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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도덕률2
레 19:29-37
(레 19:29)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레 19: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5)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레 19: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7)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29-37 / 너희 딸을 더럽히지 말아라. 그가 창녀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못된 풍속이 온 땅에 퍼져 나갈까 두렵다.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너희가 사는 땅이 더러워지리라. 30) 내가 지키라고 일러준 안식일을 지키고 내게 예배하는 성소를 소중하게 여겨라. 나는 여호와이다. 31) 너희는 무당이나 박수를 따라다니지 말고 점쟁이에게 어떤 일이든 묻지 맡아라. 그들과 가까이해서 부정 타지 말아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32) [사회 정의]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 앞에서는 일어서거라.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인 나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여호와이다. 33) 너희 땅에서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짓누르지 말고 못살게 굴지 말아라. 34) 너희 자신을 아끼듯이 아껴 주어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살 때 저들과 같이 나그네 신세가 아니었더냐?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35) 너희는 재판정에서 판결을 할 때 공정하게 하여라. 장사를 할 때에도 곧 물건의 크기를 재고 무게를 달고 곡식을 팔 때에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하여라. 36) 바른 저울과 추를 사용하고 바른 에바와 힌을 사용하여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데리고 나온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3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한 규정과 법을 꼭 지켜라. 나는 여호와이다.'
레위기 19장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과 법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진실과 자비에 근거한 윤리 그리고 행동의 도덕적 원칙 가운데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19-37절 부분은 결론 부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지켜야 할 여러 규례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29절부터 이어서 살펴봅니다.
음행이 전국에 퍼져(29-30) 부모가 딸을 이방신전의 창기로 바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음행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음란, 즉 성도덕의 타락 현상이 강력하게 퍼지는 것을 나타냅니다(신 23:17). 이와 비슷하게 영적 타락인 우상 숭배 현상도 주위에 미치는 현상이 대단히 큰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교훈하였습니다(살전 5:22). 이어서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30)고 나옵니다. 3절에 제시된 안식일 준수는 부모 공경 계명과 관련되어 언급했고 본 절은 하나님 성소 공경과 관련되어 언급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고 교제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입니다. 이 명령은 택함 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의 온갖 우상 숭배로부터 구별되어 오직 하나님 중심주의 및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박수를 믿지 말며(31) 31절 앞부분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접한 자는 죽은 자의 영이나 악귀를 불러내거나 부림으로써, 사후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삼상 28:3; 왕하 23:24).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의 뜻이나 터무니없는 낭설을 퍼뜨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들의 추종을 엄금합니다(레 20:6, 27). 그리고 박수는 '알다, 증언하다'는 뜻의 원어에서 유래한 말로 점이나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해 '장래 일을 알려 주는 자' 곧 점쟁이나 마술사를 가리킵니다.
연장자 타국인 공정한 상거래의 법도를 지켜행하라(32-37) 본문은 연장자에 대한 아름다운 규례(32; 잠 16:31; 20:29), 타국인에 대한 보호 규례(33-34), 상거래나 이로 인한 분쟁해결에 대한 규례입니다(35-36; 신 25:13-16; 암 8:5; 미 6:10). 끝으로 "나는 여호와이니라"(37)라고 하시며 법도와 규례를 명령하십니다.
적용: 오늘 묵상한 바와 같이 요새 유행하는 타로(별점)나 무속 등 영상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럽히는 문화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경계하십니까?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인 현인에게 물었습니다. "제게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제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까?" 현인은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 한 되짜리 그릇을 갖고 한 말의 쌀을 받아 오려고 하는가. 한 조각의 천을 들고 옷 만드는 집에 가서 한 벌의 옷을 지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매사를 찡그린 얼굴로 대하면서 기쁨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정한 이웃,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설 교 >
신접한 자를 믿지 말라
레위기 19:31 / 피영민 목사 / 강남중앙침례교회
서 론
레위기 19장의 전체 내용은 2절에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도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인데, ‘거룩함’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이고, 다음은 동료 인간들을 향한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신상도 만들지 말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 하셨고, 이웃을 향해서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속이거나 압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8절에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둥글게 깎거나 몸에 무늬를 넣는 것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연관된 악습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우상숭배 할 때 했던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들입니다. 또 29절에는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31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접한 자’는 여자고, 흠정역 성경에 ‘Familiar Spirit’을 가진 사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영을 가진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박수’는 남자고, ‘Wizard’(마법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친밀한 영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Ⅰ. 친밀한 영이 무엇인가?
‘친밀한 영’(Familiar Spirit)이라는 단어의 분위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악한 영의 한 형태입니다. 하나님이 친밀한 영을 가진 남자나 여자의 말을 믿지 말고 듣지 말라고 하셨다면 이는 매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친밀한 영’의 특징은 그 영을 가진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소위 ‘영매’(Medium)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에는 ‘신접한 자’를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라고 오해 살 번역을 했는데, 현대인의성경에는 ‘영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영은 영매가 부르면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매에게 지식을 주기도 하고,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친밀한 영과 영매는 계속 의사소통을 하면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영’은 히브리어로 ‘오브’라고 합니다. 친밀한 영은 영매에게 공연한 헛소리를 전달합니다. 한 마디로 친밀한 영은 ‘귀신’(Demon)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천사와 악령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도 영적인 존재이지만, 천사들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며 성도들을 돕는 선한 천사들이 있는가 하면, 마귀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 악한 천사들이 귀신, 악령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와 그를 따르는 귀신들은 후일에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도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다가 쫓겨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 악한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와 계속해서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짓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귀신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들의 활동반경은 매우 넓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합니다. 그 가운데 친밀한 영은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교통하고, 그들을 미혹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더럽히려는 악한 영입니다. 친밀한 영은 구약과 신약에 9번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더러운 영’(Unclean Spirit)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영과 더러운 영은 동의어입니다.
Ⅱ. 친밀한 영과 접하는 일에 대한 성경의 경고
성경은 이런 친밀한 영과 사람이 접하는 일에 대해 수차례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1절에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레위기 20장 6절에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명기 18장 11~12절에도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귀신과 친하게 지내고, 미래 일을 말한다며 속이는 짓을 매우 가증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불순종하여 버림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죽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불순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엔돌이라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접한 자를 찾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말했습니다.
역대상 10장 13~14절에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가나안 일곱 족속이 그 땅에서 쫓겨난 이유도 성적으로 가증하고 부패한 일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신접한 자들과 박수들의 가증한 일을 용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2절에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영은 성령의 짝퉁이자 가품(假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친밀한 영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친밀한 영과 교제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영적인 음성을 듣기 원하고, 지식을 얻기 원하며, 스스로 신령한 척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그러나 친밀한 영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하면서 그의 말은 뭐든지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미끼입니다. 점쟁이들이 미래를 맞출 확률은 50%입니다. 소위 ‘초혼자’, ‘강신술사’들은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온다고 말하지만 모두 거짓입니다. 무당이 굿을 하면 대를 잡고 흔들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귀신이 와서 대답을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돌아와서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영은 저 세상으로 갔다 왔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귀신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밀한 영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절대 이생과 내세를 들락날락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친밀한 영을 구하는 이유는 인간의 불건전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 하고, 초자연적인 세계의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일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인지, 귀신의 영역에 속한 일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건전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찾고 구할 때에 친밀한 영이 그 사람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큐티’(Q.T.-Quiet Time)를 합니다. 그런데 큐티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생기는 것이죠. “나도 어떤 사람처럼 매일 내게 말씀해 주시는 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큐티를 하다가도 친밀한 영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미주알고주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은 이 옷, 내일은 저 옷을 입어라! 오늘은 짜장면, 내일은 짬뽕을 먹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스타일로 사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상 훌륭한 목사님들이 그런 음성을 들으며 목회했다는 글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허황된 말입니다.
한 번은 제게 배웠던 제자 중 한 목사님이 이런 하소연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매주 설교할 본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권사님이 주시는 본문으로 설교를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본문으로 설교를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친밀한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본문을 주시지, 왜 권사님을 통해서 주시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이 취직하고 싶은 직장에 가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 직장에서 나를 고용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런 헛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귀신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장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스펄전 목사님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내가 이 교회에서 설교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을 하기에, 목사님이 “그러면 하나님은 이 교회 담임목사인 내게 왜 말씀하시지는 않았을까요?”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 한 상담가를 찾아 갔는데,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을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상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위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예수’입니다. 그것은 친밀한 영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아주 불건전한 행위입니다. 이미 죽은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죽은 목사의 영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귀신이 와서 그 예배에 관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의 설교를 들을 수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설교를 들어볼 수 있지만 돌아가신 분의 설교를 1년 내내 틀어놓고 예배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건전한 것입니다. 친밀한 영을 불러들이는 괴상한 짓입니다.
Ⅲ. 사람에게 친밀한 영이 들어오는 경로
친밀한 영을 불러들이는 경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많은 전문 사역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미혹된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스러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다가 본인이 귀신들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미국 알라바마주의 ‘Love of God Ministry’라는 공동체를 이끄는 케네스 스캇 목사 부부가 있는데, 이 부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무려 11권의 책을 썼고, 미국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분의 글을 읽어보니 신뢰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친밀한 영이 들어오는 경로는 열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점치는 행위’(Divination)입니다. 귀신을 의지해서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도구를 이용해서 뭔가를 알아내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맥을 찾기 위해서 ‘다우징’(Dowsing)이라는 것을 가지고 다니며 땅 밑에 있는 물이나 땅굴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 속에 수맥이 있는데도 그 위에 집을 지으면 몸에 병이 나거나 헛소리를 하고, 귀신 소리를 낸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땅굴이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계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옳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다우징은 점치는 행위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위자보드’라고, 귀신을 불러오는 게임을 한다고 합니다.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에 빠진 학생들의 특징은 귀신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귀신 불러내는 게임을 하니 실제로 귀신이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녀들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지 못하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연예인은 이런 게임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수정 구슬을 놓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겠습니까?”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점치는 것이죠. 또 월드컵 축구 경기를 앞두고 문어를 가져다가 그 앞에서 승패를 묻는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주술행위입니다.
