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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여름 방학
올 여름 방학에 세웠던 유일한 계획인 ‘비오는 날 샌달 신고 대둔산 오르기’는 결국 계획으로 끝나버리는 것 같다. 내일이 개학이다. 나의 여름 방학이라는 것은 길기만 할 뿐, 항용 이렇게 시시하다. 올 여름 방학은 그나마 덜 시시한 편이었다. 여름마다 해 온 ‘우리말 교육 대학원’의 강의 이외에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강의를 세 차례나 하였기 때문이다. 나 같은 시골 학교 선생까지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하다니, 지구촌(globalization)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분명하지? (잉글리시 스피킹도 어렵고, 잉글리시 히어링도 어렵더라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교사이다. 이들은 방학을 틈타 강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니, 그 사람들이 강의에 임하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더라. 내가 관찰한 바로는, 최소한 세 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러니까 학교 선생들이 방학을 보내는 방법에는 최소한 세 가지가 있는 것이다.
<놀기와 일하기>
벨루즈라는 나라가 있더라. 멕시코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로서,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연방의 일원이라고 한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은 거의 미국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백묵과 칠판을 쓰는 예전(old) 스타일로 강의를 하는데, 그것은 나 자신이 50세가 넘은 예전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자, 아줌마들이 즉각적으로 “어이, 영 보이, 왜 그러시나, 우리께에서는 50 대면 청년이거든.”이라고 대꾸를 하였다. 아줌마, 아가씨, 아저씨 등등이 섞여있었는데, 모두 과학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과학교육에 관하여 공부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온 것이지만, 그리고 상당히 열심히 청강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어쩐지 이들이 공부를 하러 온 것이라기보다는 관광을 하러 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점은 스리랑카에서 온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최측(KOICA)에서도 그들을 향하여 “선생님들, 학기 내내 수고 많으셨으니 한국 구경도 좀 하시면서 푹 쉬시되, 과학 교육에 대하여 배워가는 것이 있으면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하고 묵언으로 말하는 듯한 눈치였다. 벨루즈 교사들은 나와 동전을 교환하였고, 스리랑카 교사들은 나에게 본 차이나 컵과 코끼리가 그려진 작은 장식품을 선물로 주었다. 약간 들뜬 듯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으며 매 시간을 즐겼다.
마지막으로 만난 이라크 사람들은 달랐다. 이 사람들에 대한 강의는 이번 주 수요일에 있었는데, 나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강의실에 들어갔건만 전 시간의 강사가 아직 강의실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수강생들 몇 명이 강사를 붙들고 내보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라크 사람들의 열의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강의 주제도 달랐다. 이라크 사람들은 이른바 인적자원개발(HRD)에 관하여 배우기 위하여 내한한 것이었다. 교사들 사이 사이에 교육부를 포함한 여러 부처의 관리들이 섞여 있기도 하였다. 이들은 전후(戰後) 거의 폐허가 된 이라크를 복구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 실력에 대하여 말하자면, 세 국가의 수강생들 중 이들이 제일 쳐져서 이들은 자국인 통역을 대동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영어로 말하면, 통역이 이라크말로 옮겨주는 식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말해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그 뜻이 불분명한 말을 엉터리 발음으로 뱉어 놓아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코가 엄청나게 높은 이라크 미녀는 일 초의 지체도 없이 통역을 하더라.) 이렇게 의사소통이 불편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싹 다가앉아 경청하고 질문하였다. 이들은 놀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같은 포항 제철을 방문하더라도 벨루즈 사람들과 스리랑카 사람들이 ‘관광’이나 ‘구경’을 하였다면, 이들은 ‘견학’이나 ‘시찰’을 하였을 것이다.
