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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로 보편적 이념이나 절대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는 발걸음보다는 개별자들이 뒹구는 구체적 세계의 힘을 향하려는 의욕으로 채워져 있다. ‘저기’보다는 ‘여기’를 품으려 하였다. 이상을 쳐다보는 숭고한 노력보다는 일상을 직접적으로 누리는 잡다한 수고를 기꺼워한다. 이론으로 문제를 관리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바로 문제와 사건으로 침투해 들어가자고 하였다. 선善에 대한 자의식과 실천 의지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말하였다. 보편의 그늘 아래서 초라해 보이도록 강요된 개별자들이 사실은 완결적 존재라는 말도 썼다.(8쪽)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여기서“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안다”는 것은 ‘합의된 아름다움’, 즉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는 아름다움을 진짜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합의된 아름다움’은 이미 기준이 된 아름다움이다. 정의된 아름다움, 공감대가 형성된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집단화된 아름다움이다. ‘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우리’의 아름다움이다. 이 합의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을 나의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노자는 이런 태도를 매우 저급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공자가 말한 살신성인이나 극기복례식, 즉 멸사봉공식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반대하려는 노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51쪽)
노자가 바라는 인간은 저 먼 곳이나 저 높은 곳에 설정되어 있는 이상적 체계나 기준을 갈망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 자연성에 충실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정해진 어떤 특정한 맛이나 옷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먹고 있는 음식을 맛있어 하고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예쁘다고 여긴다. 자신이 지금 처한 구체적인 곳에 충실하지, 지금 이곳의 구체성을 버리고 저 멀리 걸려 있는 이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지 않는다.(104쪽)
노자가 파악한 이상적인 인간인 성인은 “배(腹)를 위할망정 눈(目)을 위하지 않는다.” 여기서 배는 나의 내부에서 내 자체대로 느끼지만, 눈은 밖을 향해 뚫려 있으면서 내가 아닌 저 멀리 있는 것을 본다. 배는 바로 내 몸에 있는 ‘이것(此)’이고, 눈은 항상 밖에 있는 ‘저것(彼)’을 향해 열려 있다. 어떤 가치 체계 혹은 이상 등은 모두 이 세계를 벗어나 저 멀리 있는 것들이다.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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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노자는 공자와 달리 ‘거피취차(去彼取此)’를 주장한다. 인간의 본래성과 거리를 두고 ‘저기 멀리’ 존재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보편 이념을 포기하고, 바로 ‘여기 있는’ 네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일반명사로서가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살 것을 요구한다.” (81쪽)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거피취차(去彼取此)’로
노자가 파악한 이상적인 인간인 성인은 “배(腹)를 위할망정 눈(目)을 위하지 않는다.” 여기서 배는 나의 내부에서 내 자체대로 느끼지만, 눈은 밖을 향해 뚫려 있으면서 내가 아닌 저 멀리 있는 것을 본다. 배는 바로 내 몸에 있는 ‘이것(此)’이고, 눈은 항상 밖에 있는 ‘저것(彼)’을 향해 열려 있다. 어떤 가치 체계 혹은 이상 등은 모두 이 세계를 벗어나 저 멀리 있는 것들이다. (103쪽)
공맹은 인간의 내부에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는 특정한 내용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 인간을 자연적 자아를 극복하고 보편적 자아가 자리하는 체계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야(克己復禮) 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저 높은 곳에서 이상화되어 있는 보편적 문화 체계에 구속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자연적 자아에 충실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하여, 노자는 극기복례에 대항하여 거피취차(去彼取此), 즉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고 역설했다. 거피취차의 의미를 자세히 본다면 노자가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 훨씬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물론 거피취차는 인위(人爲)와는 다른 무위(無爲)의 구체적 방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것’은 무엇이고, 또 ‘이것’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버려야 할 ‘저것’은 문화적으로 설정된 체계로서 개별적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저 먼 곳의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념 혹은 그 이념을 향해 내달리는 기능을 하는 것들이다. 한편, 취해야 할 ‘이것’은 이념성적인 체계의 영향이 아직 닿지 않은 순전한 ‘자기 자신’의 영역으로서 개별성적인 자기 자신의 인격적인 모습을 지키는 기능을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지켜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본래성을 유지할 수 있다. 거기에 바로 순수한 욕망의 실현과 진정한 행복이 깃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외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자발성에 충실한 개인은 ‘겸손한 주체’로 성장하여 ‘행복한 일상’을 정성껏 누린다.