둘째는 ‘초월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할 때, 능동적인 자세로 공부해야지, 수동적인 자세로 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는 우주의 기(氣)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황홀경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자세로 연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관상기도, 명상기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황홀경에 들어가 수동적인 상태로 귀신과 접하고, 그로부터 비밀한 정보를 얻어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성령이 아니고 귀신을 불러오는 짓입니다.
셋째는 ‘상상의 친구’(Imaginary Playmate)를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은 맞벌이 부부에게 자식이 하나인 경우가 많아서 아이가 혼자서 노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서 대화하며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상의 친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놀자고 하면 귀신이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시각화’(Visualization) 또는 ‘심상화’입니다. 내적치유, 영성증진을 위해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지금 병이 든 원인은 어렸을 때 당한 성폭행 때문인데, 마음속으로 그 시절로 돌아가 성폭행범의 멱살을 잡고 한 대 때리면 원통함이 풀어지고 쓴 뿌리가 없어져서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상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하나님과 접촉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상상하는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도 마음속으로 불러와서 내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을 상상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예수, 귀신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약물중독’(Drugs)입니다. 약물을 먹으면 환각상태에 빠져 영계를 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삶 속에 온갖 귀신역사가 뒤따르게 됩니다.
여섯째는 ‘락 음악’(Rock Music)입니다. 락을 통해 귀신에게 헌신되고, 귀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귀신을 초청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일곱째는 ‘컴퓨터 게임과 영적인 놀이기구’(Game and Toys)입니다. 요즘은 온갖 귀신 놀음이 많이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중독된 학생들을 보면 불건전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영상에 물들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귀신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귀신과 친밀해 져서 학생들의 삶 가운데 친밀한 영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반항적인 성향을 갖게 되고, 불순종하고, 대들게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때리는 사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아이는 E.T.와 같은 외계인 형상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접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덟째는 ‘귀신과의 대화’(Conversing with demon during deliverance)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의 명단과 계급을 알아놨다가 리스트로 만들어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의 가르침’(The Doctrine of Demon)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모든 정보는 귀신들로부터 나온 ‘귀신의 교리’입니다.
아홉째는 ‘죽은 자의 영과 교제하여 점치는 행위’(Necromancy)입니다. 죽은 자의 영을 불러내는 사람을 ‘Necromancer’(주술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당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등장하는데,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버지 집에서 도망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라반이 그것을 도로 찾기 위해서 야곱을 쫓아오지 않았습니까? 라헬이 숨겨두었던 것이 바로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은 죽은 조상의 우상이었습니다. 죽은 조상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들었습니다. 우상에게 물으면 죽은 조상이 나타나 대답을 해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귀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흉내를 내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입니다.
유교를 따르는 집을 가보면 사당에 영정사진을 가져다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집안 식구들에게 귀신의 영을 모시게 하는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돌아가신 어른들을 추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숭배가 되면 그 집안에 친밀한 영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는 ‘과도한 성욕’입니다. 과도한 성욕을 다스리지 못해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원하는 여자에게는 ‘Succubus’(몽마)라는 귀신이, 남자에게는 ‘Incubus’(마녀)라는 귀신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귀신이 성행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위에 눌리거나 에너지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모든 방법들은 친밀한 영이 들어오는 문이요 입구가 됩니다. 귀신들이 사람의 삶 속에 들어오게 되면 무슨 짓을 할까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영이 하는 일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더럽히고,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영은 우리들의 원수입니다.
친밀한 영들은 각자 전공이 있습니다.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영도 있고,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영도 있으며, 반항하게 하고, 살인하는 영도 있습니다. 이런 무서운 범죄들은 모두 친밀한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거나 무기력하게 만드는 영도 있습니다. 또 교만이나 색욕과 같은 전공을 갖고 있는 친밀한 영도 있습니다. 이런 영들이 우리 자녀들을 괴롭히고, 성도들끼리 이간질하게 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절대로 이런 친밀한 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속닥거리고 지절거리는 거짓말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영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런 영들과 더 이상 교제하지 말고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가족들을 괴롭히고, 교회도 괴롭게 합니다. 소위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악한 영들을 많이 불러들여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 19장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깨끗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것들을 대적하고 늘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샌 머리 앞에 일어서라
레 19:32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테네의 극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극장 안에 들어 왔습니다. 좌석은 만원이었고 누구 하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스파르타에서 사신으로 왔던 사람이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옛 스파르타에서는 노인을 극진히 공경했다고 합니다. 그 스파르타에서 온 사신이 자리를 양보하자 박수 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그때 사신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가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는군요."
우리 나라에도 버스나 지하철에 경로석을 지정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 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항상 비워두어야 합니다. 노인들이 올라오면 비워드리겠다고 생각하고 앉겠지만 일단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올라와도 모른 척 합니다. 또는 자는 척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노인들도 미안해서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제도가 없어도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고 노인들을 섬겨야 할텐데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노인을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인을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가 희어지면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가 희어지면 본인도 맥이 빠지고 보는 사람들도 힘이 다 빠진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더군다나 노인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예뻤던 사람, 멋있던 사람도 늙으면 얼굴이 추해지고 맙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센머리, 늙은 얼굴이 볼품이 없습니다. 싱싱한 맛도 없습니다. 시들은 사과처럼, 다 된 낙엽처럼 처량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보십니다.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하십니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사회의 노인문제
유대인의 조크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젊어 보이는데요."라는 말을 들으면 늙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나이를 더 먹으면 바지의 지퍼를 올리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더 나이를 먹으면 지퍼 내리는 것을 잊어버린다. 나이가 들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노인문제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단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힘이 없어진다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노인천대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인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몽테뉴에 의하면 16세기 때만 해도 40세 이상 사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는 노인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이얄에 의하면 노인은 살아 남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인들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노인들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노인인구는 급증한 반면 노인을 부양할 젊은이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던 시절에는 누군가가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녀의 수가 적어지면서 노인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자녀들 교육시켜야지, 여가를 즐겨야지, 부모를 돌아볼 새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노인이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존경심을 고사하고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또 옛날에는 노인들이 할 일이 있었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나이든 장로들이 동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때는 문명이 발달이 빠르지 않았습니다. 농경문화 안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없습니다. 자연히 오래 사신 분들의 경륜이 돋보였습니다. 후예들의 선생이 되기에 족했습니다. 지혜와 경륜에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오늘날 과학시대에는 문명의 발전이 비행기 속도입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요즈음은 몇 달이면 강산이 변합니다. 학문 연구가 4,5년만 지나면 구식이 되고 맙니다. 기계를 사서 3개월이 지나면 구식이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선생은 고사하고 학생 노릇도 할 수 없습니다. 자연 노인들이 소외되고 따돌림을 받습니다.
최희정씨의 마른 가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마른 가지에는 봄이 외도 물이 오르지 않는다. 더 큰바람이 불어오도록 거기 그렇게 일상의 자리에 있는다. 마른 가지엔 여름이 와도 잎이 피지 않는다. 저 혼자만의 모습으로 까맣게 사그라지는 어느 하루를 택한다. 마른 가지엔 가을이 와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만상이 떨어지는 깊은 겨울잠을 택하여 한줌의 흙으로 간다."
노인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데 앞장서십시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라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백발은 면류관
선조 때 이조판서였던 이호민은 백발이 나기만 하면 뽑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한음 이덕형이 물었습니다. "공이 지위가 극에 달했거늘 무엇을 더 바라고 흰머리를 뽑으시오?" 그랬더니 이호민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허허, 그런 게 아닙니다. 옛날 한나라 법이 관대했지만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았습니까? 백발 이 놈이 사람을 너무나 많이 죽이기 때문에 부득이 이 놈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백발을 뽑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발이 살인자로 생각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백발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31절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백발이 다 면류관은 아닐 것입니다. 오직 의로운 삶으로 백발이 되었을 때 영화의 면류관으로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브룩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 하나는 정직함으로 행하는 청년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의로운 길을 가는 노인의 모습이다."
노인 여러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입니다. 장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면류관을 쓰신 것입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70년, 80년 머리에 살구꽃이 하얗게 필 때까지 사시는 것 그것도 영광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믿음 안에서, 진리 안에서, 백발이 되신 분들은 더욱 영광스럽습니다. 세상 사람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백발을 귀하게 보십니다.
노인들도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비참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려서는 철이 없고, 청년기에는 시간이 없고, 장년기에는 정신이 없고, 그리고 노년기에는 형편이 없다." 그럴 듯 하지만 이런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비참한 생각을 주는 말은 사탄이 주는 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주안에서 힘을 얻고 허무를 극복해야 합니다. 쓸모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얼마든지 귀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75세에 부름 받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십시오. 80세에 부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모세를 생각하십시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험한 산지 헤브론을 달라고 했던 갈렙을 생각하십시오. 성전에서 기도하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다가 아기 예수를 영접했던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는 노인들도 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을 받으면 새 힘을 얻습니다. 성령을 모시면 Vision을 갖게 됩니다. 요엘 서에 예언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의 神을 부어 주리니 노인들도 꿈을 꿀 것이라 하였습니다. 잠이 없어 꾸는 꿈이 아닙니다.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노인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사는 노인의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입니다. 석교 가족 모든 노인들은 그렇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노인공경의 아름다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성도 여러분! 노인을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백발의 노인들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6장 3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공경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불쌍하며 동정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했다고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여기 노인 공경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힘이 없다고 천대하지 마십시오. 돈 못 번다고 천대하지 마십시오. 한때는 가정을 일으켜 세운 분들입니다. 교회에서도 한때는 역사하던 분들입니다. 지금 힘없다고, 일 못한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여러분들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의 노인 어르신들을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노인들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세종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민대생이 90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설날이 되어 손자들과 조카들에게 세배를 받았습니다. 한 손자가 오래 사시라고 축수하기를 "할아버지 백세 향수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민대생이 손주를 나무랐습니다. "이 고얀 놈, 나보고 10년만 더 살란 말이냐?" 이때 나이든 조카가 옆에 있다가 얼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100세를 사시고 또 백세를 사시라는 뜻인데 말을 잘못 했습니다. 이미 100세를 가까이 사셨으니 앞으로 새로 100세를 사시라는 것입니다. 그저 백수에 또 백수를 하십시오."그랬더니 노를 풀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노인들은 섭섭함을 타기 쉽습니다. 자격지심에 자존심을 잘 다칩니다. 늘 공경하십시오. 조건 없이 공경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노인공경의 보상
전라도 지방에 배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 훗날 내가 먹을 고기를 노인들에게 먹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몇 사람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살코기는 추렴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집니다. 그러나 내장은 동네의 노인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것이 불문율이었습니다. 내장은 마을의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분배해 드렸는데 이를 배장이라고 합니다. 이 배장 고기를 노인 어르신들에게 갖다 드릴 때의 인사말은 "훗날 먹으려고 가져왔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 대신에 "옛날 맡겨 놓았던 고기를 찾아 먹으마."라고 하였답니다.
