 저 기억 안 나세요? 병원에서 ... 뭐 좀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 하기야 나
도 처음엔 긴가민가 했어요. 삼돌씬 그때보다 몸이 많이 불었잖아요.”
“그럼 혹시 형우 누나 ...?”
현선이 기뻐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났어요? 맞아요? 나 형우 누나예요.”
“예! 저도 이제 생각 났습니다.”
“참 묘한 인연이네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다니 ...”
“그 사고가 있은 지도 벌써 10년이나 지났군요. 허허허! 반갑습니다. 허허허!”
인연이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났으니, 반가워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웃
음 속엔 공허하다든지, 슬프다든지 하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내 웃음소리 때문인지 현선의
얼굴빛이 침울해져 버렸다. 평소의 그 명랑함을 잃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먼저 입을 땠다.
“참, 형우는 지금 어떻게 지냅니까?”
“군대 갔어요.”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됐나요?”
“그럼요. 벌써 스물 하난데요.”
예전 10년 전, 그 사고 때의 형우의 모습이 생각났다. 코가 낮고, 눈이 똥글똥글하고, 그
눈으로 내내 눈물만 흘리던 아이. 그 애는 날 형이라 부르면서 잘 따랐었다.
그때 끔찍한 사고가 있고, 그 속에서 살아남았던 나는 병원에서 사흘을 보냈다. 사실 사
흘씩이나 그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큰 사고를 겪었다고 보기엔 난 너무 멀쩡했다.
화장실 벽에 부딪쳐 생긴 혹을 제외하면, 긁힌 상처도 몇 없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내가
병실에서 그냥 안정을 취하기를 원했다. 장례식장이나, 사고현장을 보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큰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병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당시에 난, 나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잘 견뎌내고 있
었다. 부모님의 죽음과 미연의 실종에도 굳건하게 잘 참았다. 어버지의 말, 남자는 아무 데
서나 함부로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말을 충실히 지키면서 ,..
내 침대 옆에는 울보 애가 하나 있었다. 그 애가 형우였다.
형우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그때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아이였다. 고아가
되어서 많이 울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였다. 나이는 열한 살이라고 했는데, 또래 애들 보다
작아 보였다. 울고 있으니 더 가냘퍼 보였다.
“울지 마. 운다고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엉엉엉! 그래도 ... 자꾸만 눈물이 나고 ... 엉엉!”
형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안겨 그런 식으로 울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울고, 사고 당시에 보았던 참혹한 장면이 기억나서 두려워서 울고, 자다가 꿈에서 그 장면
들을 다시 보고 무서워서 울고 ... 그럴 때마다 난 그애를 친동생마냥 꼭 안아주며 위로를
해 주었다.
형우에게는 누나가 한 명이 있었는데, 그녀도 그때의 사고에서 다행이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내가 그 형우 누나를 본 건, 퇴원을 하던 날 아침이었다.
그날 나는 형우를 따라 그녀의 병실로 병문안을 갔고, 하얀 붕대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그
녀를 볼 수 있었다. 사고 당시의 폭발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형우가 설명해 주었다. 얼
굴 외에도 다친 곳이 많았다. 형우 누나는 거의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고의 참혹함
을 가장 많이 겪은 사람이 그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처음 보는 여자인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
를 해 주었다.
“다른 건 생각 말고, 빨리 나으세요.”
“고맙습니다. 형우한테 말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형우 잘 돌봐 주신다면서요.”
붕대 속에 감춰져 얼굴을 볼 순 없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보다 어린 여자애 같았다.
“뭘요? 지가 날 잘 따르니까 저도 동생같이 대하는 거죠.”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전 피부이식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병원에서
오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더 아파왔다. 힘든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하는 그녀에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웬만하면 그녀의 부탁을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날 오후에 퇴원을 해야 했고, 다시 병원을 찾을 계획이 없었다. 조만간 서울에
계신 큰아버지댁으로 이사를 해야 하기도 했다.
“죄송하네요. 전 오늘 퇴원해야 하는데... 그래도 시간이 나면 한 번쯤 형우 보러 오겠습
니다. 형우 걱정 마시고 자기 몸이나 잘 챙기세요.”
난 약속대로, 퇴원을 하고 난 며칠 뒤, 병원을 찾았고, 형우를 만났다. 아쉽게도 형우 누
나는 수술을 하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오빠 만난 줄 알면 형우가 무척 좋아할 거예요.”
과거사 이야기 하나로 나와 현선은 이미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호프집을 나오면서부터
현선은 날 오빠라 부르고 있었고, 나는 아예 말을 놓고 편하게 그녀를 대했다.