노자는 그것을 “자기 자신이 먹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맛있다 여기고, 자신이 입고 있는 바로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신이 살고 있는 바로 그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자신이 사는 바로 그 풍속을 즐긴다”고 표현하였다. 먹고, 입고, 거처하고, 즐기는 구체적 삶의 행위가 맛?음식?거처 그리고 풍속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어떤 상태에 압도당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구체적 삶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을 ‘약탈당한 생활 세계’가 회복된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과 삶이 일치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다. (295쪽)
유가의 전통은 무엇인가? 성인이 만들고 성인이 전하는 성인의 말씀은 바로 저 멀리 있는 어떤 이상으로 우리가 내달려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반면, 노자는 저 멀리 어떤 이상이나 체계를 상정하지 말자고 한다. 그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몸,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세계의 운행 원칙을 모델로 하여, 문화력의 지배를 근거로 하지 말고 소박하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피취차’의 의미이다. 저자가 ‘노자’라는 웅숭깊은 샘물에서 길어 올린 ‘거피취차’는 노자 철학을 오롯이 드러내는 알토란 같은 말이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노자는 은둔의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가는 적극적이고 도가는 소극적이며, 유가는 현실 참여적이지만 도가는 현실 도피적이며, 유가가 문명 건설적이라면 도가는 문명 비판적이고, 유가가 도덕적 군자상을 강조한다면 도가는 반도덕적 은자의 형상을 추구한다고 알고 있다. 이 책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의 저자 최진석 교수는 노자나 도가 철학이 정말 현실을 초월하거나 이탈하여 현실에는 아무런 의지나 바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데 강한 의심을 갖는다.
저자에 따르면, 단적으로 말해 노자의 철학은 은둔의 철학이 아니다. 노자는 공자와 다른 패러다임의 정치 형태 내지는 통치 방법을 제시한 것일 뿐, 정치나 통치 및 현실을 외면한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노자는 당시 인문주의적 풍토에서 크게 힘을 얻어 가던 공자의 철학이나 통치 형식과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제시한 문명론자라는 것이다.
노자는 현실의 역사를 도외시한 채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은둔자가 아니었다. 공자가 지향하는 정치 형태는 지배자인 군자들의 도덕적 자각에 호소하면서 규범이나 신분이 정해진 대로 그 신분 질서에 맞는 일정한 행위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다. 반면 노자는 이런 정해진 신분 질서나 그 신분 질서에 맞는 행위 규범의 준수보다는 인간의 순수성이나 생명력이 유지되는 정치 형태 즉 인위적으로 정해진 질서에 맞추어진 정치가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는(民自化)” 정치 형태를 지향했다. 교육이나 ‘예’로 인간의 행위를 조절하려는 공자 식의 유가와는 분명히 다르다. 구분된 ‘예’를 잘 알고 실천하는 성인의 모델을 버려야 백성들의 삶이 더욱 번성한다고 보거나, 고정된 인의(仁義)의 덕목을 버려야 오히려 효자의 심성이 잘 발휘된다고 보는 노자의 사상은 성격상 공자의 그것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모습이다. (35쪽)
https://www.youtube.com/watch?v=RkDr2N2hOI8
경계에 서야 강렬해진다
이 책은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가 최근 15년간 발표한 논문과 비평문 등 17편의 글을 골라서 수록한 것으로, 이전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2013년, 소나무)에서 유려하고 맹렬하게 펼쳐졌던 최진석 사유의 뿌리를 만져 볼 수 있다.
