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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리랑과, 아리랑의 어원
이번 여행의 큰 테마는 아리랑과 함께하는 정선 여행이다. 이번 여행에 나서기 전에 나는 아리랑 이라는 뜻을 궁금해 하였고 어원은 무었인가 궁금하여 여러 자료를 찿아보던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 연합회 상임부회장의 아리랑에 대한 해석이 눈길을 끌기에. 그를 통해 아리랑의 근원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로 하자.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이 송도(松都)의 두문동 에서 은신 하다가 그 중 7명이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 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면서 ‘후렴구’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정선아리랑에는 시대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떼타는 일의 고단함과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전승과 보전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리랑’의 어원과 그 상징성
크고 높은 고개에서 유래된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한(恨)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지 수년이 됐다.아직도 우리에게 아리랑은 여전히 우리민족의 ‘恨’(한)의 정서를 상징한다. 수없이 듣고 부르기도 하는 ‘아리랑’이지만 아리랑의 뜻을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요사이는 아리랑을 슬픔만이 아닌 즐거운, 희망의 아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여러 행사와 움직임도 많다.
이런 가운데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 연합회 상임부회장의 아리랑에 대한 해석이 눈길을 끈다. 그를 통해 아리랑의 근원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로 하자.
오늘날 한강의 한자표기 ‘한(漢)’은 ‘큰’, 혹은 ‘위대한’이란 뜻으로 쓰인 순수 한국 고대어 ‘한’의 차음(借音) 표기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중국에 있는 강인 한수(漢水)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라는 설도 있다. 또한 한강 양안에 살던 고대인들은 한반도에서 원시 농경단계에 먼저 들어간 선진부족이었으며 '한'부족으로 불렸고 이들의 일부가 고조선 건국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한'부족이 그 후 한문자(漢文字)로 韓, 桓 등 여러 글자로 차음 표기됐다고 한다. 한강의 ‘한(漢)’을 우리의 고유한 말인 ‘한’의 한자 차용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한’과 ‘아리’는 같은 뜻이거나 비슷한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리’는 ‘크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리랑’의 ‘랑’은 어떤 뜻을 지닌 말일까? ‘아리랑’ 뒤에 항상 등장하는 낱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라는 낱말이다. 왜 각 지방의 ‘아리랑’ 다음에는 반드시 고개라는 낱말이 따라 나올까? ‘랑’과 ‘고개’는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말에는 같은 뜻의 형태가 겹쳐 글에 군살을 끼게 만드는 비경제적 동의중복(同意重複) 표현, 즉 겹말이 많다는것이다. 이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동의어가 많다보니 생긴 현상이다.
예를 들어 추풍령고개(‘령’과 ‘고개’ 중복), 동해바다(‘해’와 ‘바다’ 중복), 약숫물(‘수’와 ‘물’의 중복), 무궁화꽃(‘화’와 ‘꽃’ 중복), 농번기철(‘기’와 ‘철’), 황토흙(‘토’와 ‘흙’ 중복), 초가집(‘가’와 ‘집’ 중복), 역전앞(‘전’과 ‘앞’ 중복), 족발(‘족’과 ‘발’ 중복), 고목나무(‘목’과 ‘나무’ 중복), 단발머리(‘발’과 ‘머리’ 중복) 등과 같은 동의 반복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추풍령의 ‘령(嶺)’은 고개‘령(嶺)’인데 그 뒤에 또 고개라는 같은 뜻의 우리말을 습관적으로 붙여 말하고 있듯이 ‘아리랑 고개’의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變音)으로 ‘랑’ 다음에 고개를 습관적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아리랑’의 ‘랑’을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아리랑 고개’는 ‘크고 높은 고개’로 해석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마을에는 임을 보내고 가신 임을 기다리는 고개가 어디에나 있었다.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의미를 지닌 특별한 장소였다. 각 지방에 퍼져있는 ‘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떠나는 임을 아쉬워하고, 돌아오지 않는 임을 원망하고 목 놓아 기다리는 한(恨)의 정서가 군데 군데 잘 배어져 있다. 정리해 본다면 ‘아리랑’이라는 낱말은 ‘아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리’는 ‘크고 높다’는 뜻을 가진 우리의 순수 고대어이며 ‘랑’은 고개 ‘령(嶺)’의 변음으로서, ‘아리랑’은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라는 것이 우리 조상들에게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였으므로 ‘아리랑’이 갖는 상징성은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한(恨)이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각 지역에 퍼져있는 ‘아리랑’은 그 곡조와 가사가 서로 달라도 공통적으로 이별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가 ‘아리랑’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은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 잘 알려져 있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이와 유사한 음성이 후렴에 들어있는 민요의 총칭으로 남북을 통틀어 약 60여종 3천6백여 수에 이른다고 한다.