노인 공경은 곧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노인을 멸시 천대하는 문화를 바로 잡지 못하면 곧 우리들이 멸시 천대를 받습니다. 우리가 노인을 공경할 때 후세들도 노인을 공경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앞장서야 합니다. 노인 공경 문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노인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 중심으로 하시던 것도 어르신 중심으로 세우십시오. 어린아이들에게도 어르신 모시는 것을 가르치십시오. 장유유서도 가르치십시오. 작은 것부터 실천하십시다. 그래야 이 다음에 공경을 받습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어른들을 공경합시다. 이런 교회 문화를 이룩합시다. 그래야 후세들도 따라 하지 않겠습니까? 노인들에게 함부로 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존경받기를 기대하십니까? 모두 알고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지 멸시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아직 젊었다고 여유 있지 않습니다. 세월 잠간에 지나갑니다. 지금 검은머리도 잠시 후면 백발이 됩니다. 멀지 않습니다. 노인을 공경하십시오. 그래야 공경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씨를 심으십시오.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노인을 공경하십시오. 그러면 후에 공경을 받을 것입니다. 석교 가족 여러분! 노인을 공경하는 기독교문화를 이룩하는데 앞장서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레 19:32, 디모데전서 5:1-4 / 안효관 목사
파란 하늘을 날던 비행기 한 대가 갑자기 날개에서 짙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조종사, 사업가, 정치가, 노인, 보이스카웃 소년 이렇게 모두 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불까지 붙은 채 계속 아래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조종사가 승객들에게 말합니다. “승객 여러분, 이 비행기는 엔진 고장으로 지금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준비된 낙하산은 네 개 밖에 없습니다. 저는 처와 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러면서 낙하산 한 개를 짊어지고는 뛰어내려버렸습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남아 있던 4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사업가가 ‘자신은 인류를 위해서 할 일이 많다’고 하면서 낙하산 하나를 짊어지고 탈출했습니다. 곧 이어서 정치가도 ‘자신은 조국을 위해서 몸 바쳐 일해야 할 사람이기에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서는 낙하산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 비행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이제 비행기 안에는 노인과 보이스카웃 소년 둘이 남았는데, 낙하산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소년에게 “얘 꼬마야! 나는 이제 살만큼 다 살았으니,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 네가 마지막 남은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거라.”라고 양보를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던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직 낙하산 두 개가 남았어요. 아까 정치가 아저씨가 제 보이스카웃 배낭을 메고 뛰어내리셨거든요.”
물론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노인들의 어깨가 좁아지는 것처럼 갈수록 노인들의 위치가 좁아져가는 시대가 오늘 우리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이 시대의 모든 어버이들을 존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게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오늘 구약에서 읽은 말씀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되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 아버지 어머니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부모님들을 내 부모님처럼 섬기고 공경해야 합니다. 그게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왜 모든 어른들이 공경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 연로하신 분들은 오늘 우리 시대를 있게 만든 주역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오늘 우리를 있게 해 주신 분들입니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모님에 대해서 좋지 않는 기억이나 감정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불행한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한 사이에도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버이의 은덕을 10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어머니 배에서 10달을 품고 지켜주는 은혜요, 둘째는 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어머니 은혜요,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 근심을 잊는 은혜요, 넷째는 쓴 것은 당신이 삼키고 단 것은 뱉아 먹이신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요, 여섯째는 젖을 먹여 기르시는 은혜요, 일곱째는 손발이 다 닳도록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은혜요, 여덟째는 먼 길 떠났을 때 걱정하는 은혜요, 아홉째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고생을 참으시는 은혜요, 열째는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입니다.
이 열 가지 은덕 가운데 우리가 느끼지 못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모님들은 이런 사랑으로 자식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년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 마디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안구를 기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여러분,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느 어머니인들 이런 사랑이 없겠습니까? 그게 자식을 향한 본능적인 사랑인걸요. 두 눈을 다 주고 싶은 게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지만 한 쪽 눈만을 주는 것은 장님이 되어버린 몸뚱이가 자식에게 짐이 될 것 같은 어머니의 넓고 큰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두 눈을 다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만 그렇습니까? 이 땅에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모든 어르신들이 후손들에게 좀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생활을 할 때에는 후손들에게 독립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을 펼쳤습니다. 6.25전쟁 때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전장에서 죽어가야 했습니까?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고 노래 부르며, 동이 트기 전부터 얼굴에 땀을 흘리며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그런 우리 조상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 상황이 조금 어렵다고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는 시대이긴 하지만, 이만큼이나마 살 수 있게 된 것이 다 누구의 덕이겠습니까? 지금은 얼굴에 초라한 주름살만이 남아 있고 머리는 백발이 되어버린 그분들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젊음의 때를 그렇게 허리가 휘도록 자식들과 후손들을 위해서 고생하셨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르신들은 우리의 존경과 섬김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두 번째로 노인은 지혜의 보고이기 때문에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고려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고려장이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고구려 시대에 늙고 병든 사람은 땅 속 광에다 두었다가 죽으면 그곳에 묻는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 고려장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세 가지 문제를 내면서 그 문제를 풀지 못하면 많은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세 가지 문제라는 것은
1> 호두알만한 구슬 속에 구불구불하게 구멍을 뚫어놓고는 가는 명주실로 그 구멍에 꿰어서 반대편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뚫려 있는 구멍이 아니라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되어 있는 구멍에 가는 명주실을 꿰어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2> 생김새와 크기가 똑같은 말 두 마리를 보여주면서 한 마리는 어미이고 한 마리는 새끼인데, 말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어느 것이 어미이고 어느 것이 새끼인지 구별해내라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이빨을 보면 어미와 새끼를 금방 구별해 낼 텐데, 손을 대지 말라고 하니 구별해 낼 방법이 없어보였습니다.
3> 위 아래를 똑같이 다듬은 나무 하나를 보여주면서 위 아래를 구별하여 뿌리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궁중에서 학식 높은 학자들이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궁중에 꽤나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한 신하가 있었는데, 그는 효성이 지극한지라 늙으신 어머니를 고려장시킬 수가 없어서 남몰래 산 속에 움막을 지어 놓고 매일 음식을 만들어 드리면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움막에 있던 늙으신 어머니가 음식을 갖고 찾아온 아들의 얼굴을 보니 평소와는 달리 수심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캐묻자 아들은 사실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어머니는 별 문제도 아니라면서 아들에게 해답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조정에 들어간 그 신하는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문제를 풀어냈습니다.
먼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가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 구슬을 갖다 놓고는 개미 허리에다 가는 명주실을 매고서 구멍 한쪽에다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허리에 명주실을 맨 개미는 반대 구멍 쪽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문제를 풀어냈습니다.
