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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백성의 사회적 의무
레 19:9-18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1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9-18 / [가난한 이를 위해 이삭을 남겨라] 너희는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밭 모퉁이에 있는 곡식까지 모조리 다 거두어들이지 말아라. 또 너희가 곡식을 거두다가 밭에 떨어뜨린 이삭도 줍지 말아라. 10) 포도원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일 때에도 포도 송이를 모조리 따지 말고 땅바닥에 떨어진 포도송이도 줍지 말아라. 이것을 너희와 함께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과 너희에게 몸붙여 살고 있는 나그네를 위해서 남겨 두어 그들이 먹고 살게 하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11) [이웃에게 진실하여라]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아라. 속이지 말아라. 거짓말하지 말아라. 12) 너희는 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하지 말아라. 곧 그렇게 거짓 맹세하여 너희 하나님인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나는 여호와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짓누르거나 착취하지 말아라. 그날 품삯은 반드시 그날 주어야 한다. 다음날까지 미루지 말아라. 14)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악담하지 말아라. 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아라. 너희는 나 여호와 무서운 줄을 알아야한다. 나는 여호와이다. 15) 너희는 재판을 할 때 불공정하게 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또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마음 쏠려서도 안 된다. 정의롭고 공평하게 재판하여라. 16) 너희 이웃을 해치는 소문을 내지 말아라. 너희 이웃을 죄인으로 몰아 죽임당하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7) 너희는 네 형제를 마음속으로라도 미워하지 말아라. 이웃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 잘못을 기탄없이 꾸짖어라. 그렇게해야만 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18) 너희는 한겨레 핏줄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아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라. 나는 여호와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사회적 의무에 관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계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9-10)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거류민과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이삭 줍기에 관한 법은 과부와 고아 그리고 거류민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수확할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거나, 포도 열매를 다 따거나 떨어진 열매를 모두 거두지 말고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조금 더 풍족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가난한 자들에게도 식량이 공급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이나 포도의 열매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삶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실천해야할 기본적인 태도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11-18)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공동체 간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규례마다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11, 14, 16, 18). 이것은 이 명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성과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가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받으며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건져주셨습니다(출 3:7).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의 이웃, 형제, 동포, 친구, 사람들을 사랑하되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십니다(18). 공동체를 위한 여러 규례들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닮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기 위해 자기 것을 버려도, 모자라게 않게 하십니다.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빼앗아오지 않아도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삶에서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의 일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나요?
어느 날, 친구의 온실 안을 거닐다가 다른 여러 개의 화분으로 완전히 덮여 있는 작은 화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왜 이 작은 화분 주위를 어둡게 해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나? 그것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서는 그 주위를 어둡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 설 교 >
약한 자를 배려하라
레 19:9-14 / 양인순 목사
인천에서 노숙인을 위한 무료식당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서영남 씨가 있습니다. 그분은 25년간의 가톨릭 수사 생활을 접었습니다. 2003년 세상에 다시 나온 후 노숙인의 자립을 돕는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노숙인들에게 국수를 삶아 제공하는 ‘민들레의 집’과 함께 노숙인들이 낮에 잠시 쉴 수 있는 ‘민들레 쉼터’입니다.
이 쉼터는 노숙인에게 잠을 재워주지 않습니다. 노숙인들은 낮에 쉼터에서 책을 읽고 빨래나 목욕을 하고 저녁에 노숙하러 나가야 합니다. 그는 노숙인들이 노숙을 그만둘 의지가 생길 때에야 도와줍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정부 지원도 받지 않습니다. 생색내기 자선도 사양합니다. 그런데도 쌀이 떨어지면 쌀이 들어옵니다. 반찬이 떨어지면 콩나물과 감자가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날마다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서영남 씨는 나눔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루는 낯선 분께 전화가 왔어요. 유황 먹인 오리를 좋아해서 몇 마리 사다먹었는데, 오리 뼈가 남았으니 가져가서 끓여드리라는 것이었어요. 뼈에 살도 많이 붙어 있고, 유황을 먹여 키운 오리 뼈라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냉동실에 얼려두었으니 가져가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맛있는 유황오리를 먹고 남은 뼈지만 그래도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전화까지 했다는 것은 어쩌면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서영남 씨는 그 사람은 나눔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눔이란 자기의 귀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은 나눔이 아닙니다.”
동의하십니까? 진정한 나눔은 먹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귀중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약한 자에 관한 배려를 잘 보여줍니다. 레위기 19장의 주제는 “거룩하라”입니다.
2절 말씀에 보시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거룩하라”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필수요건입니다. ‘거룩’의 원래 의미는 ‘구별되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는 구별된 삶이 필요합니다. 구별된 삶을 다르게 표현하면 ‘성화’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성화의 삶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거룩에로의 삶, 성화의 삶을 레위기 19장에서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는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는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결론이 바로 18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거룩함의 모습입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가난한 자,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경건은 단순히 말씀과 기도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경건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경건의 모습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딤후3:5).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는 다니는데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에 매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약자에 대한 배려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곡식을 거둘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모두 따지 말고, 떨어진 포도를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명기에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십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24:19-22)
이렇게 성경에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또는 “나는 여호와니라” 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나 하나님 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반드시 이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지금도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철저하게 훈련시킵니다. 유대인들은 나눔과 구제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베풀고 나누는 것은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을 <쩨데카(tzedakah/justice)>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의(義)’ 라는 뜻입니다. 베풀고 나누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이루는 것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의 쩨데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남을 구제해서 의를 행하려고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즉 구제하는 것, 나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나누는 것이요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올바른 구제(나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2-4)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칭찬과 영광을 받기 위해서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선행을 남에게 자랑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진짜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진짜 복을 받는 비결임을 강조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구약의 쩨데카 정신을 실천합니다. 각 가정에는 구제를 위한 쩨데카 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쩨데카에 헌금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유대인들은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어디에 쓸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어디에 쓸 것인가를 결정하면 이어서 두 가지 질문을 또 합니다. 하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입니다.
특히 구제를 할 때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세한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전달이나 사진 찍는 것을 금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잘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선행이나 구제를 하고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홍보를 합니다. 그러다보면 받는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쩨데카의 정신을 실천하면서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 배려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쩨데카 정신을 가지고 현재 미국에서 실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와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인 위렌 버핏이 바로 유태인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눔의 정신을 이미 우리 조상들은 실천했습니다. 요즘 시골에 가면 감나무에 몇 개의 감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감을 딸 때 꼭대기 달려있는 것은 까치가 먹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콩을 심을 때도 항상 세 알 이상을 심습니다. 하나는 땅 속에 있는 벌레가 먹고, 다른 하나는 공중의 새가 먹고, 나머지를 자신이 먹기 위해 심었습니다.
