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분위기의 여름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요함이 내려앉은 겨울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인적이 뜸해져 민얼굴을 드러낸 겨울바다를 마주하면 기분좋은 적막감마저 느껴진다. 겨울의 문턱에 진입한 11월 초순, 차분한 바다를 만나러 강원 강릉 헌화로로 향했다.
‘검푸른 바위의 언저리에/손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아두고/나를 나무라지 아니하신다면/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신라시대 강릉 태수(지방관)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이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그녀는 절벽 위에 핀 철쭉에 반해 이 꽃을 따다 줄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이라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름하여 헌화가(獻花歌)다. 노래의 배경과 흡사한 풍경을 가졌다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이 바로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헌화로다.
헌화로는 강릉시 옥계면 금진해변에서 정동진항까지 이어지는 약 6㎞ 길이의 해안도로다.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이곳을 제대로 감상하려고 금진해변에서 차를 타고 출발했다. 평온한 해변이었던 차창 밖 풍경은 출발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검푸른 망망대해로 변했다. 드넓은 바다가 도로와 가까워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다 맞은편으로 눈을 돌리니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차를 덮칠 듯 위압적으로 따라왔다.
아찔한 절벽과 탁 트인 바다를 찬찬히 감상하고 싶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도로 한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차를 세우고 벤치에 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파도소리뿐, 헌화로엔 고요함만 가득했다. 간간이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는 드라마 <시그널>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켰다.
“20년 후에도 거긴 그럽니까? 뭔가 바뀌었겠죠?” 1989년을 사는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는 2015년의 박해영(이제훈 분) 경위에게 염원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것은 없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잘 먹고 잘사는 현실. 좌절하면서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미제사건을 풀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속 이재한 형사가 사라지고, 현실의 박해영·차수현(김혜수 분) 형사는 그를 찾기 위해 헌화로를 달린다. 이어 ‘이 길의 끝엔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박해영의 내레이션이 나오며 극은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린다.
문득 헌화로를 달리던 주인공의 모습이 현실의 우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만날지 몰라 두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삶을 사는 모습 말이다.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파도가 드라마 속 인물처럼 시련이 닥쳐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드라이브가 끝났다. 그대로 정동진 방향으로 10여분을 더 달려 두번째 목적지에 닿았다. 강릉통일공원이다. 관광지로만 알고 있던 강릉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사실 강릉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고장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최초로 남침해 상륙한 곳이자 1996년 북한 잠수함이 침투한 지역이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강릉에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공원이 조성됐다니 이색적이지만 한편으론 자연스런 일이라 느껴졌다.
퇴역군함이 전시된 함정전시관과 한국전쟁 관련 기념물이 있는 통일안보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 야외전시장으로 나왔다. 그곳엔 실제 육군과 해병대에서 썼던 탱크가 줄지어 서 있다. 탱크 앞으로는 동해가 끝없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분단의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묘한 조화로움을 감상하며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릉=최문희 기자 mooni@nongmin.com
드라마 ‘시그널’
무전기로 과거와 소통하며 미제사건 해결하는 이야기
2016년 케이블 채널 tvN에서 방영됐다. 과거와 연결된 무전기를 통해 미제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경찰의 이야기를 그렸다. 탄탄한 구성과 김혜수·조진웅·이제훈 등 배우들의 명연기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