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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회원들. 이미 친구이자 형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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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사랑을 할려면 요 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말자 굳게굳게 다진 사랑….”
조용히 얘기가 오가는가 싶더니 문 틈사이로 난데없이 민요 ‘사랑가’ 한 대목이 튀어나왔다. 혼자 듣기에는 아까운 꾀꼬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평양이 고향인 올해 83세의 최알비나 수녀(까리따스수녀원). 근래 좋은 일이 있어 주위의 축하 인사말을 받게 된 그녀가 내친김에 화답의 의미로 ‘사랑가’ 한 곡을 뽑아 든 것이다.
몇 몇 사람들은 이미 무릎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10대 소녀들처럼 재잘 거리는 풋풋한 웃음소리, 그리고 연이어 터지는 박수소리…. 이쯤하면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 핑계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방안은 그렇게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10일 오후 광주시 남구 진월동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이금주(88)씨 댁. 낡은 슬라브 주택 2층의 손바닥만 한 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70~80대 할머니들이었다. 내일 모레면 100세를 바라보는 최순덕(97.구네군다.세례명) 선생까지 당당히 자리를 틀고 있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70~90대 할머니들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1974년 월산동 성당에서 출발...34년째
천주교 신도들의 한 모임인 ‘마르가리따’회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74년 무렵. 광주 월산동 성당의 한 여성신도들이었던 이들이, 신앙을 함께 나누고 좋은 일도 같이하자며 모임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올해로 34년째다.
“성당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는데 하나같이 서로 마음이 맞았어요. 또래가 비슷한 나이에 있는 분들끼리 가난한 이웃도 살피고 성서 공부도 하자고 모인 것이었지요.”
임원이랄 것도 없는 모임이지만 총무 역할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금주(88. 바울라)씨 설명이었다. 처음에는 ‘한마음’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 뒤로 ‘마르가리따’로 바꿨단다. 모임은 한 달에 한번, 매월 셋째 주 수요일 오후 2시다. 34년의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모임을 거슬러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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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시샘의 눈초리까지 받을 만큼 단짝이었던 지난날 회원들의 모습. 10여년 전 한 회원의 아들이 모임을 같이 하는 할머니들끼리 어디 놀러라도 다녀오라며 50만원을 주자, 그 돈이 아까워 같이 당시 5만원짜리 한복을 곱게 맞춰 입기도 했단다. 사진 중 몇 분은 이미 작고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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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면 열정의 시간들이었다. 34년 전 그 마음처럼 그동안 이들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살피며 한편으로 신협 운동에도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왔다. 신도를 가리지 않고 이웃을 돌아봤고, 밤중에라도 전화가 오면 자다가도 일어나 문 밖을 나서는 통해 아들 며느리 잠을 설치게 만든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들의 초상에는 산에까지 따라다니며 고인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 모임의 회장이자 최고령자이기도 한 최순덕 할머니는 “우리 딸이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70대 老 교수 “저는 이 모임의 막내지요”
70대 연배면 어디를 가서도 이제 어른 대접을 받고 있을 처지이지만, 회장이 97세, 총무가 88세인 이 모임에서는 감히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처지다. 4년여 전 광주 가톨릭대학에서 정년퇴직한 박상배 교수(70. 광주 가톨릭대학)가 딱 그런 경우다. 박 교수의 나이도 이제 칠순이건만 이 모임에서 만큼은 아직도 막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순덕 회장님을 제외하더라도 우선 90대로는 최양기(92.루시아), 최봉희(90.로사리아)씨가 계시고, 모임에 허리격이라 할 80대만 하더라도 6명이나 됐다. 이금주(88.바울라), 김춘엽(83.광산구 우산동.김안나), 최알비나 수녀(83.광주까리따스수녀원), 윤해출(82.북구 양산동.데레사), 장순임(80.남구 진월동.아네스)씨 등이 아직 짱짱이 건재해 있는 것.