영안모자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백성학(白聖鶴) 회장을 아시죠? 전에 베트남에 갔을 때 어느 지역에 갔는데 영안모자에서 그 지역의 직업훈련을 위해 세운 큰 건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6.25때 혼자 월남을 했습니다. 거지 생활,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생활을 했습니다. 결국에는 모자 가게 사환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루에 18시간씩 일을 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결국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 자신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1년에 모자 1억 개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회사입니다. 미국지역에서 판매되는 모자의 70%가 한국 영안모자 제품이라고 합니다. 이 분에게 변하지 않는 신조가 있습니다.
“내가 번 돈의 20%는 다시 사회에 기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종군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어렵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1000번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총 64명이 지금 생존해 있습니다. 그분 가운데 87세 된 황금자 할머니의 사연이 신문에 소개됐습니다.
황 할머니는 13살, 꽃다운 십대 때 일본 순사에게 잡혀 흥남의 유리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3년 뒤 간도 지방에서 광복 때까지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고아를 양녀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10살 때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평생을 혼자 살았습니다.
황 할머니의 따뜻한 나눔은 200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평소 아들처럼 자신을 돌봐주던 자원봉사팀장에게 재산을 물려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팀장은 강서구 장학회를 소개했고, 그 때부터 할머니는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지난해까지 1억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했습니다. 정부는 황 할머니의 선행을 기리고자 지난 7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번에는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장학사업에 써달라며 3천여 만원을 약정 기부했습니다.
지금 황 할머니는 서울 등촌3동의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식사는 인근 복지관에서 해결합니다. 겨울에도 차가운 방에서 생활하며 난방비를 아낍니다. 이렇게 어렵게 모은 돈과 매월 국가에서 받는 노령연금·기초생활수급비·위안부 피해자 지원금 등을 모아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부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어렵게 모든 재산을 이웃들을 위해 나누는 분들의 공통적인 말씀은 “내가 가진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이 사회가 내게 준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정신이 피 땀 흘려 모은 재산을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라는 의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같이 한번 고백해 볼까요? ‘나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나눈다고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쓸 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렵고 힘든 이웃들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전에 동안교회를 섬기셨던 김동호 목사님이 ‘이삭줍기’ 헌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은 당시 50만원을 주고 컴퓨터를 사주었는데, 다음 날 천호동에서 일가족 4명이 50만원이 없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함을 하나 만들어서 이삭을 줍듯이 동전을 모았다고 합니다. 후에는 자신이 쓸 돈을 아껴서 이삭 헌금통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매월 구제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교인들에게 설교시간에 전했더니 많은 교우들이 이삭헌금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 헌금이 매년 1억 5천만윈이 됐다고 합니다. 작은 푼돈을 모았더니 이렇게 큰 헌금이 되더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삭 헌금을 드릴 때는 그 사연을 봉투에 쓰라고 했는데 참으로 감동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팥 빙수 먹고 싶었는데 .... 500원, 칼국수 대신 사발면 3000원
공장에서 일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이삭줍기 헌금으로 11,000원을 헌금하셨답니다. 그리고 헌금봉투에 '공장 하루 품삯' 이라고 쓰셨습니다. 한 달에 하루 수입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를 들으시고 할머니는 자기 하루 품삯 전부를 이삭줍기 헌금으로 내신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다음 달 이삭줍기 헌금으로 13,000원을 내셨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할머니의 일당을 2,000원 올려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잔업을 하여 일당 2,000원을 더 받았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제2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삼 년에 한 번 더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십일조는 온전히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삼 년의 십분의 일은 1/30조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한 달 수입의 하루치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희 가정에서 먼저 이삭헌금을 온전히 드리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받는 사례비에 보너스까지 합쳐서 하루치를 환산해서 이삭헌금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월드비전을 통해 3명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명의 어린이만을 돕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명당 2만원이었는데 지금은 3만원으로 인상됐습니다. 계속 3명을 돕지 못하고 한 명을 후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번 최루디아 선교사가 와서 고아원의 실정을 말하면서 한 명의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월 4만원을 보내면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넘길 수 있었는데 마음속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가서 그 아이를 만났습니다. 9살 된 백툰이란 여자아이입니다. 그 아이에게 목사님이 앞으로 너의 영적인 아빠가 되고, 후원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공부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저의 하루치의 사례에 거의 해당되는 금액이 됩니다. 그래서 저금통을 준비했습니다. 나머지의 이삭을 모아서 이삭줍기 헌금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감동이 오시면 내 생활비나 월급의 하루치를 이삭헌금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헌금은 우리 주변과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구제하는 일에 쓰도록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이제 성탄의 계절입니다. 대림절 4째 주가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바로 어둠 가운데 방황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기 위함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성탄의 선물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때문에 대부분의 자녀들이, 심지어 어른들까지고 내가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예수님께 성탄절 선물을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면 그것이 바로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나누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작년에 이어서 연탄은행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작년에 성탄헌금의 일부를 연탄헌금으로 드려서 직접 사랑의 연탄 나누기를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 은혜, 축복을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와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믿습니다.
우리 성지교회가 지속적으로 사랑의 나눔과 실천을 통해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을 섬기며, 사회적인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온 룻을 위해 이삭을 줍도록 배려합니다. 그녀를 따뜻하게 보살펴 줍니다. 결국은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결과 보아스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곡식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를 다 따지 말고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따뜻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을 위해 함께 나눌 때 그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탄의 계절에 진정한 나눔의 실천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세상에 없는 사랑
레 19:9-18, 롬 12:1-2, 눅 14:1-14 / 인명진 목사
성경이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는 진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빈부나 비천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 그 자체로 존엄한 가치가 있고,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나 민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것이 우리네 역사입니다.