대표적인 ‘아리랑’으로는 평안도의 '서도 아리랑', 강원도의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이 있고 함경도의 '함경도 아리랑', '단천 아리랑', '어랑타령'이 있으며 경상도의 '밀양 아리랑', 전라도의 '진도 아리랑', 경기도의 '긴 아리랑' 등이 있다. 그밖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아리랑’이 있다.
그러나 외국인이 우리들에게 ‘아리랑’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설명해줄 수 있는 답을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일반 대중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음악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라면 이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이론이 워낙 많고 정설로 굳어진 것이 없는지라 답답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대표적인 설은 다음과 같으며,
각기 제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지만 무리한 해석이 많은 듯 싶다. 1) 南 師古(1509-1571)의 亞裡(아리)嶺설 2) 이 승훈(1790)의 啞魯聾(아로롱)설 3) 황 현(1900)의 阿里娘(‘아리랑’)설 4) 김 지연(1930)의 閼英(알영)설 5) 권 상노(1941)의 啞而聾설 6) 이 병도(1961)의 樂浪(아라)설. 7) 양 주동(1962)의 아리(明)嶺설. 8) 원 훈의(1977)의 아리다(疼痛)설 9) 임 동권(1980)의 後斂(助興)설 10) 정선 설화(1987)에서의 아리오(알리오)설 11) 김 연갑(1988)의 메아리('메'의 탈락)설 12) 박 민일(1988)의 啞剌唎(아라리)-阿賴耶(아라야)설 13) 정 호완(1991)의 아리다-쓰리다(‘아리랑’<알?>-쓰리랑<슬?>)설 14) 정 익섭의 얄리 얄리 얄라리 설(국어국문학사전) 15) 김 덕장의 我離娘(나는 아내를 여의었다)설 16) 남 도산의 我耳聾(나는 귀가 먹었다)설 17) 강 대호의 我難離(나는 가정을 떠나기가 어렵다)설 19) 일인 학자의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하자)설 20) 최 재억의 卵郞(卵娘)설 21) 김 재수의 阿娘(아랑 전설)설 22) 이 능화의 兒限偉(상랑문의 아랑위 포랑동에서 유래)설 23) 이 규태의 아린(여진어 차용)설 24) 서 정범의 알(卵)아리요설 25) 김 승국의 阿利嶺(크고 높은 고개)설 그중 몇 개의 학설을 제시하면 낙랑(樂浪)설이 있는데, 이것은 이병도의 학설로 고대 낙랑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의 이름인 ‘아라’에서 음이 변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김지연의 알영(閼英)설은 신라 박혁거세의 비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 또는 ‘아이영’ 으로 부르다가 이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이규태의 ‘아린’(고향)설은 비교언어학적인 방법으로 여진어의 고향, 즉 ‘아린’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재숙의 ‘아랑’(阿娘)설은 밀양 아랑전설의 주인공인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면서 주민들이 ‘아랑 아랑’하고 부른 것이 변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남도산의 설을 김지연이 소개한 ‘아이롱’(我耳聾)설은 조선 후기 경복궁 중수 때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기 싫다는 뜻의 ‘아이롱’에서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원훈의와 서병하가 주장한 ‘아리고 쓰리다’설은 우리말 고어의 조어론적인 분석방법으로 말 그대로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다.