70대라고는 고작 막내나 다름없는 김재림(76.마리나. 남구 방림동)씨와 유일한 남자 박 교수가 있을 뿐이다. 최근 이이덕(89)할아버지는 사별한 할머니 뒤를 이어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할머니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단다. 80대가 모임의 허리격이라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당시 성당에서 교리를 가르치던 박 교수는 성경을 지도해 달라는 ‘한마음’회 신도들의 요청을 받고 이들 모임에 참여해 왔다. 박 교수는 “혼자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해 오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며 “우리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 더 돌봐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래도 그 아들. 딸들이 다 잘 돼서, 나중에 고맙다고 찾아와 줄 때가 가장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34년의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모임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박 교수의 숨은 노력이 적지 않다. 바쁜 와중에도 수 십년째 잊지 않고 이 모임을 챙겨왔고, 할머니들을 만나러 왔다가도 미처 끝내지 못한 수업을 위해 서둘러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남자 신도들도 없을 무렵, 같은 또래도 아니면서 여자들 모임에 와서 성서풀이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죠. 얼마 되지 않는 회원에 무슨 보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 죽어가는 우리 노인들을 이끄시느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걸러본 적이 없어요.” 30년을 함께 동고동락해 온 할머니 신도들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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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대 교수와 80. 90대 할머니 회원들이 같이 기도로 감사의 시간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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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무엇이 34년 동안 이분들을 떠나지 못하게 했을까.
“40대 초반에 만났는데, 그동안 정이 들었어요. 비좁아도 좁다는 말 한마디 않으셨죠. 보통의 모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흠을 갖고 얘깃거리를 삼는 반면 이분들은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칭찬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인연이고, 운명이기도 하죠.”
유별난 이들의 친분 때문에 한때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함께 시샘의 눈초리도 받아야 했단다. 한 할머니는 “사실 그 당시 박 교수의 인기가 많긴 많았다”고 살짝 귀 뜸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봉사활동에 나서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허리가 구부정한 황혼의 나이들이 되고 말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이던 사람들이었지만 살다보니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멀리는 담양 광주댐 인근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머지 회원들도, 북구, 광산구, 남구로 각각 흩어져 살고 있다. 처음 열 댓명 되던 회원들 중 이제 남은 사람은 10여명 남짓이다. 올해만 해도 2명의 할머니들이 고인이 되셨다.
시내버스 3번 갈아타고 오신 김안나 할머니
34년을 한 결 같이 이어온 팔순 할머니들의 발걸음 앞에 아들, 며느리들도 이젠 두발, 두 손을 다 들었다. 이들의 특별한 외출을 위해 택시로 모시는 사람 있는가 하면,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해서 손에 들려 보내기도 한다.
“이젠 며느리들도 뭐라고 안 해요. 우리는 서로 아들 며느리들까지 다 알고 지내죠. 한 식구들이예요.” 할머니들의 이구동성이었다.
각별한 것은 이들의 정성이다. 광산구 우산동에 사는 김안나 할머니는 이날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무려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바로 오는 버스가 없어 마을버스, 시내버스를 1시간이 넘게 갈아타고 이곳까지 나선 것이다. 모임의 좌장격인 최순덕 할머니는 지금도 모임 때만 되면 일일이 전화기를 붙잡고 먼저 연락을 취하고 있단다.
“지금도 큰 일 있을때면 다들 한 몸같이 나서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다른 일까지는 못해요. 젊은 사람들 있는 자리는 부끄러워서 이젠 점점 눈치가 살펴지더라고.” 이금주씨는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이 영영 미운 눈치였다
“이미 저에겐 누님이고 어머니들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좋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의 말년을 보내시는데 제가 조금이라도 위안과 용기가 된다면 기꺼이 함께 해야죠.” 박 교수의 다짐이었다.
70대 老 교수가 심부름 노릇을 하고, 팔순의 수녀는 ‘사랑가’로 애교를 떨어야 하는 모습. 신앙심의 깊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신앙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최순덕 선생
‘한마음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순덕(97) 선생은 사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전남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 선생은 식민지배에 반대해 떨쳐 일어나는 조선학생들을 탄압하자 전교생을 이끌고 운동장으로 나가 무려 1주일간 시험거부투쟁을 벌인 바 있다.
당황한 경찰 당국이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이들을 막아나섰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당시 학교당국과 교사들은 시험을 안 치러도 좋으니 시험지에 이름만이라도 적어 달라며 통사정으로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명의 학생도 중간고사에 응시한 사람은 없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이른바 ‘백지동맹’ 사건이었다. 당시 학년 대표였던 최 선생은 이 사건으로 무기정학에 이어 최초의 제적생이 되기도 했다.
한편, 총무 격인 이금주(88)씨는 前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으로, 20여년간 한일협정 문서공개 투쟁과과 대일 소송 등을 통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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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7년 10월 <시민의 소리> 기사인데, 다시 생각해도 아름답고 귀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힘은 어쩔수 없어 이제 다시 볼수 없는 장면이 되고 말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