두 번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신하는 말이 좋아하는 풀을 한 아름 가져다가 두 마리의 말 앞에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풀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입맛만 다시고 기다리고 있다가 한 마리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야 풀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나중에 먹는 놈이 어미였던 것입니다. 어미는 본능적으로 새끼부터 먼저 먹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나무를 물 위에 띄워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서 더 무거워서 비스듬하게 기울어 가라앉은 것입니다. 먼저 가라앉은 쪽이 뿌리였습니다. 뿌리는 가지보다 무겁기 때문에 먼저 가라앉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를 모두 풀게 되었고, 중국 사신은 그 신하의 지혜에 감탄을 하고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임금님은 그 신하를 칭찬하면서 ‘어떻게 이런 것을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신하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고려장하여 산 속에 버려야 하지만, 아들된 도리로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움막을 짓고 지금까지 어머님께 음식을 갖다 주면서 보살펴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노인의 지혜가 나라를 구했음을 알고서 고려장의 풍속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고려장을 없앤 이야기는 노인의 지혜가 나라를 구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노인의 지혜를 무시하다가 나라가 큰 어려움에 빠진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솔로몬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르호보암이 북쪽지역인 세겜을 방문합니다. 왕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북쪽 지역 사람들은 죽은 솔로몬 왕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피신 가 있던 여로보암을 불러 르호보암 왕과 협상을 하게 됩니다. “당신의 아버지 솔로몬이 나라에 큰 일들을 많이 벌려놓고 우리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던 것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또 세금은 얼마나 많이 거둬갔습니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버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새로이 왕이 된 당신은 우리의 이 힘든 것들을 하감하셔서 고역을 줄여주시고 세금도 감면해 주시면 우리가 왕인 당신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3일 동안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서, 먼저 아버지 솔로몬 때에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연로한 신하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연로한 신하들은 한결같이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금까지 너무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풀어주면 그들이 왕을 위해서 충성할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왕이 이번에는 젊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묻습니다. 젊은 신하들은 ‘이 백성들이 한가해서 이런 불평을 하는 것이니 더 강압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세금도 더 많이 물리고, 강제 노역도 더 많이 시켜서 정신 못 차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신하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북쪽 지역 사람들이 일제히 르호보암 왕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북쪽 지역으로 초도순시를 나갔던 르호보암 왕은 도망치듯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고, 북쪽 지역 10개 지파는 르호보암을 떠나 여로보암을 자기들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과 솔로몬, 르호보암으로 이어지는 왕조는 결국 두 지파만 남게 되었고, 반역을 일으킨 10개 지파는 여로보암을 따라서 북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르호보암 왕이 연로한 신하들의 지혜를 받아들였다면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젊은이들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흐름이기에 그것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할 일은 아닙니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시대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386세대로 지칭되는 젊은이들이 나이드신 분들의 충고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에게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전 먹고살기 힘들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른들에 비하면 배우기도 많이 배웠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대 속에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그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젊은이들의 지식이 교과서라면 노인들의 지혜는 교과서를 이해하도록 돕는 참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면 그 지식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분들은 지식은 많지 않아도 살아온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지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지식과 노인들의 지혜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더 빨리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개미’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노인은 삶의 지혜로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노인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단지 잔소리라고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인생을 살아온 삶의 지혜가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지식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며, 연구되고 있는 것들을 우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내 머리에 넣을 수 있는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식이 없어 망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머리 속에 저장된 그 수많은 정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나라는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중국이 세계적으로 무서운 나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그렇게 무서운 나라도 부상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제 학술대회나 국제대회가 열리면 중국에서는 반드시 연로한 학자와 젊은 신세대 학자가 항상 같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젊은이의 감각과 연로하신 분들의 지혜를 함께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지식만을 중시하지 않고,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지식을 부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노인의 지혜가 함께 어우러져 내일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무서운 힘을 가진 나라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그 지혜를 가진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언젠가 다 노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인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언제나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면 누구나가 노인이 되어갑니다. 지금 젊다고 말하는 분들도 불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보험을 들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의 본문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보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젊은이들에게 효를 행해야 할 대상이 있으면 효를 다하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섬겨야 할 부모님이나 조부모를 다른 사람에게 짐 지워서는 안 됩니다.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내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내 자녀들이 효를 배우도록 하라는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효의 종교입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님이나 조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효를 다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리 값비싼 것으로 제사상을 차려놓는다 하더라도 그게 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상을 차릴 돈이면 살아계실 때에 고기 한 근 더 사 드리고, 부모님을 한 번 더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배워서 본받도록 본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지금 젊다고 생각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늙습니다. 우리가 늙을 때에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고 섬김과 존경을 받는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어르신들을 섬기고 존경하는 모습을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은 내 부모님을 다른 사람에게 짐 지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 섬기며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멀리 계셔서 섬기기 힘든 분들은 교회의 어른들과 주변에 우리 부모님과 같은 분들을 내 부모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내 부모님과 이웃의 어른들을 섬기는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우리가 늙었을 때 우리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용한 ‘며느리전서 13장’을 소개해 드립니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애교 있는 말로 안부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세상지식과 지혜로 교회의 집사가 됐을지라도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재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려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참고, 시어머니가 좀 심한 말을 할지라도 온유하며,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려도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 앞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참으며, 가사가 힘겨울지라도 끝까지 견딥니다.”
이런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우리의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르신들을 섬김으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노년
레 19:32 / 조재호 목사
오늘이 2006년 둘째 주일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우리 믿음의 그릇을 크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영적인 욕심을 가지고,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을 다시 점검할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아니냐’(시 81:10)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중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산티아고가 바다와 겨루며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인간의 인내와 용기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산티아고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인간은 비록 죽음을 당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 지난 주일에는 바다 이야기를 하며 먼 곳을 바라보고 항해해야 하는 우리의 인생을 함께 나누었고, 오늘은 노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가 지난 5년 전부터 정해 놓은 경로의 해이며, 올해 표어가‘어르신 공경으로 행복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가 어르신 공경으로 행복한 교회가 되어지고, 우리의 가정이 어르신 공경으로 복을 받는 가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말씀은,‘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센 머리는 희어진 머리카락, 백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노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센 머리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흰 머리카락은 단지 검은 머리가 탈색된 보기 싫고 지저분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희어진 머리는 곧, 신앙적인 권위를 의미합니다. 잠언 16장 31절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희어진 머리카락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섬겼던 순수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온전한 섬김과 희생을 나타냅니다. 평생 동안 의로운 길, 믿음의 길을 걸어오면서 얻게 되어진 흰 머리카락은 인생의 영광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흰 머리 앞에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경주를 마쳐가는 신앙의 어른들을 보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고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교회학교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교육이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어른 공경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른을 보면 인사 잘하는 인간미 있는 아이들로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오늘 말씀은 또한‘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굴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세상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날아가 버린 화살, 입에서 나간 말, 놓쳐버린 기회, 그리고 지나가 버린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시간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지나가 버리지만 그 내력은 얼굴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 40세가 넘어가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 마음을 찡그리고 사는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얼굴에 늘 인상을 쓰고 사는데, 그 마음이 해 같이 빛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에 늘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데 그 얼굴에 평화가 깃든 사람이 없습니다.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데 그 마음에 평화의 강이 흐르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밝고 삶이 깨끗한 사람은 얼굴에 밝고 깨끗함이 나타납니다. 마음에 하늘의 은혜와 주님의 평강이 가득한 사람은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고요하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의 천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요한이 목격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머리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4, 16)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얼굴빛을 받고 사는 사람의 얼굴, 그 마음과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하나님의 얼굴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추어지기에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평생 바라보고 산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일평생 의지하며 그 빛 가운데 산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아름답게 빚어져 있습니다. 얼굴은 곧 그 사람의 인생 경륜이요 그 신앙의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것은 그 분을 공경하라는 것, 즉 그 분을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얼굴 주름살은 우리의 인생 계급장이요 훈장입니다. 주름살 골자기마다 지혜와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한 어르신들을 우리는 말로 공경하고, 행함으로 공경하고 마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 한 해 동안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의 터 위에서 “어르신 공경으로 행복한 교회”를 힘써 실천함으로 ‘대한민국 서울 고척동에 가면 특별한 교회가 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 교회, 동시에 하나님께 칭찬 듣는 소문난 교회로 만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노인공경
레 19:32 / 최성규 목사
대한민국은 참 좋은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경적인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어버이날이 있고, 효의 달이 있고, 효행장려법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노인의 날이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노인의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또한 1982년에는 세계최초로 노인헌장이 제정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노인헌장보다 더 위대한 선언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기초한 효비전 선언문입니다. 효비전 선언문은 “우리 고유의 전통 신앙은 물론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제반 종교문화가 부모공경을 한 가지로 외치고 있다. 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남의 부모를 공경함은 물론 모든 어른을 공경하며, 나아가 삶의 가르침을 주시는 모든 스승을 존경하여 진정한 사도권을 확립한다면 화목한 가정, 즐거운 사회, 기쁨 넘치는 교육현장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효비전 선언문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3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기 전에 먼저 노인의 얼굴을 공경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기초한 대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효행법 시행 원년과 노인의 날을 맞아, 우리가 공경해야 할 웃어른이 누가 있는지 알아봄으로, 모두 함께 사는 하모니 사회를 만듭시다.
첫째, 노인공경
노인은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경 받아야 합니다. 경로석을 만드는 것, 필요한 용돈을 몇 푼 드리는 것, 좋은 시설을 만들어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서 노인을 환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노인공경입니다. 우리 사회는 노인 분들을 환대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우리 세대는 노인 분들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항상 부르짖는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3대가 함께 살자!”입니다.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 손자 세대가 함께 더불어 하모니를 이루고 살자”입니다. 그리할 때, 건강한 사회가 되고,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 고려장’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노인 학대, 노인 가출, 노인 유기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립니다. 심지어는 자살 노인까지 증가하고 있습니다.
늙었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노인을 무시하지 맙시다. 성경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고 증거합니다. 사무엘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엘리 제사장을 존중했습니다(삼상 3:4,5). 어려서부터 노인을 공경하는 사무엘을 하나님은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노인분들을 사랑하고 환대합시다. 우리가 어른을 공경하면, 어른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는 자가 됩니다.
둘째, 부모공경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내리사랑’은 하기 쉽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사랑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든 동물이든 끔찍하게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올리효도’는 다릅니다. 까마귀와 같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만이 부모를 공경합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곧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람다운 사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작년 말, 숭실대 정재기 교수가 ‘부모와 자녀의 만남 횟수’에 대해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세계 27개국 중 한국의 자녀만 ‘부모가 돈이 많을 때’, ‘부모가 잘 살 때’ 자주 찾아간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모의 소득이 늘수록 자녀와 만날 확률도 높다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셔서 생명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공경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고 가르칩니다. 마음과 정성을 쏟으면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고, 자주 찾아 뵙고,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 할지어다』(잠 23:26)라고 말씀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부모가 기뻐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부모공경입니다.
셋째, 스승공경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전 1:9). 모든 것은 옛것을 통해서 옵니다. 나 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귀한 것을 전해주고 가르쳐주신 스승을 공경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스승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선생 된 자가 먼저 스승이 되기를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삶을 전수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스승이 될 때,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부심을 갖고 삶을 전수해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스승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스승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제자들이 스승을 인정하고 공경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도 자녀의 선생님을 스승으로 공경하고 머리 숙여야 합니다. 우리는 학교 선생님뿐만 아니라, 교회학교 선생님들도 공경해야 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자녀의 영혼을 책임지는 스승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스승을 공경할 때, 자녀는 그 부모를 보고 인생을 배웁니다. 부모가 자녀의 스승을 공경할 때, 자녀의 앞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넷째, 임금공경
하나님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만 나라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셨습니다(단 2:21). 모든 통치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단 5:18).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임금을 공경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성경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잠 24:21)라고 명령합니다.