인종 차별은 당연한 것이었고, 심지어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도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자기 집에 노예를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반문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노예제도가 성행했던 미국 남부 지역의 장로 교인으로 살았다면 우리 역시 노예를 집에 두었을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농장에 노예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만 노예가 있은 것이 아니라 이웃 집 농장에도 노예를 부리고 있습니다. 예배도 백인만이 참석했고, 노예와 흑인은 예배당에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남 장로교 총회에서는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기 위해서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에 태어나고 자랐다면 노예제도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고, 노예를 부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와 신앙을 점령을 하고서 마치 그것이 보편적인 질서인양 당연하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교회를 지배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한 관습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어둡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사회에 워낙 많이 퍼져 있다 보니 교회도 성경을 따르지 않고 사회의 풍조를 따랐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대정신에 동화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로마서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영어성경으로 보면 아주 선명합니다. 이 세대를 conform하지 말고,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transform 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풍조와 똑같은 폼을 취하지 말고 변화된 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설교자로서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 세상의 풍조는 예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아니오. 합니다. 이때 영악한 설교자들은 이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묵인해 버리는 것이지요. 제가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예민한 문제를 말씀으로 전할 때 저의 마음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과 같습니다. 때로는 회중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세상 풍조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전하면 교회가 타락하고 결국은 교회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정해놓은 경계를, 관습을 뛰어넘습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이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항상 뛰어넘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나타난 복음의 역사입니다.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흑인과 백인의 벽도 무너졌습니다. 종과 주인의 벽도 무너졌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벽도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는 세상에 없는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 흑인을 사랑하는 것,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끼리끼리 좋아하는 것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는 세상에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교회만큼은 세상의 관습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세상에 없는 사랑이 흘러가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박해 가운데 있던 초대교회가 200년과 300년 사이에 7배 성장했습니다. 로마제국 아래에 채 100만 명도 되지 않던 기독교인들이 불과 100년 사이에 6백만 명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100년의 역사와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년과 300년 사이에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때 유럽 사회 전체에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주후 251년에도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아 도시가 텅 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염병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던 시기에 비 기독교인들은 전염병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생명만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을 다했습니다. 위험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병자들의 모든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인종만 돌본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도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심지어 종교가 다른 이교도들까지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인종의 벽도, 신분의 벽도, 종교의 벽도 뛰어넘었습니다. 전염병이 자신에게도 전파되어 죽어갔지만, 그들은 행복하고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사랑을 실천하다가 장렬하게 죽어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던 믿음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1903년에 강화도 잠두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은 잠두교회가 강화중앙교회인데, 이 교회에 김씨 성을 가진 할머니 교인이 있었는데 이 할머니는 재산은 많으나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몸종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기 몸종 복섬이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몸종은 성경을 줄줄이 읽는데 주인은 성경 한줄 읽지 못했습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언문을 깨우치고 겨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성경을 읽다가 한 말씀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 말씀이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할머니는 다음 주일에 교인들을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문갑에서 꺼낸 몸종 복섬이의 노비 문서를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습니다. 의아해 하는 교인들을 보고 할머니는 말씀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을꼬. 내가 복섬이를 부리는 것은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데, 이러고도 어찌 하늘에서 푸는 복을 받을 수 있을꼬.”
그러고는 복섬이에게 말했습니다. “복섬아, 이제 너는 내 종이 아니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그러나 “마님, 나가라니요. 제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요. 제발 나가라는 말씀만은 말아 주세요.” 울며 매달리는 복섬이에게 또 한 번 감동되어 복섬이를 자기 양녀로 삼고 전 재산을 다 물려 주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랑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사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난 달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여명이 입국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진짜 난민이 아니라는 뉴스가 번지고 있고, 교회에서는 이슬람 난민이어서 종교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예멘 사람을 난민이라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34.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중에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이유, 이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슬람 문화권에 선교는 하러 가면서 우리나라에 온 무슬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 아닙니까? 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파키스탄공동체에 난민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올 3월에 김인순 권사님이 지인으로부터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유학생 부부가 곧 추방당하게 되었다고 기도 부탁을 하더랍니다. 김 권사님은 저를 소개해 주었고, 저는 이 사람을 본 적도 없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나그네를 내쫓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하여 피난처라는 난민지원 NGO 단체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난민 수속을 밟고 있고, 추방당하지 않아 너무도 감사하다고 저에게 전화가 몇 번이나 왔습니다.
난민은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결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나그네와 연약한 이웃을 환대하고 대접하는 일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나그네를 배척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혐오와 차별은 하나님의 언어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먼저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경계를 어떻게 뛰어넘는가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없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관습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은 세상의 관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습을 conform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transform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메시지는 한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병자도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을 깨고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이라도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손님들이 잔치의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잔치에 초대받으면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잔치를 베풀면 친척이나 부자를 초대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을 보십시오. 전부 사회의 관습을 conform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transform 하라는 교훈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것도 당시의 사회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웅덩이 빠진 소는 구할 수 있었지만 환자를 치료하면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안식일을 잘못 지키는 악한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관습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관습은 종교적인 관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교회의 잘못된 관습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라고 교훈한 것입니다.
잔치에서 말석에 앉는 것도 당시 사회의 관습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잔치의 자리에 앉는 순서, 소위 의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잔치를 베풀었을 때 친척이나 부자는 초대하지 말고 가난한 자와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을 초대하라는 것도 사회관습에 완전히 어긋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습 중에 하나가 바로 부조문화였습니다. 내가 남에게 초대를 받았으면 나도 남을 초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줬으면 나도 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문화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관습이지요. 누가 나의 애경사에 부조를 했으면 나도 그 사람의 애경사에 부조해야 하지 않습니까? 또 내가 부조했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 부조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부조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대체로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대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관습을 따르지 말고 나에게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사람을 대접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에 없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덤벼든 것 아닙니까? 사회의 관습대로 높은 자리를 찾지 않고 낮은 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까? 함부로 대하고 만만하게 보잖아요? 때로는 무시당하잖아요? 또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돌려받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만 도와준다는 것도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이지요. 이 세상에서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만 사랑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접한 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만 대접하면 그것은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입니다. 본훼퍼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웃은 나로부터 가장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교의 골자가 바로 이것입니다. 