이외에도 인도 신화의 천하만사를 주관하는 ‘아리람 쓰리람’ 신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들 학설 중에는 지명과 인명에서 유래된 설이 있는가 하면 말의 의미에서 추론된 설, 전설과 신화에서 유래된 설 등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시도됐다. 이처럼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많은 학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아직도 정해져 있지 않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는 다음과 같이 아리랑에 대해서 논하고있다 목차 1.[개 설] 2.[역 사] 3.[아리랑의 어원 및 구조] [개 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어서 이른바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이 쓰이고 있을 정도이며, 멀리 소련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요들을 토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삼대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들 세 가지 아리랑이 각 지역 민요의 기본적 음악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내의 자생적인 전통민요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삼대 ‘전통아리랑’과 구별된다.
[역 사]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로 일컬어지던 노래이다. 정선을 비롯해서 이웃 영월과 평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를 가장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서를 따라 길게 설정될 수 있는 이른바 메나리토리권에서 민요 <메나리>(또는 메노리)의 음악언어와 가장 밀착된 노래로 <정선아라리>가 평가될 때, 메나리야말로 가장 전통성 짙은 민요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의 기층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메나리→어산영(경상도지역)→산아지(호남지방)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정선아라리>의 전통성은 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 논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라리>가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영동·영서일대에서는 <정선아라리> 외에 <강원아리랑> 또는 <자진아리>로 일컬어지고 있는
또 다른 아리랑이 있다. <정선아라리>에 비해 훨씬 장단이 빠르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여음을 지닌 이 <자진아리>는 영서·인제 지방의 <뗏목아리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뗏목아리랑>이 그렇듯이 일노래로서의 쓰임새를 진하게 지니고 있다. 학산과 같은 강릉 교외 일대에서는 논노래 또는 들노래로 쓰이고 있지만, ‘어루리’며 ‘아라성’이라는 특수한 여음을 지닌
횡성·원주·여주·이천 일대의 아리랑과 충주지역의 아리랑도 기본적으로는 이 <자진아리>에 속하여 있다고 보이는 들과 논의 일노래들이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선아라리>는 놀이노래라는 성격이 강하다. <정선아라리>에서는 엮음 아라리라는 특수한 형식의 아라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노랫말이 일반 아라리보다 훨씬 길어서, 노래의 첫머리에서 중간 정도까지 상당한 부분이 빠른 말투로 사설을 엮어가는 노래이다.
그래서 일반 아라리에 엮음 아라리를 대비시킬 경우,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대비를 연상하게 된다. 호남 일대는 국악학계에서 육자배기토리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 지방 민요들이 육자배기를 기층적인 음악언어로 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면서도 그 음악언어의 특색이 육자배기와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후대에 약간의 윤색이 가하여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부, 경상남도 서부지역, 그리고 제주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나, 밀집 분포지역은 진도이다. 한편 정자소리토리권인 영남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그 음악언어의 특성이 정자소리의 음악언어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밀양아리랑>의 분포는 밀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다른 두 지역 아리랑에 비하여 그 분포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셈이다. 정선과 진도 그리고 밀양 등 3대 아리랑을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잡을 경우 그 가운데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의 밀착성이 짙어, 주어진 지역 민요의 음악적 문법의 기층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선아리랑>이 민요적 지역성과 전통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선아리랑>은 짙은 민요적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정선의 현지 주민들에게서 그 기원이 고려 말에까지 소급될 것으로 믿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서의 긍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그 들은 아리랑의 남상이 그들의 생활공간인 태백산맥의 중허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지닌 민요적 원형성과 그리고 현지 주민의 믿음 및 그 전승태도 등을 묶어서 생각할 때 아리랑을 산간의 ‘흙의 노래’로서 비교적 쉽게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흙의 노래’는 ①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토착성이 강할 것, ② 지역적인 일상생활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 ③ 민간 전승다운 전통성을 지니고 있을 것, ④ 주어진 지역사람들의 보편성이 큰 노래 또는 소리일 것 등, 네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네 속성을 통틀어서 단일한 명제를 엮어낸다면, 오래 전부터 전하여진 것으로 믿고 지역주민 대다수가 그들의 지역 내 일상생활을 실어서 노래하고 있는 소리가 곧 ‘흙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그 기층구조가 메나리나 정자소리와 마찬가지로 밭과 논, 그리고 물이며 산에서 부른 ‘일노래’라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산과 들을 통틀어서 흙이라는 말로 포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흙의 소리인 아리랑은 산과 들·밭에서 부르는, 혹은 집안에서 부르는 ‘놀이노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애원성·탄성(嘆聲) 등이 실린 개인적인 소리라는 속성을 강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박한 주관적인 서정이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지녔던 시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세타령과 팔자한탄 등이 우세한 넋두리나 푸념에 견줌직한 소리였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개인생활 주변 일상성의 묘사를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갖추었을 또 다른 속성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의 기원설과 전설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아리랑에서 말하여 주고 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군·고종 때 당시 서울에도 이미 아리랑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경복궁 공사를 위한 징용의 가혹함과 이 공사 경비조달을 위한 가렴주구가 아리랑에 얽혀서 전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대한제국 말기의 가혹한 정치와 사회현상을 타고 아리랑은 ‘흙의 소리’에서 ‘역사와 사회의 소리’로 탈바꿈해 나갈 결정적 단서 내지 동기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시대를 계기로 해서 비로소 아리랑이 역사성·사회성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랑의 기원을 고려 말 유신들의 망국의 한에서 찾고 있는 아리랑의 기원설 내지 전설이, 이미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을 역사·사회성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흙다움과 역사·사회다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중의 우세를 지적할 때 제기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은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역사·사회성이 대원군 시대와 같이 역사적 충격을 받아 상대적으로 흙다움보다 훨씬 목소리를 높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제2의 충격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羅雲奎)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더불어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첩되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리랑의 자체 변화는 민간전승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될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으로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의 테두리를 떠나 다른 문화영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사회의 민간전승에서 좁게는 도시 민간전승, 넓게는 사회 민간전승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민간전승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 경우, 사회 민간전승이란 동시대의 한국사회 전체가 공유한 민간전승임을 뜻한다. 그런 한편, 아리랑은 그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대중문화·상업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 것이다. 이 같이 ‘흙의 소리’ 아리랑이 역사화·사회화해 간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이른바 제3세계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족주의적 문화운동으로서 일어난 민요운동과 동궤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삼대 전통 아리랑이 그 원류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은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동기 구실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중가요화한 아리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민요아리랑 또는 전통아리랑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 말하자면 상업시대 및 산업사회의 대중들의 노래로서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가령 <아리랑삼천리>(박시춘 곡)를 효시로 삼아서,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다섯 편 가량의 대중가요 아리랑에서 오늘날의 <영암아리랑>(하춘화 노래)에 이르기까지 ‘대중가요 아리랑’의 맥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전통민요→신민요→대중가요의 길을 걸어갔으며, 한편 ‘가곡 아리랑’의 흐름도 있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신민요아리랑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관한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노랫말로 유명하지만, 음악언어의 원류는 대체로 <정선아라리>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숱한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창작되었을 때, <경기아리랑>은 달리 <본조아리랑>으로도 호칭되었거니와 그것은 <경기아리랑>이 신민요아리랑의 본조, 곧 본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기아리랑> 이 외의 나머지 신민요아리랑들은 <별조아리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대 아리랑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랑의 물살은 시대의 차이, 갈래의 차이를 넘어서서 우리의 근대사회에 널리 또는 깊게 파장을 미쳐간 것이지만,