① 1부 <노자와 장자, 현대의 철학자들>에서는 장자의 인간관, 노자의 귀신(貴身) 관념,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한 노자 철학, 장자에게 지식과 놀이의 의미, 칸트와 노장 철학의 비교 등 ② 2부 <경계 위를 걷는 철학>에서는 노자의 자연관과 생태 문제, 도가의 생사관, 포스트모던적 유학 읽기 비판 등 ③ 3부 <틈새를 견디는 긴 호흡을 위하여>에서는 공자의 직(直), 공공(公共) 철학의 공복(共福) 사상, 욕망을 매개로 본 선진(先秦) 철학, 곽상 철학의 자성(自性) 개념 등을 살핀다. ④ 마지막 4부 <불안은 탄성을 낳는다>에는 미술비평문, 교토포럼 참가 인상기 등을 실었다.
특별히, 독자에 따라서는 4부에 실린 ?심업과 ‘뽕뽕이’?란 미술비평문을 이 책의 절정으로 읽을 수도 있으리라. “어린 시절부터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더 많이 해왔던 친구가 달라지지 않은 것, 점잖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찬사의 일종”이라고 밝힌 이 글에서 저자는, 심업 작가의 ‘예술력’은 순치되지 않은 그의 야수적 본능이라고 힘껏 말한다. 즉 아직 인간 이전의 언어에 머물고 있는 미숙함이 그의 힘이라는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 동물’로 정하고 살아 왔다. 인간에게 있는 본능적 동물성을 어떻게 이성으로 질서화하고 비율을 잘 맞추어 행사되게 하는가가 ‘덜 인간’보다 나은 ‘더 인간’을 가려내는 척도였다. 인간을 ‘계산’의 능력인 이성의 틀로 이해했던 삶은 보편적 계산의 얼개에 자신을 편입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산다는 것은 정작 집단적 이념의 공간 속으로 내몰리게 되는 과정이었다. 결국 집단적 이념을 내재화한 것을 자신의 가치로 착각한 인간은 자신이 종속적인 주체로 전락해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정말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한 채 시간을 겪어야 했다. 예술가로서 심업은 이것을 동물적 촉수로 느끼고 부단히 저항하고 갈망했다. 저항과 갈망, 이 불일치 속에서 심업은 “의리는 있으나 주의가 산만하고 난폭”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글에서 밝힌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떤 권위도 다 시큰둥”하였으며, “모범생 얼굴을 가졌지만 내면은 거칠고 삐딱”했다는 최진석의 고백과 겹친다. “문제아로 남고 싶었지, 정해진 이론에 의해 정련되기를 거부”해 온 그의 철학적 여정 또한 그 거친 결의 감촉이 비슷하다.
관계에서 오는 ‘불안’은 곧바로 탄성을 산출한다. 제자리를 찾아 안정적으로 서 있는 것은 사실 삶을 마감한 상태이다. 그것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 관계를 함축하는 경계의 존재는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립하는 양면을 모두 살려내어 팽팽한 긴장을 견디게 만든다. 산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것이 마치 유령처럼 존재한다. ‘뽕뽕이’는 유령 같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 관계이고, 자기 스스로 경계이면서 맥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맥없음 안에서 발견되는 ‘탄성’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느낀다. 방 하나하나에 탄성을 가득 채우고 아무런 의지 없이 어떤 실체를 위하러 길 떠날 채비를 하듯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심한 그놈 앞에서 그놈의 공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 경계에 서야 그렇게 강렬해진다. 그것이 ‘관계’의 힘이다. (363~365쪽)
이제, 우리는 “구멍이 좀 듬성듬성 나고 허점이 가려지지 않더라도, 그냥 그렇게 걷고 싶었을 뿐”이라는 철학자 최진석만의 무늬를 바투 대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