10년 넘게 북한 어린이를 500명을 먹였는데 감사 편지 한 장 받지 못했습니다. 햇살보금자리 헌금으로 노숙자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도시락도, 베트남에 송아지 보내는 것도, 몽골에 나무를 심는 것도, 이주노동자들을 섬기는 것도, 희망상담실을 운영하는 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이뿐 아니라 관습의 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웃 사랑을 할 때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 누구를 도와주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 몸 가운데 어느 부위가 추위를 가장 많이 탑니까? 손과 귀가 추위를 가장 많이 탑니다. 그래서 난롯가에 손을 가장 먼저 내밀고, 데워진 손으로 귀를 만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을 대접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관습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는 결코 세상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관습을 conform 하지 말고 transform 하여 어려운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세상의 관습과 경계를 뛰어넘을 때 그 사랑이 세상에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증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이것을 아주 강력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호화롭게 살면서 날마다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날마다 잔치를 했다면 누구를 대접했겠습니까? 자기 친척, 부자 친구, 그리고 목사도 대접했을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도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서 좀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뭘 알려주라는 겁니까? 자기처럼 살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형제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 성경이 있으니까 성경만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경만 읽으면 누구나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강화도 복섬이의 주인 김씨 부인 아닙니까? 언문을 깨치고 성경을 읽자마자 여종을 해방시켰습니다. 사회 관습을 뛰어넘어 어려운 이웃을 대접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은 부유한 사람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습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영생과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산 사람에게 하늘의 구원과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세상의 관습을 conform 하지 말고, transform 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십시오. 이웃 사랑할 때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 경계를 뛰어넘는 사랑, 가난한 자를 대접하는 사랑, 세상에 없는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곳에 영생이 있고, 바로 그 현장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며 살아가기로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
레 19: 9-10 / 김동호 목사
뉴스앤 죠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개척교회 목사 둘이 자살을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수년이 지나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가족 의 생활은 고사하고 매월 집세와 전기세도 내지 못하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 자살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너무 안 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가족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가족들을 수소문하여 생활비 얼마라도 보내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목사가 자살을 해. 세상에 그와 같은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며 사는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인가? 오늘도 저녁에 자리에 누우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목사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자살을 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의 자살은 그 어떤 이유로도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분명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지울 수 없는 생각은 내가 마치 그 젊은 목사를 자살로 내 몬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두 달 전 교회를 새로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척은 시작부터 개척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수 억 원의 재정을 개척자금으로 지원해 주었고 시작하는 첫 날부터 백 명 가까운 교인들이 출석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벌써 수 백 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사무실도 크게 장만하고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품들도 어렵지 않게 그것도 제법 좋은 것들로 장만을 해가고 있는 터에 그와 같은 기사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척교회를 하면서 좌절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 후배 목사들 생각을 하며, 저들이 흔히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시설과 재정이 곧 교회의 영성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묘한 죄의식까지 느끼고 있던 터였는데 자살을 한 개척교회 목사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충격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이 비슷한 충격을 십 여 년 전에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아이들을 위하여 그때 50만원을 주고 컴퓨터 한 대를 사 주었었습니다. 어려서 늘 가난하게 자라 손목 시계 하나를 차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뉴스에 천호동에 사는 일가족 4명이 집세 50만원을 올려 줄 수 없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50만원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구 집에는 그냥 아이들 컴퓨터 한 대 값에 불과한 50만원 때문에 일가족 4명이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 그냥 넘어가 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며칠을 그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떠 오른 성경 구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추수에 관한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할 때 자기 밭이라고 네 귀퉁이까지 다 추수하여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네 귀퉁이 남겨 놓고 추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다가 단을 떨어트리거든 줍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이 주어 갈 수 있도록 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배려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할만큼 절박한 상황은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살을 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있는 자들이 그와 같은 배려를 하지 않았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자신을 변명할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 종일 앉아서 꿀 병을 담았던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다듬어 저금통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에 '이삭줍기'라고 썼습니다. 아이들이 궁금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컴퓨터 이야기와 천호동에 일가족 4명이 바로 그 50만원 때문에 자살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귀퉁이를 여기에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쓸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제일 먼저 통에 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줍기 통 앞에 붙여 놓은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김부열 120원 방바닥에서 주운 돈' 이렇게 해서 저희 집의 이삭줍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줍기 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영락교회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하였더니 고등부 아이들이 그 이삭줍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운동이 영락교회 고등부에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매달 첫 주일 이삭줍기 헌금을 하였습니다. 겉 봉투에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적곤 하였는데 저는 지금도 그 때 그 사연들을 잊지 못합니다.
팥 빙수 먹고 싶었는데 .... 500원
칼국수 대신 사발면 800원 - 300원 = 500원
91년 동안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그 이삭줍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이삭줍기의 기준을 한 달 수입의 하루 분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2의 십일조라고 불리우던 것이 있었습니다. 삼 년에 한 번 더 십일조를 하여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삼 년에 십분의 일은 1/30조에 해당하고 그것은 한 달 수입에 하루 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기준으로 헌금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그와 같은 기준으로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매해 1억 5천만원 정도의 이삭줍기 헌금이 모였고 그 돈으로 교회는 구제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안교회 이삭줍기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헌금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이삭줍기 헌금으로 11,000원을 헌금하셨습니다. 그리고 헌금봉투에 '공장 하루 품삯' 이라고 쓰셨습니다. 한 달에 하루 수입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를 들으시고 할머니는 자기 하루 품삯 전부를 이삭줍기 헌금으로 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감동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할머니는 그 다음 달 이삭줍기 헌금으로 13,000원을 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할머니의 일당을 2,000원 올려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잔업을 하여 일당 2,000원을 더 받았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하루 일당 11,000원 받는 할머니는 아마 극빈자 중에 극빈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할머니는 한 달에 하루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하여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저는 자살한 개척교회 목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몹시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소위 지금까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였고 개척교회를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재정적으로 넉넉한 목사입니다. 소문 없이 시작한 예배였는데 첫날부터 100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두 달이 지난 지금 500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시작하는 처음부터 동안교회의 지원과 숭의학원의 지원 그리고 여러 교인들의 진심 어린 후원으로 모든 것이 호화롭다 하리만큼 풍족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체육관에 카펫을 깔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년 2월이 되면 냉난방이 완벽한 2,000석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무실과 강의실도 정말 아름답게 꾸며졌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보다 더 아름다운 사무실과 강의실을 갖춘 교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예산으로만 된 것은 아닙니다. 교인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컴퓨터도 사 주시고 책상과 의자도 사주시고 응접세트도 기증해 주셔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무실과 강의실이 지나치리만큼 아름답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살한 개척교회 목사의 기사를 읽었을 때 괴로웠습니다. 죄를 지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거의 언제나 10 여 년 전 아이들 컴퓨터를 사주었을 때 같은 액수의 돈 때문에 자살을 한 천호동 일가족 4명에 대하여 느꼈던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은 조금이라도 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에서부터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율법이 이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앉아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물질에 대한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물질은 크게 세 가지이었습니다. 십일조와 제2의 십일조 그리고 추수할 때 네 귀퉁이를 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작지도 쉽지도 않은 액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십일조를 네 귀퉁이를 뗀 후의 소득으로 할 것이냐 네 귀퉁이를 떼기 전의 소득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 퍼센테이지가 달라졌습니다. 제 계산이 정확하지 모르겠으나 제 계산에 의하면 그것은 최소한 31.7%에서 34.9%였습니다.