<종두(種痘)아리랑>이나 <한글아리랑>으로 이름지을 만한 특수한 아리랑의 파생을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종두아리랑>은 천연두 예방주사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한글아리랑>은 문명퇴치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각기 창안된 것들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들은 아리랑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독립군아리랑>이라는 또 다른 보기와 함께 이들은 아리랑이 민요의 텃밭인 민간전승 밖으로 벗어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아리랑의 탈민요 내지 탈민간전승을 크게 보아 아리랑의 원심력 방향 확산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중가요화나 가곡화도 그 같은 확산의 일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리랑의 탈민간전승운동이 굳이 한 방향, 한 범주로 묶여서 제약받을 수는 없다. 가령 상업화하는 경향, 예술(문학·음악 등)사에 편입되는 성향, 실용성 높게 사회화하는 경향 등을 지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군아리랑>의 경우는, 가령 그것이 집단적 의지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자체 내에서 창작되어 집단의식의 독자성을 강하게 향유하고 있었다면, 전통민속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민속으로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원심적 확산의 다양화는 민요아리랑의 사회화 내지 역사화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리랑이 원형 지향적 전통성(구심성) 이외에,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높은 정도의 가변성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심성과 원심성의 극대화된 사례를 다른 전통민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면,
다른 민요와 상대적으로 아리랑이 가지게 되는 개성이 그만큼 크게 두드러져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신민요아리랑의 파장은 급기야 천파만파를 불러 일으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또 다른 파장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 및 구조]
여음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을 비롯해서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 전설의 인물인 ‘아랑(阿娘)’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의미 없는 사설(nonsence verse)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을 할 뿐이다.
즉, 아리랑의 여음은 여러 가지이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노래의 머리에서 앞소리 또는 내드름소리로 쓰이는가 하면 노래의 꼬리에서 뒷소리 또는 받음소리로도 쓰이고 있다. 또는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다른 노랫말로 넘겨받는 넘김소리로도 쓰인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당연히 여음이 노랫말에서 차지할 자리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다른 민요의 여음은 대체로 일정한 마디(節)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쓰임새며 노랫말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가 일정하다.
그러나 아리랑의 경우 여음은 다른 면의 다양성과 더불어 마디 구성상의 다양성을 아주 특이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 당다중 쓰리 당다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밀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어헐사 아라성아. (여주)
이와 같이 다양한 여음은 ‘아·이’, ‘아이·으이’, ‘ㄹ·ㅇ’, ‘ㄹ·ㅅ’ 등의 대립적 내지 대조적 음운교체의 엮어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그와 같은 대립·대조적 음운교체가 한국인의 시적(詩的)인 ‘쾌감있는 음상(音相)’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리랑 여음의 어원론적 설명은 그 같은 음운들의 엮어짐이 뜻이 있는 실사(實辭)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고, 또 그 시도에 따라 이설이 분분한 아리랑 기원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我離郎’·‘啞而聾’·‘我難離’ 같은 보기는 아리랑의 여러 가지 여음을 각기 실사로 보고 한자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여음 해설을 계기로 삼은 여러 가지 아리랑 기원론은 아리랑이라는 전승 자체 및 일부 노래말에 얽혀서 전하여져 있는 전설(설명 전설)과 함께, 크게 본 아리랑 전승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아리랑 전승은 아리랑이 노래말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말이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축을 세워서 각종 기원론과 전설도 의젓한 아리랑 전승의 일부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기원론은 진지한 노력이나 부분적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어원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론의 언어학적인 타당성과는 별도로 정서론 내지 주제론적인 타당성은 상당한 정도로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어원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투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전승 내부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기원설은 대체로 보아 아리랑을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진 노래로, 그러면서 아리랑을 비창감이 진하게 서린 노래로 부각시키려는 두 가지 경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전자를 아리랑 기원설의 역사주의, 후자는 비창지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으나 그 두 가지 경향성을 함께 고려할 때 아리랑 기원설에는 민족의 역사성 짙은 상흔이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아리랑 기원론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적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아리랑을 푸념·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을 풀어나가는 양식상의 특색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아울러, 서러움·애달픔·원한을 말하게 되며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며,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적 원상의 노래인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리랑의 시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 곧 두 줄 시라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간결한 시형식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시형식은 민요형식의 단순성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여음은 따로 계산하고 뜻 있는 실사로 엮어진 시행만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줄 시로서 한 줄이 대체로 3∼5음보 