임금공경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벧전 2:13) 또한 우리를 위하는 것입니다(롬 13:4). 질서가 바로 서야,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2)고 가르칩니다. 지도자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 왕을 섬겼던 다윗처럼, 끝까지 임금을 공경합시다. 다윗이 사울보다 더 큰 왕이 되었던 것처럼 지도자를 공경할 때,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선배공경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배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배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한다면 많은 시행착오가 생깁니다. 끊임없이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앞서 길을 낸 선배가 있으면 우리는 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수해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선배가 있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선배를 공경합시다. 선배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입니다. 내가 부족할 때, 힘이 되어주는 모델입니다. 내가 부족할 때 지혜가 되고, 경륜이 되어주는 모델입니다. 우리가 선배를 공경할 때, 그것이 내 것이 됩니다.
노인공경을 생활화합시다. 공경할 대상이 있음이 행복입니다.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것은 가장 큰 배움입니다. 노인, 부모, 스승, 임금, 선배를 공경할 때, 우리 인격이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배웁니다.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공경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인생의 겨울 준비
레 19:32 / 이정익 목사
이제 10월에 들어섰습니다. 10월은 가을 중 가을이고 본격적인 추수계절입니다. 10월이 되니까 거리의 가로수들의 잎이 노랗게 변색이 되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수를 해야 하고 겨울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가을은 추수기입니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가을은 노년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겨울은 은둔기입니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마지막 종말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주기와 인생의 주기가 아주 비슷합니다.
오늘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오늘이 9번째 맞는 노인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젊은이들만을 상대로 해서 설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교회 노인 성도님들은 설교를 들으시고 우리 노인들은 사람도 아닌가 하고 생각을 안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10월 가을 추수기도 되었고 이제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겨울 준비도 해야 할 계절이기 때문에 노년인생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노년기를 가을이라고 말하고 겨울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추수를 거둬들여야 하고 겨울이 되면 월동준비를 해야 하듯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노년기가 되면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겨울 준비나 같은 것입니다. 오늘 노년기에 있는 분들은 이제 가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고 해서 부담스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차가 영등포 쯤 도착하게 되면 내릴 준비를 해야 하듯이 인생에게는 늘 이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로서 창창한 미래를 준비하고 중년은 중년으로서 그동안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더 공고히 해야 하고 노년은 가장 중요한 갈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노인들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만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 성경을 보면 그 수천 년 전에 쓰인 말씀인데도 노인들을 경대하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년인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 노인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복을 받은 집에 장수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시대는 노인들이 존대를 받지 못하고 외면 받고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노인을 존대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원인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년인생에게 주어지는 네 가지 고통
하나는 “경제의 빈곤”입니다. 이 경제의 빈곤이 오늘 노인들의 정신건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은퇴 후에 급격하게 늙고 그러다 불안 증세까지 나타나는 것은 경제문제 때문입니다. 경제가 불안하니까 자신감을 상실합니다. 경제력이 있으면 노년이 되어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 땅의 노인들은 이 경제력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의 악화입니다. 이 노쇠현상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노년 때는 마치 장마 때처럼 비가 오다가 햇빛이 나고 또 햇빛이 비추다가 곧 비가 오는 것과 같습니다. 잔병이 자꾸 찾아오는 때입니다. 이곳을 고치면 저곳이 고장 나는 중고차와도 같은 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역할의 감소입니다. 아직 힘은 있는데 할 일이 없습니다. 돈을 벌려는 것 보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네 번째는 소외감입니다. 노인이 되면 사회에서 집안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노인인구는 자꾸만 증가하고 늘어나는데 이 소외감을 풀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큰일입니다. 영어에 companionship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반이라는 뜻입니다. 미국 노인문제 협의회 회장인 다니엘 덜즈라는 분이 “현대의 노인의 슬픔은 돈 문제 건강문제가 아니고 좋은 동반자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동반자가 없다는 말은 “슬픔과 근심과 고독과 불안을 함께 나누는 우정의 부재“를 말합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들에게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노인의 4가지 특성
하나는 “말이 많아지는”현상입니다. 노인이 되면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반복합니다. 하루 종일 한번 붙잡히면 놓아주지를 않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모두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학습능력 저하로 한 말을 자꾸 잊기 때문에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노년에 이르면 뇌가 2/3로 줄어들기 때문에 머릿속이 텅 비어 망각증세가 심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은 몸의 힘이 입으로 쏠려서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힘이 발바닥으로 몰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양말도 신지 않고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 청년 때가 되면 몸의 힘이 모두 허리로 몰립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짝을 찾아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때 결혼시켜야 실한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러다가 중년 때가 되면 힘이 배와 가슴으로 몰립니다. 그래서 중년 때 배가 나오고 욕심이 극에 달하고 뱃심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면 모든 힘이 입으로 몰립니다. 노년이 되면 말이 많아지는 현상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노년이 깊어지면 힘이 눈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말이 많던 노부모님들이 슬슬 며느리 눈치보고 아들 눈치보고 손자들 눈치 보면 이제는 끝나갈 때입니다. 노부모님이 말씀이 많다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독선과 고집”입니다. 노인이 되면 보수화 됩니다. 확신이나 창의성 그리고 모험이 급격히 격하됩니다. 그래서 변화나 모험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새 시대조류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두드리고 뛰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사고를 가지고 현대물을 마시고 자란 신세대 며느리를 대하니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며느리들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고집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못 말립니다. 노인들은 죽어도 양보를 안 합니다. 교회에 오시면 앞자리를 세 내어 앉아 있습니다. 누가 먼저 와 앉아 있으면 일어나라고 비키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씁니다. 그리고 동네에 돌아다니며 며느리 흉을 보고 험담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며느리가 밥을 안준다고, 밥에 약을 탄다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고 빈정대고 며느리는 돌아다니며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됩니다. 이것은 노인의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이해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증상을 자연적인 증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적 증상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리적인 장애문제”입니다. 이때는 포기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이 75세부터 포기하는 마음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좀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합니다. 병을 고치고 나면 또 병이 납니다. 그래도 75세 부터는 당황하지 않고 생리적 장애로 수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민이 적어지고 충격도 적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고민이 많아 갈등하는 세대가 65세에서 75세까지라고 합니다. 그때는 아직 몸은 건강하고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착각하고 사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거기서 갈등이 주어지는데 그 증상은 할머니들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노년에 들어서게 되면 더 충격을 받고 몸살이 심하고 우울증에 더 많이 걸리게 됩니다.
네 번째는 “소외와 충격”입니다. 노인이 되면 소외와 고립이 정신병을 유발시킵니다. 퇴직 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상실하니까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젊은이들이 싫어하고 손자들도 싫어하고 매사 외톨이가 됩니다. 외식 때는 저희들끼리 나갑니다. 야외에도 저희들끼리만 갑니다. 여행을 갈 때도 저희들끼리만 가고 노인들은 집을 보라고 합니다. 그 소외감와 고립감이 결국 죽음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동료가 죽으면 “다음은 내 차례구나”하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어느 날 동창이 죽어 장례에 갔다 오다 그 충격에 정신이상이 발생하여 집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같은 방에 함께 있던 동료가 죽으면 얼마 못가 자기도 죽게 됩니다.
부인이 죽은 후 남편이 곧 따라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부의 정이 많을수록 그런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천생연분이라고 말하는데 천생연분이 아니고 그것이 고립과 소외감에서 오는 충격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살려고 아내가 죽으면 빨리 새장가를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정신적 심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인이 병이 나면 독방에 입원시키지 말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함께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가능하면 소외감을 줄여주고 주변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할 일
노년이 되면 우선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관리”입니다. 노년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노년이 추하게 늙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스스로 건강법을 지키고 정신건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체력을 기르고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누구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데 자식들도 오래 누워있으면 불효자 만들게 됩니다. 노년이 아름답고 고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데 꾸준한 운동을 열심히 하십시오. 매일 앉아 이야기만 하지 말고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나이 먹음도 받아들여야 하고 시대변화도 받아들여야 하고 보기 싫은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험담하지 말고 며느리 흉을 보는 일로 바쁘면 안 됩니다. 노년이 되면 말이 많아지는데 그 많은 말들이 모두 건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집에 가서 저 사람 흉을 보고 저 집에 가서는 이집 흉을 보는 일들이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갈 곳이 없어집니다.
세 번째는 “기도생활”입니다. 노년삶이 추해지지 않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해야 합니다. 노년이 되면 모두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사고가 흐트러집니다. 분별력이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무엇보다도 영적생활이 깊어져야 합니다.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특히 노년에 정신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노년이 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정신이 희미해지고 치매가 오고 혼돈되는 일입니다. 그때 잘못하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노인들에게 찾아 올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망령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노인을 경대하라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노인을 존경하고 경대하라는 것입니다. 노인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레위기19:32를 보면 “너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잠 23:22를 보면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정에 노인이 있는 것만도 복 입니다. 저주받은 가정에는 노인이 없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신 23:7절을 보면 “옛날을 기억하라, 연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노인에게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청나라 사신이 와서 재로 새끼를 꼬아 보내라고 했습니다. 옛날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그런 식으로 괴롭혔습니다. 어떻게 재로 새끼를 꼽니까. 임금님이 고민하다가 재로 새끼를 꼬아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때 시골의 어느 노인이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새끼를 불태우라, 그리고 그 재를 흩트리지 말고 그냥 갖다 드리라” 그런 지혜는 노년 인생에게서만 나오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또한 노인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잠 16:31절을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잠 20:29절을 보면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고 했습니다. 신 4:40절을 보면 “장수는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노인은 공경의 대상입니다. 엡 6:1절을 보면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런 노부모들과 노년인생들이 존대를 받지 못하고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노인들은 가정에서 한 결같이 순번이 5등 인생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1등이 돈벌어오는 남편입니다. 두 번째는 며느리입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는 강아지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노인들입니다.