벨루즈 사람들과 스리랑카 사람들이 관광차 내한한 것이라면, 이라크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인적자원을 개발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염두에 둔 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하여 - 예컨대 인적자원개발의 모델을 비롯한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하여 - 내한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벨루즈, 스리랑카 교사들이 놀러 온 것이라면, 이라크 교사들은 일로 온 것이다. 이번 방학에 우리나라 교사들도 외국에 많이 나갔을 텐데, 그 중 일부는 놀러 나간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일로 나간 것이다. 국내에서 방학을 보낸 교사들도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부는 놀았고, 일부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공부하기>
방학을 보내는 제 3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인적자원개발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는 일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특정의 의도나 목적을 가진 채 오로지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강하는 일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의도나 목적은 자격증을 받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학위를 받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교장 자격 연수”에 참여하거나 대학원에 입학하여 수강하되, 자격증이나 학위를 받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경우 그것은 순수한 공부라고 인정해 주기 어렵다. 그 목적이나 의도의 강도만큼 순수성이 침해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순수하지 못한 자리에 나가 강의를 해 본 경험이 많다. 그런 자리에서 수강생들은 제삿밥(자격증이나 학위)에 관심이 있을 뿐, 염불(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이러한 씁쓸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우리말 교육 대학원’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언젠가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대학원’은 대학원으로서의 체제와 내실을 착실하게 갖추고 있되, 국가에서 인정하는 학위(석사 학위)는 수여하지 못한다. 이 대학원은 ‘전국 국어 교사 모임’이라는 사설 단체에서 만든 사설 교육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학원에서는 단점이 장점이요, 결함이 영광이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학위를 수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도리어 장점이며 영광이라는 말이다. 이 곳에 입학하는 교사들은 석사 학위 대신에 그보다 더 큰 것을 가져간다. 아니, 입학할 때 그것을 스스로 가지고 온다. 그것은 자부심이다. 그 자부심은 위에서 말한 순수성에의 자부심이다. 이들은 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공부 자체에 관심, 아니 열의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말 교육 대학원’의 강의실은 거의 독기어린 열의로 가득 차있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쾌활함과 명랑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30명 쯤 되는 국어 선생님들은, 이 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들이었지만, 자부심의 공유에서 나오는 연대감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듯하였다. 방학을 보내는 제 3의 방법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사들이 크고 작은 모임을 만들어 공부를 하였을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교사들이 어딘가에 틀어박혀 홀로 공부를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공부의 내용이 문제다. 다른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 순수하게 공부를 하되, 바른 내용의 공부를 하여야 한다. 예컨대 (잠시 전에 말한 바 있는) 인적자원개발에 관한 정보 -- 이것은 바른 내용이 아니다. 그런 내용을 다루는 강의를 듣는 것을 가리켜 “공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는, 그런 내용을 다루는 책자를 읽는 것을 가리켜 “독서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오늘날 유행하는 이른바 ‘자기 개발’은 그 대부분이 공부가 아니다. 다시 국어 교사로 돌아가서, ‘우리말 교육 대학원’의 강의 내용에, 예컨대 효과적인 국어 교수법 같은 것이 들어있다면, 그 강의에 관한 한 ‘우리말 교육 대학원’은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다. 국어 교사들은 국어를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국어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국어 교사들은 교수의 실제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의 이론을 배워야 한다. 그러한 내용의 배움이 진정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공부의 내용에 관한 이상의 내 주장은 찬성하기 힘든 이상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알아듣기 힘든 어려운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교사상은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납득시킬 수도 있다. 나는 오늘날의 부동산중개업자보다 예전의 복덕방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듯이, 각종 교수법으로 무장한 현대의 전문적인 국어 교사보다 일제 시대의 국어 교사, 즉 신문 기자도 하다가, 소설가로 작품도 쓰다가, 심지어 만주로 달아나서 독립 운동도 하는, 그런 국어 교사를 더 좋아한다. 이 사람은 현대의 국어 교사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국어를 잘 알고 잘 하는 교양인이다. 전문적인 국어 교사가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면, 이 사람은 그 작품에 버금가는 작품을 몸소 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문적인 교사가 학생을 위하여 산다면,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산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배우는 일이요, 배움을 위주로 한 삶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 각주: 지구촌화(globalization)는 그 자체로 나쁜가?
나는, 외국에 나가는 것은 ‘놀기’ 아니면 ‘일하기’라고 생각하는 듯 썼다. 즉 거기에는 ‘공부하기’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 썼다. 심지어 나는, 공부하기는 ‘우리말 교육 대학원’처럼 자기 나라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지 모른다. 물론 외국에 나가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 (사실 벨루즈나 스리랑카, 이라크 교사들을 상대하였을 때에도 나의 강의 내용은 공부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나는 “‘과학적인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으며, “인적자원개발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을, 석탄이나 철광석처럼 하나의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인데, 그래도 상관없겠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지구촌화’는 ‘외국에 나가는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지구촌’이라는 말은, 외국이 옆 마을, 아니 옆 집처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가까워진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거기에 가서 놀거나 일한다. 가까워진 외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놀고 일하도록 유혹한다. 이것이 법칙이다. 이상 국가에 관한 노자(老子)의 기술에는 이런 구절도 들어 있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이웃 나라는 고개를 쳐들면 보이는 거리에 있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지만, 백성들은 늙어죽을 때까지 가 보지 않는다.” 어째서 노자가 나라 사이의 교류를 탐탁치 않게 여겼는지는 뻔하다. 노자는 지구촌화는 그 자체로 나쁘다고 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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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하이요^^.
내가 선생이나 교수를 부러워하는것은 방학이있기 때문이지...울 영태교수님 이번 여름방학도 바쁘게지내셨구먼...영어로 강의 할 정도면 영어도 잘하는가바~
영어 못한다고 썼는데, 영어 잘 한다고 쓴 꼴이 되었나? 재국군, 하이루^^ (하이요는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