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다
숙종대왕 때 대제학과 판서를 겸한 서하 이민서 선생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국민 사기의 진작 및 민족적 자긍심 고취의 일환으로 이순신, 김덕령, 김천일, 이종인, 박광옥 장군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우리나라 영웅들을 발굴하여 알리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이 일은 생명을 건 사명이었다. 이는 서하 이민서 선생의 스승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덕령 장군의 향사(享祀)를 주선한다고 하니 과연 훌륭한 일이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김 장군을 죽인 세력이 마치 하늘을 뚫을 듯이 팽창하고 있네”라고 하면서 제자의 안위를 걱정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여기에 서하 이민서 선생이 지은 ‘명량대첩비 비문(鳴梁大捷碑 碑文)’을 소개함으로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한다.
명량대첩비 비문(鳴梁大捷碑 碑文) (해남 충무사)
································································ 서하 이민서 선생 지음
『1597년 통제사 이공(李公)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명량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충무공이요 그의 전과 중에서 명량의 싸움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 행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가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옥포, 당포, 고성의 당항포에서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번번이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고 삼도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대로 한산도에 몇 해 동안 주둔하게 되어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해에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과거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해상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사태가 위급함으로 다시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공을 대신하여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배와 장비와 병졸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도 적에게 빼앗겼다. 공은 백지상태로 된 현지에 단신으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들이며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가까스로 십여 척을 마련하였다. 이것으로 명량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큰 배와 많은 군대로 바다에 가득히 몰려왔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여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좁은데다가 마침 세차게 밀려오는 밀물의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를 이용하여 산이 내려 누르는 듯이 아군을 향하여 몰려들었다. 이를 본 우리 군대는 모두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공은 힘을 내어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병들은 이공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고 배는 나는 듯이 적선들 사이로 출몰하여 대포를 쏘아대니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바닷물도 끓어오르는 듯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적의 전함 오백여 척을 쳐부쉈고 적장 마다시도 죽였다.
임진왜란 중 연안 해주 등지에서 승전이 있었다 하나 이는 모두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하며 공과 같이 한 해역을 도맡아 독자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노량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바쳤고 적은 이 땅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정부에서는 왜란을 평정한 공적으로 공을 우두머리로 논정하여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벼슬을 좌의정에 추증하고 노량에 충민사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 자는 여해, 아산 출신이다. 명량대첩비는 남방 인사들이 전적지인 명량에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다. 원비 숙종 11년(1685년) 3월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녕 부사 이정영이 쓰고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를 쓰다.』
2024. 8.12.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