오늘 노인들은 순번이 강아지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노부모들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모멸당하고 정서적으로 분노가 극에 달하고 인생적으로 허무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4년 한 해 동안 자살해서 죽은 사람의 수는 하루에 32명씩 연간 11,523명이 자살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그중 60대 이상 노인이 자살해서 죽은 숫자는 23%인 501명이나 됩니다. 이 노인들이 자식들에게, 며느리들에게, 손자들에게 학대당하고 구타당해서 견디다 못해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신중한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폐가 될까봐 참고 살아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참고 살아가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면 조용히 집을 나가는데 그렇게 가출한 노인이 2004년도에만 6,14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이 정서적으로 이렇게 삭막해졌고 무섭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복을 받고 살고 싶습니까. 우리들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아가려고 하면 가장 기본적인 삶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너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행할 수 있어야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기본도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이 가치관이 무너지고 그 좋던 전통이 무너지고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질서마저 허물어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건강한 세상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힘써야 하겠습니다.
노인 공경과 하나님 경외
레 19:32 / 김경년 목사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그리고 교회력으로는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처럼 어버이날에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금년은 오늘이 어버이주일이자 어버이날입니다.
이 뜻 깊은 날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32)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어느 택시 기사가 할머니 한 분을 태우고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결국 파출소에 모시고 와서 탄식을 했답니다. 이유는 초라하지 않게 옷을 입은 한 노인이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기에 태웠답니다. 딸네 집엘 간다고 해서 쪽지에 적힌 대로 모셔다 드리려고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딸이란 사람은 너무나 냉담했답니다. "누가 노인을 모셔오라고 했느냐, 난 모르니 당신이 책임을 지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고 아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난처해진 택시 기사는 다시 이 할머니를 모시고 처음에 있던 장소로 왔답니다. 그리고 며느리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딸네 집으로 가신다고 갔으니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들네 집으로 모셔다 드리려고 했는데 할머니는 한사코 집을 모른다고 하시면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어르신들은 스스로를 6등 인생이라고 한답니다.
어느 집이든 아들이 1등 인생이고, 며느리가 2등 인생, 손자들이 3등 인생이고, 가정부가 4등 인생, 강아지가 5등 인생, 그리고 늙은 노인들은 6등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 통해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하십니다.
"센 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하신 것은 한마디로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머리가 허연 어른이 들어오는데도 그냥 앉아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것은 공경하는 태도나 자세가 아닙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른이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는 것이 예의요 법도인 것입니다.
여기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요?
마틴 루터는 그의 대요리 문답에서 우리의 부모(어른)란 네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낳아준 부모, 둘째,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 부모, 셋째,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넷째, 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하는 목사 부모입니다.
이들 네 종류의 부모는 모두가 오늘 본문 성경이 말하는 센머리 즉 우리가 공경하여야 할 어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목회자 앞에서 일어 설 줄 아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조손겸상(祖孫兼床)으로 경로의 덕을 밥상머리에서 가르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들어서는 안 되고, 찬에 손을 대기 전에 대서도 안 되고 맛있는 반찬은 주기 전에 손을 대선 안 되고..하는 것들을 식사자리에서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노인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뼈에 스미도록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밥상에서 뿐 아니라 만사를 자기 위주로 자라 놓으니, 노인 앞에서 겸양해야 하는 기본이 정신적인 자질 속에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냉수 한 모금 마시는 데에도 위아래가 있다고 해서 장유유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우선 순위는 노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수리를 하기 위해 벽을 뜯었답니다. 일본 집벽은 "오가베"라고 해서 흙을 바르긴 하지만 그 안에 얼기설기 나무를 대어 만들기 때문에 벽 안에 공간이 있는데, 그런데 뜯다보니 벽 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대못에 꼬리 윗부분이 찍힌 채 살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그 대못은 10년 전에 그가 집을 지을 때 박았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형편 속에서 10년 동안이나 어떻게 살아 왔나"싶어 넋을 놓고 바라만 보는데, 때마침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 들어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을 먹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벽 속에 갇혀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먹이를 물어 나른 것입니다.
세상에 도마뱀이 1-2년도 아니고 십 년을 갇힌 도마뱀을 위해 희생한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 두 마리의 도마뱀이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연인일까?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친구 사이일까? 십년이란 긴 세월 동안 희생한 관계라면 아마 어미와 새끼 관계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갇힌 도마뱀이 어미였는지 새끼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일지라도 엄연히 어미와 자식간에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이 사랑을 모른다면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까?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충성하는 성도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어른만 공경하라고 하지 않고 이어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르신을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나 어르신들을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르신들을 잘 공경하는 것을 보면 그 성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또한 잘 섬기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분들은 다들 효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이삭은 나이가 대략 17세였습니다. 17세의 혈기 왕성한 아들 이삭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모님께 순종하는 이삭을 죽이시지 아니하시고 숫양을 미리 예비해 두셨다가 이삭대신 번제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이삭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와 어르신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을 공경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교훈(가르침이나 훈계)을 귀담아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분들은 우리보다 많은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따라서 우리는 어른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솔로몬 왕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의 많은 회중들이 왕을 찾아와 정중히 요청하였습니다. 왕의 부친 솔로몬이 지금까지 너무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을 가볍게 해 주고 고생을 좀 덜어주면 왕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르호보암은 혼자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살아생전 모시던 노인들의 생각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대답은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왕상 12:7)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다시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 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 12:10-11)하고 강경하게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의견이 나왔을 때 르호보암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열왕기상 12:13-14을 보면 "왕이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왕상 12:13-14). 르호보암은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행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등을 돌렸고 이스라엘 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르호보암이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른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기운이 발바닥에서부터 허리로 손으로 가슴으로 입으로 점점 올라가다가 마지막에는 눈을 거쳐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니게 되고, 젊을 때는 허리에 있던 힘이 중년이 되면 뜨거운 가슴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세가 드시면 입에 기운이 있어 자꾸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 나중에는 슬슬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보다가 아예 눈을 감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의 말씀을 노인의 잔소리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이야기는 평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며 또한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귀한 주일입니다.
오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부모님 공경과 하나님 경외
레 19:32 / 안효관 목사
경로대학의 5월 첫째주 모임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비록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70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살아 계신 분들의 이야기도 많은 공감을 주었지만, 특히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에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의 올해 연세가 일흔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님이 92세입니다. 지금 고향 시골집엔 7순을 넘기신 부모님과 90이 넘으신 할머님, 이렇게 세분만이 함께 살고 계십니다. 칠순이 넘으신 어머님이 지금도 90 넘으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처가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70이 가까운 장인 장모님이 90이 다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단 세 식구만이 시골에서 재미있게 살고 계십니다.
그런 환경을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약에 저에게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그게 큰 행복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물론 며느리인 저희 집사람은 힘들고 불편할지 몰라도,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에 '나중에 부모님을 모실 기회가 되면 양쪽 부모님을 함께 모시도록 하자'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부모님들은 양쪽 모두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계실 정도로 건강하시니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가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 어른들이나 경로대학 학생들을 보면 저희 어머니나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멀리 계셔서 부모님께 해드리지 못한 효도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께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이나 효도할 수 있는 부모님이 살아 계신 분들은 늘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7) 부모님을 공경하고 잘 모시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 받고 싶은 열망은 많지만, 복 받을 삶을 살겠다는 열망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섬길 수 있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그리고 보살펴야 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잘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슬프게 울어보아도, 또 제삿날이 되어 제사상을 아무리 화려하게 차려도, 살아 계실 때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드리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저도 언젠가 그런 후회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버이날이기 때문에 부모님께 잘 해드리는 것이 바른 효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조차도 아무런 감각 없이 지내버린다면 그것이 더욱 큰 문제일 것입니다. 이런 날이 우리에게 있기에 그 동안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불효했던 것들을 회개하고 지금부터라도 조금 달라진 삶을 살아간다면 그 또한 뜻 있는 일일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미국의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앙이 독실했던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26년간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 선생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추도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살고 있는 선생님 자비스 부인의 딸을 추도식에 초청했습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자비스 부인의 딸인 안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추도식이 있던 날 딸 안나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딸 안나는 어머니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가르치면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에 구체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을 늘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추억하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카네이션 꽃을 추도식 제단에 바쳤습니다.