저는 목회를 할 때나 개인적인 살림을 할 때 이 숫자를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수준의 몫을 떼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몫을 떼고는 도저히 자기 살림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몫에 대하여 율법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몫을 떼고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몫에 대하여 부담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가난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용서하며 자유 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안교회에서 목회 할 때 43% 정도를 밖으로 내었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하여 교회재정이 어려웠을 때에도 앞에서 이야기 한 31.7%에서 34.9%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지나치다하리만큼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건축 중에도 개척교회를 건축하고 북한 선교를 위하여 억 단위의 헌금을 하고 신학대학교 건축에도 인색하지 않고 우리 몫을 지나치리만큼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동안교회는 일년에 수 십 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교회요 교회 건축을 위하여 100 억 원의 예산을 쓴 교회였지만 저는 나름대로 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무조건 동안교회가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수 십 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대형교회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난하지 않은 목사입니다. 얼마 전 선교 단체들 간사들 수련회에서 저들과 대화를 하다가 제 연수입에 대하여 궁금해하기에 조금 망설이다가 정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제 수입에 대하여 언제나 큰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기를 쓰고 34.9%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목회하는 교회만큼의 몫은 나도 밖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최고의 몫을 떼었을 때 보다 제가 개인적으로 떼는 몫이 많았습니다. 아마 제가 제 몫으로 떼는 액수를 그 간사들에게 이야기하였다면 저들은 제 수입에 대하여 놀란 만큼 놀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몫을 떼고도 동안교회는 부자였습니다. 넉넉하였습니다.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저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안교회는 그 큰 예배당에 대하여 자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산을 지키려고 노력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넉넉하고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양심과 자유를 위하여 그와 같은 구체적인 법을 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좀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와 같은 구체적인 법이 없다면 모든 부자가 자기도 가난해지리만큼 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지나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최소한 34.%의 몫을 밖으로 뗄 수 있는 부자는 나머지 65.1%의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예배당이 필요하면 지어도 되고 좋은 자동차가 필요하면 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에까지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숭의 교회에서 그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척 초기이기 때문에 제법 많은 예산이 들어가지만 31.7%와 34.9%의 몫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목회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추수감사 헌금을 숭의학원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헌금함으로 거의 그 계산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번 달 성탄헌금 전액을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면 아마 제법 잘 그 기준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올해 처음부터 그 기준을 맞출 수 있다면 이제 모든 것이 거의 준비 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상당히 많은 몫을 밖으로 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미리 밝혀 두지만 무조건 밖으로 떼는 몫만을 생각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 교회를 깡통 교회로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으로 세우신 몫을 감당한 후에는 어느 정도 우리 교회에도 투자할 것입니다. 교인들에게도 서비스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개척교회를 비관하여 자살을 하였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또 다시 이삭줍기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 설교는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가지고 이삭줍기에 대한 말씀을 전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네 귀퉁이를 남기고 추수하라 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줍기 운동으로 실천하시어 가난한 자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남겨주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고 넉넉한 삶에 대하여 자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직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레 19:11-12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레위기 19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레위기 19장은 <신앙>과 <이웃에 대한 책임>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레위기 19장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는 말씀이 3, 4, 10, 12, 14, 16, 18, 25, 28, 30, 31, 32, 34, 36, 37절에서 15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 어디서도 그 말씀이 그렇게 집중적으로 반복된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 장에서 주어진 윤리명령들이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들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들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신앙인이 사회적 관계를 바로 갖기 위해 지켜야 할 명령들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 네 가지를 봅니다. 즉 도둑질하는 것, 속이는 것, 서로 거짓말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를 금하시는 명령을 한 가지 명령으로 환원한다면 “정직하라”는 명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이나 속이는 일이나 거짓말이나 거짓 맹세는 모두 정직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엄한 경고까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도둑질하고 속이고 서로 거짓말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 욕이 돌아가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정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매사에 정직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직은 또 사회에 팽배한 의심과 불신과 미움을 쫓아내고 사회를 튼튼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세월에 가장 놀라운 발전을 이룬 나라라고들 합니다. 물론 더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발전하려면 그냥 이대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직한 국민, 정직한 정부, 정직한 사회가 되지 않고서는 더 발전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정직은 국민 사이에 국민과 정부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합니다. 이 신뢰야말로 국가발전의 동력이 되고 국가안보의 가장 확실한 담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신뢰 없이는 국가의 부를 허비하게 될 것이고 국민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하면 손해 본다”, “정직은 바보들이나 하는 일이다”, “정직은 무능한 자들의 자기합리화에 불구하다”는 사고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예수 믿는 전직 외교관들의 모임에서 갖는 월례예배에 설교를 부탁받고 갔다가 한 전직 외교관으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사귄 미국 국무부의 고위 관료들이 처음에는 예의상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자 그에게 흉허물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하바드 대학에 들어가기를 좋아하는데 하바드대학에 입학한 한국학생 중 절반이 퇴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퇴학을 당하는 이유가 컨닝하다가 컨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컨닝하다가 퇴학당하는 학생은 한국학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퇴학당하지 않고 졸업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한 사람들 중에도 80퍼센트는 2년 만에 직장에서 쫓겨나는데 그 이유가 정직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사실과 미국 국무부의 고위관료들이 한국 사람들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래도 계속해서 정직하지 않은 국민, 정직하지 않은 정부, 정직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빨리 정직한 국민, 정직한 정부, 정직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이 “정직해도 손해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삶”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하고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어디서 누가 그런 것을 가르칩니까? 정부가 가르칩니까? 학교에서 가르칩니까? 가정에서 부모들이 가르칩니까? 오히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우선 남을 이기고 보고 남보다 성공하고 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아닙니까? “정직해도 손해 보지 않는다”, “정직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삶”이라 확신하고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 믿는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는 진실하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면 그를 믿고 섬기는 우리들도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해도 손해 보지 않는다”, “정직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한동대학교 총장님이 자랑거리로 하시는 것을 우리 교회 장로님 가운데 한 분이 들으시고 전해주신 이야기입니다. 