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연민의 훈련
오래전 필리핀에서 모임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이 막혀 정체 중이었는데, 옆에 있던 한 형제가 갑자기 택시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갔다. 나도 택시 기사도 너무 놀랐다. 어안이 벙벙해서 눈이 그 형제를 따라갔는데, 그는 거리에 있는 걸인에게 달려가 뭔가를 주고 재빨리 택시로 돌아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남은 필리핀 돈을 모두 그에게 줬다고 했다.
사랑은 재채기처럼 감출 수 없다. 그 형제는 평소에도 지나치다 싶고 또 공동체에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킬 정도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일했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잘 알고, 마음도 그러고 싶어도 그 형제처럼 그런 행동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어색하고 쑥스럽고 뭐 그렇다. 나는 훌륭한 선교사는 아니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훈련이 부족한 탓이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연민이 아직 힘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과 비슷하게 사람을 만드셨고 그 취지는 당신을 대신해서 피조물을 잘 다스리기 위함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만들자고 하셨으니까, 하느님은 공동체면서 한 분이다. 우리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세 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설명하지는 못해도 그 방법은 안다.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이다. 서로에게 완전히 종속돼서 세 분이 하나의 뜻과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분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도 여기서 서로 하나 됨을 체험하곤 한다. 서로 사랑할 때이고, 같은 뜻을 품었을 때다. 악행에도 하나가 되지만 그 일치는 금방 깨진다. 사랑과 선한 뜻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사람은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피조물을 대해야 하는 거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완전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거룩하시고(레위 19,2) 완전하시고(마태 5,48) 자비로우시기(루카 6,36)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버금가는 계명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내 주위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준 것이고, 옆에 있는 데도 그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당신에게 해 드리지 않은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 즉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최후 심판의 기준이라고 알려주셨다. 하느님이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시기로 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는 연민이 있기 때문일 거다. 누구나 하느님에게 잘해드릴 수 있다.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누구나 최후 심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연민은 실천하면서 더 커지거나 내 안에서 그 힘이 세지는 거 같다. 아니 익숙해진다는 게 더 옳겠다. 좋은 습관이 곧 덕(德)이다. 택시 문을 열고 뛰쳐나갔던 그 형제의 행동이 나에게는 괴상했어도 그에게는 별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가장 작은 이들도 내 주변 어디에나 있다.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 가장 작은 이들로 변장하셔서 내 연민을 두드리신다.
예수님, 아직은 의무감으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들 안에서 주님 얼굴을 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마음을 제게 가르쳐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