추도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어머니인 자비스 부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실천하며 살아온 딸 안나의 말과 태도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그 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14년 미국의 의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1930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져 오늘의 '어버이주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이라고 해서 우리 교회 학생회 회원들이 우리들의 가슴에 작지만 예쁜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가슴엔 카네이션이 달려 있는데, 우리의 가슴에 달린 이 카이네션을 달아드릴 우리의 부모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교회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분보다는 자녀들에게 공경 받아야 할 분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효도를 받고 공경을 받아야 할 부모님이 훌쩍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우리가 효도할 날을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어버이주일을 맞아도 공경을 받는 자리에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효도하고 공경해야 할 부모님이 살아 계신 분이나, 가슴에 예쁜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이든지, 오늘 어버이주일에 우리 신앙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넌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3가지 차원을 하나로 엮어주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곧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센 머리"나 "노인"이라는 말속에는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모든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경을 받아야 합니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님을 섬기는데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분들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인 디모데전서 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그리고 16절에서도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은 오늘날보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혼자된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그 과부들을 교회가 앞장서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과부에게 자식이나 손자들이 있거든 과부가 된 어머니나 할머니를 교회의 구제에 맡기지 말고 자식들이나 후손들이 책임을 지고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부모님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은 불효이고, 그것은 곧 불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갈수록 부모를 꺼리는 세태가 되어간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먼저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모를 섬기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못한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신약의 본문 바로 다음인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간혹 신앙생활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부모를 외면하는 신앙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신에게 해 준 것이 없다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고 싶어 가슴앓이를 하는 게 부모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내게 됩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청년은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하였습니다.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는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쪽 눈을 아들에게 빼어준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이 부모님들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방법대로는 우리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모를 홀대하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고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살아 계신 분들은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부모님도 결국 내 어머님이고 내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부모님의 가슴이 아프다면 그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부모님의 생명을 평안함과 기쁨으로 지낼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게 자녀의 도리입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으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요약한 10계명 가운데 하나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것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6개의 계명 가운데 가장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넌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하신 말씀은 부모님과 같은 모든 어른들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들은 더욱 어른들을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마치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인 것처럼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섬겨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말씀에 공통으로 쓰여진 동사가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이나 어른을 섬기는 것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은 노인을 공경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어른들이 혹 판단을 잘못해서 실수했다 하더라도 꾸짖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행동이 늘려지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아이들에게만 눈높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 보세요. 자기 자식들에게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교육한다고 얼마나 열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배후에서 기도해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는 왜 눈높이를 하지 않습니까? 연로하면서 마음도 약해지고 몸도 약해진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못한다고 나무라고, 잘못했다고 꾸짖고, 마치 자기 자식을 꾸짖듯 부모를 꾸짖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새끼들이 뭔가를 물어올 때에는 깍듯하게 대답해줍니다. 어떤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존댓말까지 쓰면서 "이건 이렇게 해야지요. 알았지요?" 그러면서 연로하신 자기 부모님이 뭔가를 물어오면 귀찮다는 듯이 대꾸합니다. 자식들에게는 존댓말까지 쓰면서도 부모님에게는 반말하듯 합니다. 도대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2절에서는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어른들에게 어른 대우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 특별히 누군가가 돌보아줄 이 없는 어른들을 자기 부모님을 공경하듯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일은 교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로잔치 한 벌 열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작은 삶에서 어른들을 볼 때마다 마치 내 어머니, 내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고 말씀합니다. '경대하라'는 말은 존경하라(honor)는 말입니다. '참 과부'란 말은 주변이 돌보아줄 수 있는 친척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친척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홀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존경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권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약한 사람이지만, 존경해주어야 합니다. 어른으로서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때를 따라서는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게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넌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어른을 공경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어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두 개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노인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어른들을 또한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나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연약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내 부모님이 병들었을 때처럼 그들을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눈이 수북히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두 사람이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찾아갔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눈 속을 빠져나가며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 앞에 다가가 섰습니다. 그리고는 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 그러면서 이 무덤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 미국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눈구덩이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구덩이에 묻혀 있는 아이를 꺼내기 위해 수북히 쌓인 눈을 치우던 미국 병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눈구덩이 속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이가 울고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더욱 놀란 것은 흰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고는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않은 채 얼어죽고만 것입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미군병사는 언 땅을 파서 어머니를 묻어주고는,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그때 언 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와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해준 것입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눈이 수북히 쌓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 하나 벗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 청년은 알몸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무덤 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워냈습니다. 그런 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쓰러져 통곡을 합니다. "어머니, 그 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옷을 벗어 살아 계신 내 부모님의 몸에 덮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어른들을 내 부모님처럼 공경하고 존중해드려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가난하고 약해진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섬기고 공경하고 보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게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아직 사랑을 알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사랑을 알게 하셨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전달자로 우리의 부모님을 예비하셨고, 부모님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경외함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로 쓰임 받으셨던 부모님과, 우리 주위의 모든 어른들에게 공경함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무덤 앞에 옷 벗어 탄식하며 후회하기 전에, 그리고 사랑을 나눌 힘과 여건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우리의 부모님과 주변의 어른들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이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센 머리 앞에 일어서라
레 19:32 / 손상률 목사
시대와 환경의 변화는 인간 사회의 윤리나 도덕의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옛날의 전통적인 씨족사회와 대가족 문화도 오늘날 핵가족 시대와 다문화 사회로 바뀌어 지면서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기본이요, 천륜(天倫)입니다. 성경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습니다(엡 6:2).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이 지켜야 될 율법을 선포하면서 부모공경의 계명을 명시하였습니다(출 20:12).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부모를 홀대하거나 어른들을 무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말세적 현상에 해당됩니다(딤후 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하신 말씀은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게 하는 경노효친(敬老孝親)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이 주는 신령한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지나온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광야 여행을 마칠 무렵 백성들을 모아 놓고 "옛날 일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신 32:7).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신앙적인 역사는 잊혀져서 안 될 소중한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1) 선택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선택받은 민족의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택의 역사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시며 선택 하신 목적을 밝혀 주었습니다(창 12:1-2).
2) 구속의 역사입니다.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이 사실도 예언해 주셨습니다(창 15:13-14).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 가족 70명이 요셉의 초청을 받고 애굽에 내려갔습니다(창 46:1-27). 거기서 43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징치하시고, 왕과 백성들의 집에 장자를 죽이며, 짐승의 첫 새끼까지 쓸어버리는 죽음의 밤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출 12:29-36). 이것이 구속의 역사를 상징하는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전문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출 20:2). 이는 자자손손 구속의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뜻입니다.
3) 은혜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40년에 걸친 광야 여행을 마치면서 그 기간 동안 나타났던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하였습니다. 신명기 7:19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8: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자마자 그들 앞을 가로 막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였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였고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였으며 상상할 수 없었던 이적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역사를 부정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번영은 선진들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신앙적 사상을 계승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조상들의 역사가 후세 사람들에게 거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0:6). 역사의 연대와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그 저변에 흐르는 사상과 정신적인 맥을 짚어나가게 됩니다. 여기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한 것은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중심의 사상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존자입니다(출 3:14). 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신명기 6:4-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자자손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출 20:3). 그들의 역사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고전10:31).
2) 말씀 중심의 사상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에서 전개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을 살고 간 선진들이 땅위에서는 나그네로 유랑생활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언약하신 말씀을 붙들고 살았다고 하였습니다(히 11:8-16).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문에는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출 32:13). 그들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달픈 광야 여행을 감당하였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절대불변의 진리인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믿음과 건전한 생활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3) 성막 중심의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세상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출 19:6).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 이후 정처없는 광야 여행을 하면서도 백성들은 어디에서나 성소를 중심으로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제사장 제도와 제사하는 예법을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솔로몬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곧 시온을 향한 사상입니다(시 137:1).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은 제단 중심의 예배적 삶을 살아야 됩니다(롬 12:1).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중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3.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센 머리’는 부모나 어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살아온 역사를 비판하기에 앞서 오늘을 사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가 반성해 보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엄숙한 책임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1)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한 것은 어른에게 존경심을 표하라는 뜻입니다. 부모나 어른을 존경하는 것은 마땅한 행실이지만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나 남겨 놓은 업적들이 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보잘것없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엄청나게 발전하고 좋아진 환경이 저절로 되었거나 요즘 사람들이 잘해서 된 것처럼 착각한 나머지 부모의 세대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것은 교만한 태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지난날의 역사를 왜곡하고 편향된 시각에서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 또는 6.25전쟁의 참혹한 시기를 거치면서 나라를 지켜온 세대를 존경하며 그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됩니다.
2)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몸가짐에 단정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구별된 삶을 살아온 신앙의 선진들을 생각할 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위하여 자신을 다잡아야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신앙의 기초를 놓았던 선배들의 경건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리에 대한 개념이나 거룩한 삶의 본분을 망각한 채 육체의 소욕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라."고 하였습니다(딤전 4:7). 세상이 타락할수록 그리스도인의 빛된 삶이 요청됩니다(롬 13:11-13).
3) 책임감에 대한 다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그의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파고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창 26:18). 이삭의 아들 야곱은 밧단 아람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 앞에서 가나안 여자에게 장가들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창 28:1-4). 말년을 애굽에서 보낸 야곱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열두 아들을 모아놓고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축복의 예언을 하였습니다(창 49:2-28). 조상들이 살아간 자취를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선민의 전통과 사상을 계승하면서 발전시키겠다는 맹세입니다. 오고오는 후손들에게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주고 번영된 미래를 보장하는 축복의 지평을 열어 주겠다는 다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라
레 19:33-34 / 이윤재 목사
이 세상에 가장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녀와 헤어지는 부모일 것입니다. 오래 전에 구 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무려 5만 5천명이나 사망했는 데 그때 한 도시에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한 어머니와 딸이 건물에 눌려 생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하루, 이틀,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너무 힘들어 비명을 질렀습니다. “엄마, 목말라. 목말라”. 겨우 숨만 쉬면서 목숨을 지탱하고 있던 어머니는 딸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의 머리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광경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었을 때 자기 몸을 찢어 피를 먹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어두운 땅을 더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어진 유리 조각을 찾고는 지체없이 자기의 팔뚝을 찢어 피를 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어린 딸의 입술에 댑니다. 드디어 구조대가 도착하고 그들에게 후래쉬가 비춰졌을 때 어머니의 품에서 새끈 새끈 자고 있는 어린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피를 흘리고 죽었고 딸은 살아 있었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아낌없이 피를 쏟은 어머니 때문에 딸은 살았습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딸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공부를 위해 보냈지만 헤어질 때 쉽지 않았습니다. 27년간 교회 수양회 외에는 단 하루도 부모의 품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딸이었습니다. 그런 딸과 공항에서 헤어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영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만날 수 있고 다른 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공부때문에 헤어지는 데도 막상 헤어질 때가 되자 세 사람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아빠, 잘 있어”하고 손을 흔들 때 제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영종도를 짙게 덮은 안개는 마치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 교인중 가끔 자녀를 외국에 데려다 주고 오는 부모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부때문에 자녀를 외국에 떠나보내고 그리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참 위대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참으며 공부하는 자녀들의 마음도 참 대단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공부때문만이 아닙니다. 일 때문에 결혼 때문에 먼 나라로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TV에서 “러브인 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을 봅니다. 내용은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몽골등지에서 일이나 결혼을 위해 부모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꿈에도 그렸던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만나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눈물납니다. 어쩌다 가난하게 태어나 한국에 가면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고향, 그들이 남편과 자녀와 함께 어렵게 다시 고향을 찾는 순간, 그들 눈에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늙으신 부모님과 얼싸안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뻐하는 모습은 “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같이 살아야 하는구나”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눈물로 떠나온 고향을, 그렇게도 가슴에서 그리워 하는 부모를 행복한 얼굴로 만날 수 없다면, 한국에 와서 오히려 사는 것이 힘들고, 가정은 행복하지 못하고, 돈도 제대로 못벌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면, 먼 땅에서 그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모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 되겠습니까? 헤어진 것도 서로운 데 자신들의 아들이, 딸이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얼마나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입니까? 문제는 그런 일이 이 땅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게임때부터 잘 사는 나라로 알려져 우리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은 현재 120만, 전체 인구의 2%를 넘습니다. 이 수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곧 500만 외국인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다문화 가정의 수는 전체 가정의 13.6%, 열 쌍 중 한 쌍의 결혼은 외국인과의 결혼이며, 농촌 총각 10명 가운데 4명은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단일민족이리고 부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땅에 찾이온 외국인들과 함께 공존하며 행복한 동행을 꿈꿀 수 있는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입니다. 레19:33-34,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막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사랑하라.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마디로 요약됩니다. 첫째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둘째 나그네를 사랑하라. 셋째 너희도 나그네다.