“형우는 지금 어디서 군복무하고 있지?”
“의정부에 있어요.”
“가깝네. 한번 면회라도 가 봐야겠는 걸.”
“이번주 일요일 날 같이 가요. 오빠 시간은 어때요?”
“나야 언제라도 상관 없지.”
그런 식의 대화를 나누면서 현선과 나는 다정한 연인처럼 거리를 걸어갔다. 그녀의 집까
지 두 시간을 넘게 걸었다. 현선은 걸어가는 내내 내 팔짱을 끼고 내 옆에 달라붙어 종알종
알 했고, 그래서 난 너무도 행복했다. 많이 걸었지만 다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찬 바람
이 술기운을 깨워주는 듯 해 그저 좋기만 했다.
나와 현선은 그녀의 자취방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고, 그만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웬지
아쉬웠다. 현선도 아쉬워 하는 것 같았다.
“오빠! 우리 요 앞 공원에서 조금만 더 얘기하고 가요?”
“그러지 뭐.”
난 현선을 따라 현선의 자취방 근처에 있는 아파트 공원으로 갔다. 아파트 공원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얘기를 하자던 현선은 말이 없었다. 피
곤하다는 자신의 얼굴을 내 어깨에 기대기만 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긴 머
리카락이 날려와 내 얼굴을 가지럽혔다.
나는 자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현선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너무 예뻤다. 유혹적이었
다. 뇌쇄적이었다. 난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서 들어올려 내
얼굴 쪽으로 당겼다. 현선은 전혀 반황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이끄는대
로 가만히, 자신의 모든 걸 맡기는 듯 보였다. 난 현선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찌리릭 하는
느낌이 왔다. 정말 황홀했다. 건데 ...
‘으악! 켁켁켁 더러워.’
미친 년, 미연이 또 지랄을 떤 거였다. 아까 일에 대한 복수가 분명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 난 정말 너무나 화가 나서 머릿속에 있는 미친 년에게 마구 고함을 질렀다.
‘이 기집애가 ... 조용히 해.’
‘왜? 근무시간 지났잖아?’
‘이게 ... 조용히 안 해. 너 지금 나 연애하는 거 방해할려고 거러는 거잖아.’
‘다 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어디 여자가 없어서 저런 헤픈 여자를 좋아해. 그리고 입냄
새는 왜 또 이렇게 독한 거야? 웩! 켁켁!’
미연이 그 미친 년이 나의 현선에게 욕을 하는 거였다. 거기다 구역질까지 해 대니, 난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서슴없이 하면서 미연을 위협했다.
‘너 조용히 안 할 거야? 자꾸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쫓아내 버린다.’
‘알았어. 흥! 가만히 있으면 될 거 아냐? 흥!’
웬일로 미연이 순순히 물러났다. 흥 하는 콧방귀 소리만 길게 남기고 ... 그게 미연이 다
음날 내게 할 복수의 암시라는 걸 당시의 난 몰랐다.
하여간 미연과의 실갱이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나의 황홀해야만 했던 키스는 엉
망이 되었다. 난 더 이상 황홀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구 짜증이 났다. 인상이 절로 구겨
졌다. 나는 키스를 중단하고 현선의 입술에 붙어 있던 내 입술을 떼어냈다.
나의 입술이 떨어지고, 약간 붉어진 현선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키스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현선이 감았던 눈을 떠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의 굳은 인상을 보
고 당황하는 빛으로 물어왔다.
“오빠! 뭐 잘못된 거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어떤데?”
“화난 것 같은 얼굴이예요. 혹시 나 때문에 ...”
“아냐. 너한테 화난 거 아니고 ... 하여간 그런 게 있어. 설명해 봐야 넌 안 믿을거야.”
“무슨 말인데요?”
현선이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뭔가 설명을 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기생하는 미연에 대해 말하긴 싫었다. 웬지 미연에 대한 말은 누구에게도 하기 싫었다. 그
게 현선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미연의 존재에 대한 추궁을 당할 지도 모를 그 자리를 그냥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
“됐어. 오늘은 그만 갈께. 밤도 늦었고. 내일 은행에서 보자. 잘 자. 현선아!”
난 그렇게 현선과 어영부영 헤어졌다. 현선이 오해를 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도망치기
에 바빴다.