정도로 엮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모두 10음보를 넘지 않는 짧고 간결한 시형식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예상되는 중문과 복문 이 외에 단문으로만 된 두 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아리랑의 단순성은 더욱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줄 시는 <캐지량>이나 <강강술래>의 한 줄 시에 비하면 양식의 안정도 크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 줄 시와 네 줄 시에 견주어서 기억하기 좋고 즉흥성을 가미하기 쉽다는 양식상의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민요 두 줄 시는 속담이나 속신 등 이른바 ‘민중의 신념’ 또는 ‘민중의 판단’이라고 총칭할 수 있는 ‘문장 구술 전승’과 한 범주에 들거나 아니면 서로 이웃할 수 있는 서술형식상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팥 심은 데 팥나고 콩심은 데 콩난다.”고 하는 속담이나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 라는 속신 따위는 아리랑의 두 줄 구성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속신과 속담은 ‘민간 수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최소 단위이다.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민간 수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은 실제로 민간 수사를 총망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이 아리랑이 지닌 형식상 또는 수사상의 큰 장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리랑의 배후에 속신과 속담 등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리랑이 각종 민간 수사의 보고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그 양식이 단순하여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과 함께, 속담이나 속신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의 보고라는 사실이 어울려서 무수한 아리랑 노래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노래말의 문체적 원천 내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노래말이 오늘날 많게는 한 지방의 경우 400∼500가지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노래말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요는 그렇게 다양하게 계속 지어지고 있는 바탕, 큰 시문법이나 초구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에서 대구법이 가장 우세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을 ‘대구적 두 줄 구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구는 대조와 대비의 대구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존재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이 대조의 대구법이라면, 이와는 달리 큰 것들 사이의 공질성이 강조된 것이 대비의 대구법이다. “앞남산의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정든님 두 팔은 내허리를 감는다.”가 전자의 보기라면, “오릉촉단(吳綾蜀緞) 능라조(綾羅調)로 날 감지 말고 대장부 긴긴팔로 날 감아 주게.”는 후자의 보기로 알맞을 것이다.
두 가지 노랫말에서 다 같이 ‘임에 의한 허리감기’는 사람이 충족된 상태를 뜻하고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임에 의한 허리감기’와 동형동질의 것을 찾아 짝을 맞추고 있고, 이와는 달리 충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행이질의 것을 찾아서 짝맞추기를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이것을 아리랑의 짝맞추기, 정확하게는 아리랑 두 줄 대구의 짝맞추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짝맞추기에 의해 아리랑은 ‘도시(부)·농어촌(가난)’, 사회계층과 신분계층의 ‘위·아래’, ‘가짐·안 가짐’, ‘밝음·어둠’, ‘잘남·못남’ 등 종횡무진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다.
그 짝 맞추기에 따라 아리랑은 때로는 밝은 양지의 노래가 되고 때로는 어두운 음지의 노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짝맞추기 대구법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반복법·말놀음·쌍소리·문답법·독백체 등이 간간이 활용되면서 무수한 변이를 낳게 되고, 오늘날 3,000여 가지가 넘는 노래말이 수집, 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아리랑은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온갖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민요·신민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긴아리랑>·<남도긴아리랑>·<해주아리랑>은 부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어랑타령(신고산타령)>·<긴아리>·<자진아리>는 오늘날 아리랑으로 꼽지 않고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엇모리 4장단에 메기고, 엇모리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종지하며 미는 작게 떨고 레에서 도로 꺾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것보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불리는 것이 훨씬 향토적인 맛이 난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강원도 긴아라리를, 촘촘히 엮어 엮음 아라리로 불려지던 것이 세상에 퍼진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자유리듬으로 촘촘히 노랫말을 엮어가다가 세마치 8장단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하고 받는다.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엮지 않는 것은 매우 처량한 느낌을 주며 엮는 것은 노랫말을 빠르게 촘촘히 엮어나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어 감정을 퍼버리며 뒷소리로 느리게 흐느끼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서울의 <구조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며, 장단은 세마치로 되어 있으나 흔히 4분의 3박자로 불러 신민요의 리듬으로 부른다. 세마치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는 경토리로 되어 있으며,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에 성창하던 <구조아리랑>은 이 아리랑과 장단과 토리가 같으며 곡조가 약간 다를 뿐이다.
