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발표된 것은 1935년 이었습니다. 20세기라는현대시대가 우리나라에도 도래한 시기였지만 지금과 비교해보면 한참 옛날입니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삶을 기준으로 본다면 정말 까마득한 시대죠. '돌싱'으로서의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과부'라는 멍에는 '열녀'와 '수절'이 강요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이런 시대상이 반영되어 '젊은 과부'와 '사랑방의 젊은 하숙생 남자'와의 썸 타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감질나게 두남녀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관계로 미적거리다가 끝나버리죠. 20쪽 남짓한 짦은 단편소설입니다. 이 단순한 별거 아닌 내용을 6살된 아이의 호기심과 동심이 반영되어 애틋한 두 남녀의 억제된 심리가 잘 나타난 것입니다.
신상옥 감독은 1961년에 이 주요섭의 단편 원작을 영화화 하였습니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턱 없이 짧은 분량이지만 신상옥 감독은 원작의 주제와 주요 흐름을 훼손하지 않고 고스란히 인용하고, 주요 대사까지 그대로 활용하면서 대신 '영화'라는 영상물의 성격에 잘 맞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첨가하여 원작을 뛰어넘는훨씬 애틋하고 소박한 로맨스 영화로 완성했습니다. 소설이라는 '활자 매개체'를 영화로 만들때 각색과 연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6세 소녀 옥희(전영선),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인데,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릅니다. 하지만 옥희가 세상에서 젤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상한 엄마(최은희)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그 집에 옥희의 외삼촌(신영균)이 청년 한 명을 데리고 옵니다. 옥희 아버지와도 잘 알았던 사이라는 그 청년(김진규)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잠시 동안 그 집의 사랑방에 하숙생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옥희는 그 화가 아저씨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사랑방에서 눌러살다 시피했고, 그 아저씨도 옥희를 매우 예뻐했습니다. 옥희는 그 화가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막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그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자꾸 딴 소리만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그 아저씨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것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반찬인 '계란'을 왕창 사서 매번 밥상에 놓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6살 소녀 옥희의 눈으로 본 이 어른들의 세상, 그야말로 6살 소녀 눈높이에 딱 맞추어 진행되는 순수하고 동심어린 모습입니다. 옥희에게는 그저 천진하고순수한 세상, 하지만 그 내면을 깊이 있게 볼 경우 '시대'에 순응하고 살아야 하는 애틋한 젊은 과부의 한서린 삶이 맞부딫혀 있는 것입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굉장히 애틋한 로맨스 영화입니다. '종착역' '여수' '여정' '밀회' 등 유명한 서구의 고전 로맨스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별다른 애정관계나 표현 없이 전개되면서도 절절한 다른 로맨스 영화를 압도하는 수준의 작품은 이후에 '8월의 크리스마스'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영화에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과부 여주인공과 화가 청년간의 실질적인 로맨스가 감정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딱 한 번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서만 두 사람의 직접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이 드러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야말도 아무도 절대 모르는 두 사람만의 주고 받은 편지. 그만큼 홀로 된 과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고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소설 다운 시대적 반영입니다.
아마 옥희라는 꼬마가 없었다면 더없이 답답하고 진부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옥희는 이 두 사람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영화에서의 모든 표현과 심리는 결코 '옥희의 눈높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어야 하고 애틋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옥희는 상황파악 못하고 울고 떼쓰기도 하고 천진하게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원작에서는 친정어머니가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시어머니로 역할을 바꾸어 상황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 역시 오랜 세월을 수절하며 살아온 과부 인생, 이런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로서 사랑방 손님과의 연애는 정말 꿈꾸기도 어려운 현실, 그리고 원작에서 계란장수 할머니가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김희갑을 등장시켜 하녀(도금봉)와 사랑에 빠지는 양념같은 이야기를 만듭니다. 역시나 과부인 하녀는 홀애비인 계란장수와 연애를 하고 결국 임신에, 결혼까지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슬쩍 곁들이면서 같은 듯 하지만 다른 상황일 수 밖에 없는 여주인공의 심리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탁월한 각색이지요.
결코 빼어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최은희, 후배인 김지미라는 빼어난 미모의 여배우가 60년대 독보적인 미인으로 활약을 했는데, 두 배우의 차이를 보면 김지미는 많은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미모를 늘 과시했지만 영화는 잊혀지고 배우만 기억나는 경우가 많은데 최은희는 선택하는 많은 영화들을 인상적인 수작으로 만드는 마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참으로 단순한 이야기의 영화이고 소품임에도, 이게 신상옥 감독의 연출과 최은희라는 배우의 손을 타서인지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원작을 뛰어넘고, 원작을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지요.
50-60년대의 대표배우 김진규는 서글서글한 훈남 주인공으로 무난한 역할을 했고, 김희갑, 도금봉 등 양념 조연들도 톡톡히 역할을 합니다. 시어머니 역의 한은진도 기존의 구시대 영화들과 드라마에 등장한 꽉 막히고 고약한 시어머니상과는 달리 구 여성이면서도 나름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여인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무난한 호연들을 보인 배우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1등 공신은 아역배우 '전영선'입니다. 당시 8살에 불과했지만 이미 수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고, 이 영화에서는 사실상 주인공인 셈인데, 후시 녹음이라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던 시대에 상당히 더빙과 입을 잘 맞추고 있으며(이건 성우의 능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죠) 아이로서의 천진함과 한 편으로는 어른스러운 상황대처 등의 모습들을 그럴싸하게 보여줍니다. 옥희의 역할이 제대로 되어야 살아날 수 있는 영화인데 전영선이 그걸 잘 살린 것이지요.
한국 영화사를 거론할 때 꼭 언급되는 영화인데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대작도 잘 만드는 신상옥 감독이지만 이렇게 심리 묘사가 잘 되어야 하는 드라마 장르 소품도 일가견 있게 만들었습니다. 피아노치는 장면을 통해서 표현하는 무언의 심리묘사 장면, 소설에서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던 두 번의 편지에 대한 내용, 20쪽이 짦은 단편을 토대로 이만한 순정 로맨스를 만들어낸 것은 정말 대단한 역량입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 Mother and a Guest https://youtu.be/c_bWx5n0n8Y?si=mqW4atRjJDxmw1XQ |
첫댓글 영화가 무척 재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