저 년이 내 황홀한 키스를 방해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학 새내기 시절, 나에게
는 정말 좋아하던 여자선배가 있었고, 그때도 저 년이 방해를 놓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난 정말 저돌적이고, 무서운 거 모르는 청년이었다. 사랑이 뭔지
도 모르면서, 오로지 한 여자에게 내 시선을 고정시키고 미친 놈처럼 돌격 앞으로 했다. 신
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그 여자선배를 보고는, 휘황찬한한 조명이 쏟아지는 스테이지 위에서
섹시댄스를 추는 그녀를 보고는, 나는 한눈에 뻑 가 버렸었다. 성숙한 여자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녀에게 난 한순간에 빠져 버렸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연이 질투를 하는지 계속 투덜투덜 됐지만, 난 상관 안 했다. 그 여자선배에 대한 온갖
흠담을 늘어 놓았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의 난 그 여자선배가 내 운명
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선배의 이름은 최혜경이었다. 나보다 한삷 많은 대학 1년 선배였지만, 난 주체할
수 없는 연심을 마구마구 보냈다. 난 내 마음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고, 동기들에게, 선배
들에게, 그 마음을 그대로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 학내에 내가 혜경누나를 좋아한다는 소문
이 짝 퍼졌다. 그녀도 그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내가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려는데, 혜경누나가 날 기다리고 있
었다. 고맙게도 나에게 말도 걸어왔다.
“니가 엄삼돌이니?”
“예! 맞아요. 혜경누나!”
혜경누나가 내 꼬락서니를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나야 당연히 부티가 풀풀나는 차림
이었다. 실제로 일반 대학생들과는 비교 안되게 난 돈이 많았고, 그 돈을 마구 쏘 대고 있
었다. 날 유심히 살피던 혜경누나가 제안을 햇다.
“오늘 나랑 술 한 잔 할래? 너한테 할 말 많은데 ...”
“저야 좋죠. 내가 누나랑 함께 술 마시는 걸 얼마나 꿈꿔 왔는데요.”
우리는 학교 앞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말은 주로 내
가 했다. 술을 마시며, 난 내게 돈이 많다는 애기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러면서 나의 연심을 다 털어 놓았다. 마구잡이로 구애를 했다. 혜경누나는 홀짝
홀짝 술잔을 비우며, 듣고만 있었다.
“누나! 나랑 사귀지 않을레요?”
“글세 ... 일단 내 옆으로 와 봐.”
나는 혜경누나가 시키는대로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내가 혜경누나의 옆자리에 앉자
마자, 그녀가 갑작스레 내 얼굴을 당기더니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난 놀라고, 당황하고 그
랬다. 정말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 키스는 내가 태어나서 여자랑 하는 첫키스였고,
그래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만치 황홀했다는 말이다. 정말로 많이 황홀했고 머릿속이
텅 빈 듯 멍멍했다. 건데 그때
‘악~~~~~~! 싫어. 더러워. 징거러워.‘
물론 미연이었다. 혜경누나의 혀가 내 입술을 핥아주고, 내 입속으로 들어오고, 내 혀를
감고, 그러는 걸 미연이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거였다.
이미 말했듯 미연이 그런 식으로 고함을 질러대면 난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당시에도
내 머리는 깨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비명소
리로 하여 내 황홀했던 기분을 망친 거였다. 나는 미연이 너무 미웠다. 그래서 화를 냈다.
‘그만 해. 이 못된 기생충아. 내 인생에 방해만 놓는 기생충아.’
‘뭐? 기생충? 너 말 다했어? 후회 안 하지?’
‘후회를 내가 왜 해? 넌 언제나 나한테 달라붙어 있는 기생충 맞잖아.’
‘흥! 좋아. 나보고 기생충이라고 했지. 두고 봐. 나 이제부터 정말 기생충 할테니까. 내가
너한테서 떨어질 것 같애. 니가 늙어서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착 달라붙어 있을거야?’
‘이 기집애가 끝까지 ...’
미연과 다투며, 나는 나도 모르는 새 화난 얼굴을 한 모양이었다. 혜경누나가 그런 내 표
정을 보고 의아한 빛으로 물어왔다.
“표정이 왜 그래?”
난 변명하느라 무지 고생을 해야 했다. 미연의 존재를 털어놓지 못하는 입장이라서, 마구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그러니 혜경누나가 말도 안되는 오해를 했다.
“왜? 내가 이러는 거 싫어?”
내가 싫어할 턱이 없지 않은가? 그 순간을 얼마나 학수기대했는데 ... 얼마나 황홀했던 첫
키스였는데 .... 미연이 그 기집애의 방해만 아니었더라면 황홀경에 빠져 홍콩도 갈 수 있었
는데 ... 난 이런 내 마음을 설명하지 못해 미칠 것만 같았다. 양손을 마구 내저으며,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느라 계속 말을 더듬어야만 했다.