한동대학교를 나온 졸업생이 어느 큰 회사에 입사하려고 시험을 치면서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사 회장님이 물었답니다: “한동대에서 4년간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러자 그 졸업생이 거침없이 대답했답니다: “정직을 배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회장님은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그 졸업생을 채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학교, 이런 학생, 이런 회장님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아직은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정직해도 손해 보지 않습니다. 정직해서 손해 보지 않는 사회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제가 프랑스 유학시절에 있었던 일 한 가지를 소개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제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3년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장학금 액수가 1000프랑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그때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였습니다. 매달 장학금을 받으면 먼저 학생후생복지지원센터에 들려서 한 달 치 대학식당 식권을 사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숙사에 돌아와서 한 달 기숙사비를 냅니다. 그리고는 십일조를 때고는 나머지 돈을 가지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곤 했습니다. 한 번은 장학금을 받고 늘 그랬듯이 먼저 학생후생복지지원센터에 들려서 한 달 치 대학식당 식권을 샀습니다. 식권은 한 장에 3프랑, 우리 돈으로 치면 300원 정도였습니다. 식권은 10장으로 되어있는 한 권을 30프랑씩에 팔았습니다. 하루 세끼 한 달이면 90장이 필요하니까 늘 아홉 권을 사곤 했습니다. 그날도 식권 아홉 권을 사고 기숙사에 돌아왔는데 와서 보니 아홉 권이 아니라 열 권이었습니다. 담당직원이 잘못 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학교 갔다가 강의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학생후생복지지원센터의 식권구매처에 들려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식권 한 권을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권판매 담당자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별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처음 들어보는 나라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 방에 있던 다른 여직원들도 자기들끼리 재미나다는 듯 그들 특유의 눈짓 몸짓을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나서 두 번째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을 때입니다. 첫 여름방학이 너무 덥고 지루했다는 기억 때문인지 두 번째 여름방학은 한국에 돌아가서 지내고 싶었습니다. 3년차부터 본격적으로 논문 쓸 준비를 시작하면 귀국할 수도 없고 그러기 전에 귀국해서 결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팔순이신 할아버님이 그 당시 위태로운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전에는 내려오시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시고 용문산에 금식기도를 들어가셨다는 소식이 와서 잘못하면 할아버님 다시 뵙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일어났습니다. 또 바로 아래 여동생이 결혼을 한다는데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 터에 오빠라도 있어줘야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귀국해야할 명분이 막 쌓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름방학 지내겠다고 일시귀국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수에 넘치는 일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던 일본학생이 귀가 솔깃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정부장학생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장학금 수혜기간 중 한 번 귀국할 수 있는 에어프랑스 왕복항공권은 주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 한 번 신청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묻기를 “그러면 네가 갔다오지 왜 나에게 그런 정보를 주느냐?” 했더니 자기는 사정상 방학 동안 죽어라 하고 논문 써서 빨리 귀국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 왕복항공권을 신청해보기로 하고 학생후생복지지원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알아보니 그것은 2층에 있는 보다 높은 책임자를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담당자를 찾아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한 중년 부인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정부장학생인데 여차여차 해서 이번 여름방학을 이용해 본국을 다녀갔다 오면 좋겠는데 혹시 도와줄 수 있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부인이 잠시 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혹시 오래 전에 대학식당 식권 한 권을 더 받았다며 반납하러 온 적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까맣게 잊고 지냈지만 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부인의 말인즉 그때 자기가 잠시 아래 층에 있던 식권구매처에 내려와 부하직원들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두 말 하지 않고 빠리에서 도쿄 경유 서울 행 에어프랑스 왕복항공권을 끊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귀국해서 할아버님도 만나 뵙고 여동생 결혼하는 것도 지켜보고 그리고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지금의 제 아내와 세 차례의 데이트 끝에 결혼도 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때 항공권 가격이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식권 한 권 우리 돈으로 3천 원에 정직했더니 하나님께서 수백 배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정직해서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 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손해 보지 않으니까, 아니면 수십 배, 수백 배로 복을 받기 위해 정직하려고 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해야 하고, 정직해서 특별히 더 복 받는 것 없어도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것 자체를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 번 했던 이야기이지만 제가 새문안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갖고 있던 집 사고 팔 때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대장암 걸려서 수술 받고난 후에 혼자 조용히 쉬기도 하고 책도 볼 공간이 필요해서 16평짜리 주공아파트 한 채를 사서 서재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을 1억1250만원에 샀습니다. 부동산소개소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다 보니까 매매가를 8천만 원으로 기입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매매가대로 하면 세금 많이 나오기 때문에 세금 백만 원 이하로 나오도록 알아서 다 해드린 것이니까 도장만 찍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매매가로 계약서 다시 작성해달라고 했더니 별 사람 다 본다고 투덜투덜하면서 그러면 세금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니 다시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복덕방 사람은 아주 기분 안 좋아하며 다시 작성해서 계약을 마쳤습니다. 그 일로 세금 많이 물었지만 기분은 아주 좋게 그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새문안교회에 부임하고 교회사택으로 이사 온지 얼마 있다가 그 부동산소개업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 집을 사겠다는 작자가 있는데 자기가 값을 잘 받아줄 터이니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하며 얼마를 받아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 복덕방의 말이 사려는 사람은 값을 많이 깎아달라고 졸라대지만 자기가 말하기를 “이런 분한테서는 한 푼도 깎아서는 안 됩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인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복덕방에게 제가 목사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새문안교회로 올 때 무슨 일 때문에 어디로 이사 간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이 사람이 우리 아파트를 매매하기 위해 수소문을 해서 제가 목사이고 새문안교회라는 데로 갔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구나 했습니다. 만일 그 아파트를 살 때 그 복덕방이 하라는 대로 매매가를 싸게 적어서 세금 적게 냈더라면 나중에 그 사람이 제가 목사인 줄 알게 되고 새문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속으로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뭐 목사라는 사람도 별 수 없더라. 대한민국의 어머니교회 담임목사라는 사람도 세금 덜 내려고 정직하지 못하게 매매가 속이고 치사하게 굴더라.” 했을 것 아닙니까? 정직하게 행동하게 지켜주시고 그래서 새문안교회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명령하시기에 정직하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직에 기초한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그동안 교회가 크게 잃어버린 사회로부터의 칭찬과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되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살고 나라도 살리는 길입니다. 갈수록 거짓이 판치고 거짓말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낄낄거리고 좋아하는 세태에 맞설 수 있는 길은 정직뿐입니다. 금년에 <선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교회표어를 내건 새문안교회입니다. 각 제직부서마다 어떤 선한 일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하는 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3.1절에 얻은 교훈
레 19:13-14 / 김근중 목사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놓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 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밥이 없 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먹듯 했단 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빵이 있었겠느냐". 그러자 아이는 또
"그러면 라면 먹 으면 되지 않아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시절의 배고픔 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며칠 있으면 3·1절 84돌 기념일을 보냈습니다. 3·1절은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 가고 우리네 관심 속에서도 지워져가고 있습니 다. 그 역사가 벌서 84년이나 되었 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일 제 때 우리 조상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부른 날이다."라고 대답 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특별한 관 심도 없고 역사적인 의의도 없습니 다. 그런데 이 날은 그렇게 쉽게 잊 을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근대역사 가운데 두드러 진 날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3·1절이고 또 하나는 8·15 입니 다. 이 두 날은 우리 신앙인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 이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 깊이 섭 리하신 날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날 은 우리 기독교가 꼭 되새기고 교훈 을 받고 넘어가야 할 날입니다.