<긴아리랑>은 <구조아리랑>과 장단과 토리는 같으나 훨씬 느리고 곡조가 약간 변동되어 있다. <아롱타령>은 장단과 토리는 <구조아리랑>과 같지만 곡조가 높은 음역에서 부르도록 바뀌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서울의 <아롱타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장단은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어헐시구 아라리가 났네.”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진도아리랑>은 <남도긴아리랑>을 변창한 것이다. 8분의 9박자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뒷소리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고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라·시·도로 되어 있고 라로 마치며 미에서 세게 떨고, 도에서 시로 꺾고 레보다 낮은 음에서 도·시로 흘러내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이 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느낌을 준다. <남도긴아리랑>은 서울 <구조아리랑>을 육자배기토리로 바꾼 것으로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전통민요이다.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자연적 습득 등과 같은 민속성 외에 지역공동체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 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 간다.”,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매인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월 15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대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직업공동체나 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하게 아리랑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랑은 분명히 공동체의 휘장(徽章) 내지 민중의 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애원성(哀願聲)이나 한탄의 소리인가 하면, 항거요 비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념의 하소연인가 하면 강한 삶의 의지의 표백이었고, 모가 난 말싸움인가 하면 익살떨기의 넉살부림이기도 하였다. 구시렁거리는 불만인가 하면 지독한 악담이요 욕이요 쌍소리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집단과 민중의 휘장이라고 하지만, 아리랑은 이 같은 다양한 목청과 소리투로 그 휘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바로 그것이 지녔던 집단 내지 민중의 휘장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문화인 민요운동을 우리 민요사에서 유일하게 도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의 민속성에서 사회와 역사의 민속성을 향하여 아리랑은 자신을 확대할 것이다. 아리랑이 근대사를 살게 된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랑의 집단성은 앞소리와 뒷소리, 매김소리와 받음소리 등으로 나뉘어 부르는 형식에도 곧잘 드러나 있다.
한데 어울려 일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의 가름을 따라 제창이나 윤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 그 집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강한 개인성을 갖추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주관성 높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는 서정시이면서 원한과 아픔을 풀이하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였다. 유사 대화체나 독백체가 이 속성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떼소리’ 또는 ‘무리소리’이면서도 ‘혼자소리’이기도 하다. 절로 한숨 짓듯이, 더운 숨결을 토하듯이, 혹은 매인 중치를 터놓듯이 혼자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 소리꾼은 그 혼자소리로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소리 아리랑은 삭임의 소리, 푸는 소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성과 개인성은 아리랑이 지닌 또 다른 원심력과 구심력이지만, 그 양면성을 갖추고 있는 데에, 아리랑이 지닌 복합성을 읽게 되는 단서의 하나를 얻게 된다. 아리랑은 결코 단일한 장르의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그 다양한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적응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과거의 화석으로 전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로이 새 삶을 얻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단일한 민요의 소재를 들자면 아리랑만큼 질기고 굵은 맥을 지켜온 보기를 구할 수 없다. 그것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더불어 제기하는 소재사의 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일의 한국의 시대, 그리고 사회에서 아리랑의 소재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재사의 맥이 더욱 굵어지고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한국 음악민요의 유형적 고찰」(김진균, 『동서문화』 4, 계명대학교 동서문화연구소, 1970) 『아리랑』(김연갑 편, 현대문예사, 1986)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김열규, 조선일보사, 1987) 「아리랑에 관한 음악적 고찰」(이보형, 『민학회보』 15,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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