“아뇨. 그건 절대 아니예요.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게 아니고 ... 그게 그러니까 ...”
“그럼 ... 너 혹시 여자랑 키스해 본 거 이번이 처음이야?”
다행이었다. 혜경누나가 이번엔 새로운 오해를 한 거였다. 난 낼름 대답했다. 뭐 오해라고
보기도 힘드니까. 내 첫키스가 맞으니까..
“예!”
낼름 대답을 하긴 했지만, 난 좀 많이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붉혔다. 반면 혜경누나는 나
의 대답에 기분이 엄청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너 첫키스 여자네. 호호호!”
기분 좋아 크게 웃고 있는 혜경누나 앞에서 난 계속 부끄러워하며 쩔쩔 매야 했다. 그래
도 다행히 미연으로 인해 생긴 오해는 잊어버린 듯 보였다.
나와 혜경누나의 첫키스 사건이 있은 후, 나의 연심은 더욱 더 깊어졌다. 고맙게도 혜경
누나는 그런 내 마음을 잘 받아주었다. 난 너무 행복했다. 당시에는 그런 행복한 감정을 다
시는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난 매일같이 혜경누나의 뒤를 쫓아다녔다. 혜경누나도 날 만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뭐 내가 심부름을 그렇게 열심히 해 주니, 머슴 하나 부린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혜경누나는 내게 많은 심부름을 시켰다. 리포트를 대신 적어 달라고도 하고, 도서
관에서 책을 빌려 오라고도 하고 그랬다. 가끔은 얄궂은 일까지 내게 시켰다. 예를 들어, 여
자 스타킹이나, 생리대를 사다 달라고 했다. 심지어 난 혜경누나의 강의시간에 대신 출석해
서,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당시의 내겐 기쁨이었다.
내 머릿속의 미연은, 날 마구 부려먹는 혜경누나를 나쁜 기집애라고 욕했다. 머슴처럼 심
부름이나 하는 나를 바보천치이라고 놀렸다. 여자를 너무 모른다고 짜증을 냈다. 속고 있다
고 충고를 했다. 하지만 난 무시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혜경누나를 따라
다녔고, 그녀의 머슴이기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본심을 알게 되었다.
그날은 10월의 마지막날이었다. 나와 혜경누나는 10월의 마지막날이라는 이유로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건데 그날은 평소보다 좀 과음을 한 것 같다. 혜경누나가 술내기를 하자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뭐 나야 원래 술이 센 편이지만, 혜경누나도 만만치 않았다. 탁자 위
에 양주병이 열 병 정도 쌓일 때까지도 우린 거뜬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머릿속의 미연이 걱정이 됐는지 날 말렸다.
‘그만 마셔. 오늘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애.’
‘상관 마.’
‘니가 그렇게 많이 마시면, 나도 머리가 아프단 말야. 너도 알잖아?’
술에 취해서였을까? 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난 몰라. 상관 안 해. 싫으면 니가 나한테서 떨어지면 되잖아. 왜 나한테 붙어서 귀찮게
그러는 거야? 꺼져 버려.’
‘싫어. 난 여기, 니 머릿속이 좋아.’
그렇게 또 다툼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난 가릴 말 안 가릴 말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이 이
르렀다.
‘넌 미친 년이야. 미친 처녀 귀신이야.’
‘뭐? 흥! 흥! 흥!’
몇 번이나 콧방귀를 끼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앙앙앙! 엉엉엉!’
울음소리는 차츰 커졌고, 그제야 난 후회를 했다. 미연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마
구 당황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혜경누나가 물어 왔다.
“표정이 왜 그래?”
난 급한 김에 엉뚱한 핑계를 됐다.
“머리가 좀 아파서 ... 술을 너무 마셨나 봐. 나 여기 탁자에 기대고 눈 좀 감고 있을 테
니까 잠시만 기다려 줘.”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실 머리가 좀 아프긴 했다. 술 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보다는 점점 높아지는 미연의 울음소리가 내 머리를 마구 웅웅거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난 내가 한 말을 지키려는 듯 탁자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서럽게 울
고 있는 미연에게 사과를 했다.
‘미연아!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울지 마. 응~?’
미연이 계속 울었다. 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미연의 울음을 멈춰야 했다.
‘미연아! 제발 그만 울어. 니가 계속 그렇게 울어 대면, 나도 머리가 엄청 아프단 말야.