3·1절이나 8·15는 모두 자유와 평등과 관계가 있는 날입니다. 인간 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입니다. 약자는 반드시 보 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성경말 씀의 정신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들 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여기 보면
"부약사상(扶弱思想)"이 나오고 있습니다. 약한 자를 도우 라는 정신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강 자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 습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 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 탈하지 말며 품삯을 떼먹지 말며 너 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며 네 하나님 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부약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약자 보호사상"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한가지 경고가 들어 있습니 다. 그것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고 핍박하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경고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민족 을 아주 가혹하게 압제했고 지배했 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주권 과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이름과 성 과 이 땅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약한 나라라고 얕잡아보고 통째로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습니 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부약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왕이 있어서 는 안됩니다. 그래서 고종을 독살하 려고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개를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에게 음식을 먹여서 별 이상이 없 으면 그제서야 안심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협을 당하면서 살 았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한일합병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민비였습니다. 민비 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냥 밀어붙이면 뜻대로 될 줄 알았는 데 똑똑한 여인 하나 때문에 가로막 혔습니다. 그래서 민비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군인들을 그 방에 집어 넣었습니다. 군인들은 민비가 자고 있는 침실에 군화발로 들어가 민비 를 칼로 찌르고 썰고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체를 녹지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일본이 이렇게 잔학하게 우리를 압 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무시했습 니다. 인권이고 주권이고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 을 하나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하 나님이 명령하신 이 부약사상을 송 두리째 무시해 버린 그들을 하나님 이 심판해서 그 나라가 잿더미로 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같은 압제를 받다가 견디지 못하 여 들고 일어난 것이 3·1 운동입니 다. 지금 그 1세대들이 모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역사 를 통해서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지 만 우리는 이 날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3·1절이라는 지 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 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고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 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 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치면 사 람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성 경 전도서 7:14절을 보면
"너희는 곤고하거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생각이 성숙해집니다. 어른스러워집니다. 고 난을 겪고 나면 상상도 못했던 생각 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고난이 지 혜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을 보면 참 문장이 아름 답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 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 상 앞에 앉아서 학문적으로 연구하 고 다듬어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 닙니다. 그 글 속에 절절한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외침이 거기에 담겨져 있 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지금 3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시인이 다 됐습니다. 어른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집에 있으면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 음식의 소중 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구구절절 이 철든 편지를 썼습니다. 철없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조금 맛 보더니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삶에 서 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이렇게 사 람을 변화시킵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보면 아들 에 대한 부성애가 절절이 흐르고 있 습니다. 그 기도문은 어느 날 번뜩 생각나서 쓴 기도문이 아닙니다. 전 장(戰場) 터에서 수많은 아픔과 죽 음을 보면서 체험한 것을 쓴 것입니 다. 보통 때는 그런 기도문이 나오 질 않습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남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 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 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보면 절절 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 랑, 헌신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 도 그가 참담한 방탕생활을 했기 때 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불 후의 명작으로 우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의
"실낙원"을 말합니다. 이 작품들도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이 암 흑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가면서 쓴 책들입니다. 한 사람 은 감옥의 고난을 겪으면서, 또 한 사람은 노년에 시력을 상실하는 아 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의 산물로 만 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흑인영가를 들어보면 심금 을 울리는 호소력이 들어있다는 것 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 인들에게 탁월한 음악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생활을 하면 서 아픔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면서 그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고백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입 니다.
그래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 각하게 만듭니다. 3·절이 일어나기 까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습니까.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하면서 겪은 것의 발로입 니다. 유순했던 민족성으로 보아 우 리 선조들이 어지간하면 봉기를 일 으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무 압제 를 당하니까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많은 생각 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3·1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3·1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 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 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날입니다. 평등, 자유는 하나님의 생 각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최 남선의 글을 보면
"평등, 자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는 그 말 을 기독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 다. 최남선이 살아가던 그 시대는 평등,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 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그 개념이 퍼지게 된 것 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그 말과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입니다. 평등이 없고 자유 가 없는 것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는 힘만 있을 뿐 자유가 없습 니다. 죄인들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 습니다. 평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 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 탈합니다. 짐승, 노예, 죄인은 이렇 게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이 없습니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자유 를 뺏고 억압하면 그 억압자를 하나 님이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보십시 오. 독재자는 그 권세가 하나같이 길지 못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 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독재자들의 말로를 보면 하나 같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 셔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조롱하지 말라. 소경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모두 부 약사상, 즉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어려움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거나 억압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당장 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군의 품삯을 떼어먹으면 당장은 돈이 쌓 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 인생 길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몇 배로 심판하십니다. 힘없는 사람 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면 하 나님이 대신 그 억울함을 갚으십니 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상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억 압하고 짓밟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밟으면 아 무 소리 못하고 밟힐 줄 알았습니 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용렬하고 무지해도 밟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 습니다. 들풀도 밟으면 죽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 신 정신이고 생명력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쉽게 꺾이고 죽겠습 니까. 그래서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는 자 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억압자 는 심판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 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억압당하고 살던 우리 선조 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모두 흥분하니까 삽을 들고 곡괭이를 들 고 작대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이 깜짝 놀랐습니 다. 참 무서운 민족입니다. 우습게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 주 무섭게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1운동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 3·1절은 알아주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를 조용히 되돌아 보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면 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 으킨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 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서 3.1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약자가 압제 당하면 대 신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점 입니다.
