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라고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잘 증거되어 있듯이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의 연합군의 침략에 있어서 여호사밧 왕과 레위 사람들을 위시한 남 유다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과 함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멸해 주시고, 심지어는 아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와 같이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게 하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찬송 가운데에는 세상에 주지 못할 하늘의 힘과 은혜와 역사들이 실질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인데 조금만 통찰해 봐도 그러한 찬송으로 인한 신령한 힘과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의 모든 근본과 본질, 실제와 실체들은..
아래 본문 바로 앞인 역대하 20장 15~17절에서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러한 찬송들에 있어 그 가사들 하나하나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옮긴 것이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체험이니 고백이나 증거 등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진정 말씀이신 하나님을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높이고 고백하며 드러내고 송축하면서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케 되고 하나님으로 인한 은혜를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찬송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러한 찬송은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다름 아닌 말씀인 것이고, 말씀과 전적으로 직결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고 말씀과 관계가 없거나 별개이거나 빠지거나 다른 것이라면 찬송이라기보다는 가요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참으로 그러한 찬송과 가요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차이를 하나로 말하라면 오직 말씀인 것으로 전적인 말씀대로의 신앙과 표현과 누림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말씀인 찬송, 다시 말해 말씀대로의 찬송과 함께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해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직접적, 실질적인 측면에 있어 복병을 통해 승리케 하시는 등과 같은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와 경험들이 생생하고 강렬하게 될 수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이시자 온 세상 천지만물과 모든 인생들의 주인이시고 생사화복과 흥망성쇠의 주재자이시며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도 합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창세 전부터의 모든 뜻과 약속과 섭리들, 그리고 그에 있어서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와 누림들에 있어서 단 하나,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이시면서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어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과 그 이름으로의 기도에 있어서도 어떤 식으로든 합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고 다 실행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들에 있어서 합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사실과 실제들, 이치와 원리들은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찬송과 함께 세상에 주지 못할 온갖 모양의 하늘의 힘과 은혜들, 구원의 일과 역사들이, 심지어는 상상도 못할 기적과 이적들까지도 나타나고 누리며 경험케 될 수 있는 것임을 내포하는 것이고 증거하고 있는 것인데..
다만 그에 있어서의 모든 전제와 기준과 관건 또한 다름 아닌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그러한 찬송에 있어서 가사 하나하나 그 자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면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말씀이 핵심이자 전부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찬송의 인도자부터 해서 여러 악기들을 담당하는 동역자들, 더 나아가 그러한 찬송의 자리에 모인 회중들, 뿐만 아니라 여러 면들에 있어서의 영적 분위기 등에 있어 얼마나, 어느 정도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고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원론적으로는 단 한 번의 찬송에 있어서도 그에 있어 중심이 되고 연계된 모든 이들마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 이름으로 의지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과 세속과 정욕과 자기 소견과 불신앙과 잡생각들 등이 아닌 순간순간 더욱 더 치열하고 절실하며 뜨거운 말씀, 말씀대로의 믿음으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신앙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역대하20:19~24)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5월 20일(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