응~? 제발 ...’’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미연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내 정신도 차츰 맑아졌
다. 그때 현희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경이 너 아직도 저 애 만나는 거야?”
현희누나는 혜경누나의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몇 번 합석해서 같이 술을 마신 적도 있었
다.
내가 자는 줄 알았는지 혜경누나는 나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을 했다.
“왜? 저 애 귀엽잖아. 바보같고, 돈도 많고, 심부름도 잘하고 ...”
“창석선배는 어쩌고? 너 창석선배랑 다시 사귀게 됐다며.”
창석선배는 우리 학과 대학원생으로, 예전에 혜경누나의 애인이었다. 나도 그 사실은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희누나가 하는 말은 과거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자
는 척 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글세 ... 다시 사귀자고 하긴 했지만 ...”
“엊그제 창석선배랑 잠도 잤다며?”
“그래서 ...?”
“너 그 선배랑 결혼할려는 거 아니었어?”
“기집애도 참, 촌스럽긴. 남자랑 잠자리 한번 했다고 결혼까지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 버려. 지금이 조선시댄 줄 알아? 그런 식이라면, 난 백 번도 넘게 결혼해
야 할 거야.”
“너 얘랑도 잤어? 삼돌이랑 ..?”
“아니, 아직 ... 뭐 조만간에 한 번 같이 자줄까도 생각해.”
“넌 정말 나쁜 기집애야. 너무 밝히는 거 아냐?”
“요즘 여대생들이 다 그렇지. 니가 오히려 이상한 거야.”
“그런가?”
혜경누나가 저런 여자였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떤
심정인지 상관 않고, 조금 전까지 울고 잇던 미연이 좋아라 떠들어 댔다.
‘봐. 내가 그랬잖아. 저 기집애 나쁜 애라고 ... 헤픈 애라고 ... 진작 내 말을 들어서야지.’
‘그만 해.’
‘왜? 잔소리 듣기 싫어? 그럼 잔소리 안 듣게 똑바로 행동하면 될 거 아냐?’
‘그만 하라니깐...’
내가 미연과 그런 실갱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혜경누나와 현희누나의 대화는 계속 내 귀
를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내 가슴을 바늘로 쿡쿡 질러대고 있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쩔 거야? 얘랑 계속 만날 거야.”
“사실은 얘랑 노는 것도 이제 좀 지겹기도 해서, 조만간 헤어질려고도 해. 건데, 얘네 집
이 엄청 부자인 것 같아서 ...”
“그래서 ...”
“좀 고민하고 있다는 거지 뭐. 너도 알잖아. 나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 뒤로도 현희누나와 혜경누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계속 술에 취한 척, 자는
척 해야 했다. 정말 참기 힘든 시간이었다.
혜경누나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비틀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혜경누나의 본심을 알게 된 충격에 힘이 빠져서
그렇게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아까까지 날 놀리기만 하던 미연이 그런 날 위로할려고 했다.
‘삼돌아! 힘 내.’
‘고마워. 미연아! 진작에 니 말 들었어야 했는데 ... 나 너무 바보지?’
‘아냐. 니가 너무 착해서 그래. 그 기집애가 나쁜 애야.’
‘나 이제 어떡하면 될까?’
내 말을 오해한 미연이 놀라서 도로 물어왔다.
‘너 설마 ... 그 기집애 계속 만날 거야?’
‘아니.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정 떨어졌어.’
‘그럼 뭐 더 고민할 거도 없겠네. 그딴 나쁜 애 그냥 차 버려. 니가 아쉬울 게 뭐 있어.
넌 진짜 예쁘고, 착하고 그런 애 만나면 되잖아.’
‘나 이제 자신이 없는데 ...’
‘왜?’
‘혜경누나한테 그런 일 겪고 나니까, 이젠 여자가 무서워. 나 이러다 영영 여자 못 사귀는
거 아닐까?’
‘걱정 마. 넌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도와 줄께.’
‘정말이지?’
‘그럼. 약속할께.’
미연은 그렇게 철석같이 내게 약속을 헸다. 순진한 난 그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미연은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여자가 생길 때마다 방해만 놓았다. 그애
들이 모두 자기 마음에 안든다나 뭐라나 ... 그래서 자기가 하는 방해는 방해가 아니고, 오
히려 나를 위하는 거라고 우겼다. 정말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제대로 날 도와줄 거라고도
했다. 미연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약속 어긴 적 한 번도 없다고만 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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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엔 미연이 있다 #03
티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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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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