누가복음 19:40에
"이 사람들이 소 리지르지 아니하면 돌들이 소리지르 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리 질 러야 할 사람을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소리지른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압 제하고 억압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 이 소리질러 돕게 만드십니다. 내가 소리지르지 못할 상황이면 누군가가 대신 소리를 질러 준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소리질렀습니까. 그러면 일본은 쫓아다니며 소리지르 지 못하게 감시하고 윽박질렀습니 다. 그래서 세상 누구도 우리의 아 픔을 몰랐습니다. 모두 소리지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낙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던 스코필드 선교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민족의 참상들을 사 진에 담아 외국통신에 전해주었습니 다. 우리에게 언로가 막히고 길이 막히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렇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또 우리들이 소리지를 기운도 없을 때 대신 소리질러준 사람이 있습니 다. 그 사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 입니다. 그는 세계 만국평화회의에 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해 주었습니 다. 우리가 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 이 우리를 대신해서 소리를 질러 준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세계 여 러 나라가 비로소 우리 나라에 관심 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용기를 얻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약자들이 소리 를 질러도 누구 하나 들은 척도 하 지 않습니다. 재벌들이 꿈쩍도 안 합니다. 권력자들이 관심도 갖지 않 습니다. 그러니까 대신 소리질러 주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민 단체들입니다. 약자들이 권력자나 재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호소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까 시민 단체들이 나서서 벌떼같이 소리를 질러줍니다. 그들이 들고일어나니까 재벌들도 권세를 가진 정치가들도 무시 못하고 들어주지 않습니까.
3·1운동은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시민운동입니다.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는데도 세계에 메아리쳐 되돌아온 운동이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3·1절, 8·15 만 되면 괜히 흥분하게 됩니다. 그 래서 나는 매년 이 두 날이 되면 빼 놓지 않고 설교를 합니다. 그만큼 그 날들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 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잠시는 이익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당장은 수지 맞는 것 같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 니다. 더구나 약자, 가난한 자의 돈 을 떼먹으면 그 심판은 더 커집니 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 것도 심판 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들의 그 아픔과 참상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약자가 보호되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 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시고 약한 자들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 성경은 그 점을 말씀하고 있 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 먹은 자를 무시하지 말라, 소경 앞 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나는 여호 와니라"
이 말은 이렇게 약한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84년 전에 일어 났던 3·1운동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레위기 19:17-18 /
한 소년이 하나님이 사시는 곳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배낭에 초코렛과 음료수를 챙겨 메고 길을 나섰습니다.
얼마큼가 공원앞을 지나는데 한 늙은 할머니가 우두커니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공원 벤취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은 좀 쉬어가려고 벤취로가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려고 꺼내다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초코렛을 꺼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 들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할머니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소년은 그 미소를 보기 위해 또 음료수도 건네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또다시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소년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그 날 오후를 그렇게 먹고 마시며 미소지으며 공원 벤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 소년은 집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챙겨 메고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몇 걸음 가다가 소년은 할머니에게 달려와 할머니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소년에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잠시 후, 집에 돌아온 소년에게 그 어머니가 소년의 환한 얼굴을 보고 "오늘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행복하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가 뭐라 하기도 전에 소년은 덧붙였습니다.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계셨어요"
그동안 할머니는 역시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어머니,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난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코렛을 먹었단다." 그녀 역시 아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덧붙였습니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잔잔하면서도 매우 감동적인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한 토막의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시대가 잃어버린 얘기입니다.
오늘의 말씀도 "이웃"이 주제인 말씀입니다.
레위기 19:17-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별된 삶이란 경건한 삶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웃사랑이란, 이웃을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이웃이 죄를 짓지 않도록 선도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않고 동포를 원망하지 않으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랍비들은 이웃을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모든 성실과 윤리와 경건은 이 이웃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0:25-37절의 말씀은 선한 이웃에 대한 비유입니다.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였다고 대답하자 "너도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누가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는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피해가고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보고 피해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고 주막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다 주라. 부비가 모자라면 내가 올 때 갚겠노라고 했다. 이 셋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자 입니다. 그러면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선한 이웃의 길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선한 이웃은 감정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레위기 19:17절 상반절에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18절 상반절에도 "원수를 갚지 말며 네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하신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 10:33절에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모두 감정의 극복을 권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0: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하신 말씀과 31절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 거기 이르러…" 하신 말씀은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그들이 상종치도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구해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웃사랑을 잘 알고, 잘 가르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유대인에게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구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감정의 벽을 넘지 않고서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양치는 목장주는 동리의 개들이 자기 양을 자꾸 물어 죽여 골치를 앓았습니다.
방법은 법에 고소를 하든지, 가시 철조망을 치든지 그것도 아니면 총을 든 목동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그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개가 있는 집마다 어린이들에게 양 새끼 한 마리씩을 선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개 있는 집마다 개를 묶어두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총살당한 덴마크의 목사 뭉크(kaj munk)는 유대인 학살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증오로 만신창이가 된 세계 속에서 사랑과 용서를 설교한다는 것은, 약한 자를 돕자는 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친구가 되어주자고 하는 것은 그것이 착각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착각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정의 벽을 넘어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좋은 이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한 이웃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누가복음 10:34절에 보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바쁜 여행길에서 모두 시간이 요하는 일입니다. "가까이 가는 일"도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는 일"도 "싸메어주는 일 짐승에 태워 데리고 가는 일"도 "돌보아 주는 일"도 "이튿날…"이란 말도 모두 시간이 요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체를 만지면 하루동안 부정하여 성밖으로 쫓겨 나야하고 성물을 먹지 못하고 그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레위 11:24)
선후를 다투는 이런저런 일들 가운데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먼저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원버스에서 소아마비된 청년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기는 내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바쁘지 않으세요?" 이때, 그녀의 대답은 "버스는 또 곧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토막에 얘기는 저마다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벽을 넘지 못해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로하는 이웃을 그냥 피해 왔습니까?
저는 바쁘다는 이유로 오래 중병에 시달리던 교우들의 임종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고쳐 할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일에 우선의 가치를 두고 시간의 벽을 넘어 선한 이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선한 이웃은 물질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35절에 보면,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으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을 돕는 일을 빚을 져 가면서 돕는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감정의 벽을 넘고 시간의 벽을 넘고 돈이 떨어졌어도 돌아올 때 갚겠다고 물질의 벽도 넘고 있습니다.
옛글에 "천금으로 집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금으로 집을 짓고 천금으로 이웃을 사는데도 인색합니다.
입동이 지난 지금, 한 권의 휴먼 스토리가 세계인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스가 세상에 남긴 선물" 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주 오랫동안 영원히"라는 에세이입니다. 5년전, 미국의 한 단란한 가정이 이태리 여행 중 노상 강도가 쏜 탄환에 머리를 맞은 어린 아들 니콜라스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 니콜라스의 부모는 얼마를 방황했으나 마침내 슬픔을 가슴에 묻고 아들을 빼앗아간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아들의 장기를 기증해 일곱 사람에게 새 생명을 준 감동의 스토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새가정 10계의 마지막 설교를 마치면서 먼저, 가장 가까운 내 가정에서부터 부모님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시어머니와 며느리에게, 사돈과 팔촌에게 그리고 가깝고 멀리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정, 시간, 물질의 벽을 넘는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 영생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