먼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오늘 말씀 첫 번째 구절을 보시겠습니까? 레19: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우리가 나그네에 대하여 할 첫 번째는 학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암6: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성경에 “정의”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스파트”라는 말이 200번 더 나옵니다. 빈도수로 볼 때 “”헤세드“, ”은혜“ 다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에 맞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피부색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서 있는 위치, 형편, 지위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그 형상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정의는 그 사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잘되게 하기 위해 긍휼을 비는 것이라면 정의는 잘못되지 않도록 올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한마디로 정의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의는 특히 세 가지 대상을 향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는 자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요, 나그네는 주인이 없는 자입니다. 신10:18절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남편이며 나그네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면 하나님이 진노합니다. 신27:19절입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나그네들이 못살겠다고 소리치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2012년 10월부터 3개월간 노동부가 조사했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30.2%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보다 좋아졌고 기숙사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악한 상태에서 삽니다. 많은 사람이 공장에 딸린 작은 방이나 인근 주택에서 세를 얻어 살지만 방은 1-2평, 원룸인 경우가 많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사람도 4.1%, 식당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3%가량 됩니다. 기숙사에 살아도 주방, 화장실, 샤워장을 함께 쓰는 경우가 28%나 됩니다. 이렇게 열악하게 살다보니 쉽게 화재, 범죄, 성범죄에 노출됩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10명 중 1명꼴인 10.7%가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중 12.9%는 성매매 요구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폭력 가한 가해자의 88.9%가 회사의 사장입니다. 이러니 말도 못하고 신고도 못합니다. 신고하면 해고되거나 모독을 당합니다. 그래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56.4%가 신고조차 안합니다.
이러니 사방에서 원성이 자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필리핀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한 사장이 필리핀을 방문하기 위해 자기가 일하는 필리핀 청년들과 함께 마닐라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때 그와 함께 온 청년들이 사장을 둘러싸고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장은 급히 공항경찰대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은 청년들을 연행했습니다. 경찰들은 왜 한국인에게 폭행을 가했느냐고 묻자 필리핀 청년들은 자기들이 한국에서 취업하는 동안 그가 자기들에게 너무 많은 학대와 모욕을 당해서 우리 나라 가면 보자 하고 벼루고 있다가 공항에 내리자 마자 폭행했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장은 이 사건을 한국대사관에 신고하여 문제를 제기했으나 결국 그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많은 나쁜 일을 한 것이 드러나 강제 출국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중국을 여행하던 한국인이 취업 후 돌아간 교포 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돈을 빼앗겼다는 소식은 부지기수로 들립니다. 또 조선족 동포에 의해 한국인이 피살되었다는 소식도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목사님이 한국에 취업도중 산업재해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보상금을 전달하고자 동남아 몇 나라를 방문했답니다. 네팔에 갔는 데 청년 두 명이 힐끗 힐끗 살피더니 영어로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물어 왔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대뜸 우리도 한국말 좀 하는데 들어 보겠느냐 하더랍니다. 그래서 해보라고 했더니 “이놈아, 너 죽어 볼래” 하더랍니다. 다행히 목사 일행인 것을 알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그 말을 배웠느냐 했더니 한국에서 일할 때 기업주가 자기들에게 가장 많이 하던 말이랍니다. “이 놈아, 너 죽어볼래”.
그동안 중국동포들은 꿈을 안고 기회의 땅이자 고국인 한국에 와서 평생 벌 수 없는 돈 500만원에서 천만 원까지 비용을 부담하고 한국에 왔는 데 개중에는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고서 빚을 갚지 못해 몰매를 맞거나 가정이 파탄되고 야반도주하는 아픔을 얼마나 겪었습니까? 그나마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적 약점으로 이용해 얼마나 많은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우리가 기피하는 3D업종에 내 던져졌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중국동포 김 아무개씨가 부천 공장에서 분신자살을 했는 데 그가 공장 복도벽에 스프레이로 회사 사장을 향하여 “나쁜 놈 김 아무개, 천벌을 받아라”라고 쓰고 “한국이 슬프다. 金 아무개” 이름을 썼습니다. 무슨 한이 그렇게 많은지 죽어가면서도 저주를 퍼붓고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왜 이렇게 합니까? 우리도 가난한 시절이 있었고 우리도 독일로 사우디로 간호사, 광부로 가지 않았었습니까? 지금도 미국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그들이 안하는 3d업종에 종사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눈코 뜰새 없이 일하지 않습니까? 아예 우리는 나라가 없었던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에 가보면 우리 나라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땅이 넓습니까? 자원이 더 많습니까? 아니면 영어를 더 잘합니까? 지지리도 못살다가 한 30-40년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이렇게 외국인을 학대하니 도대체 이 나라가 정신이 있는 나라입니까? 없는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은 웬만하면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한 사람을 저주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다시 기억합시다. 33절, “너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아멘.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나아갑니다. 33절. 레19:33,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다같이 “사랑하라”.
나그네를 사랑하라
나그네는 학대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그네를 학대할 때 저주를 받는다면 나그네를 사랑할 때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그네를 사랑해서 축복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보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며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창18:2절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여러분, 여러분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 데 달려가 몸을 땅에 굽혀 절할 수 있습니까? “누구요? 더운 여름에” 하고 짜증내지 않겠습니까?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름에는 심방도 많이 안갑니다. 날씨는 더운데 손님이 온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려가 엎드렸습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렇게 까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려가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인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 히13:2에서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알았다면 “부지중에”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도 영접하지 않는 데 아브라함은 몰랐어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라가 축복을 받아 이삭이 태어납니다. “내년 이맘때에 네게 반드시 아들이 있으리라”. 천사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나그네는 천사였습니다. 그때 이미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여성으로서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나그네를 환영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손님을 대접해서 축복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입니다. 본래 가난하게 태어나 라합이 여리고에서 기생으로 일하고 있던 어느날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와 전쟁하기 위해 정탐꾼으로 라합의 집에 잠입한 것입니다. 이때 라합은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느냐 이들을 영접하여 대접하느냐. 만일 잘못되어 걸리면 라합은 스파이 은닉죄로 중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라합은 위험을 무릎쓰고 그들을 대접하고 숨겨줄 뿐 아니라 무사히 도피하게 했습니다. 성경 히11:31절은 이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이 한 것은 나그네를 숨겨준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마1장에 보면 살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 보아스를 낳습니다. 아마도 살룸은 그가 숨겨진 이스라엘 정탐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가 맞이한 나그네가 그의 장차 남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 라합이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도 못하고 아들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들입니다. 훗날 그의 아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지주가 되고 유대인중 유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땅에 나그네로 들어온 사람이 모압 사람 룻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 객지인 베드레헴에 와서 시어머니와 하루 하루 보리 이삭을 줍고 있던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그에게 보리를 주울 수 있도록 하인들을 시켜 더 많은 이삭을 남겨 놓기도 하고 나쁜 남자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적극 돌보아 줍니다. 결국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나은 아들이 오벳인데 그는 다윗왕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결국 이 집안은 나그네를 영접하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영접해서 그와 결혼했고 아들 보아스는 룻을 영접해서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윗 임금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왕의 혈통속에는 이방인 나그네의 혈통이 있었습니다.
제가 2년전에 안식월을 가졌습니다. 그때 영국을 방문했는 데 누가 소개해서 런던 브랜드우드 트리니티 교회 게스트룸에 묶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 옆에 방 하나를 꾸며 손님들을 모시는 게스트룸으로 활용하고 있었는 데 얼마나 친절한지. 할머니 몇 분이 매일 아침 와서 “good morning”. 인사하고 음식 넣어주고 신문 주고 우리가 밖으로 나가면 이부자리 봐주고, 냉장고에 음식 넣어주고, 너무 정성을 다해 저희 부부를 섬겼습니다. 끝나고 한국으로 오는데 선물과 탱큐 카드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때 제가 너무 은혜를 받아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해야 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지하 1층 사찰집사의 방을 선교용 게스트룸으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받기 시작했는 데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때 마침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는 데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설교자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안에서 훈련받는 목회자 훈련을 위해 한 분 목회자를 받아달라고 해서 머리가 대머리인 앤드류를 받아 두 달동안 머물게 하고 한국교회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는 저에게 며칠 게스트룸 불려 주고 완전히 땡잡은 것입니다. 담임목사 초청해서 설교하지, 신학생 앤드류 두 달동안 머물면서 한국교회 배우게 했지 완전히 본전 뺀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삼 5절,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나그네를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나그네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레19:34절,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리가 이 땅에 오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도 나그네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먹을 음식입니까? 친구입니까? 집입니까?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없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생에 주인이 필요합니다. 주인이 누구입니까? 오늘 필리핀에서 중국에서 오신 외국인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은 왜 한국에 오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나라에 여러번 가보았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고 풍성했습니다. 필리핀은 3천개의 섬이 있고 해변마다 아름다웠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80배가 크고 세계 대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한국에 오셨습니까? “한국에 가면 돈 번다”. 그래서 오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생각대로 돈은 잘 벌고 있는가요? 저는 여러분이 한국에 와서 돈도 많이 벌고 여러분의 꿈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꿈을 이루어도 그것으로 모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 와서 돈만 번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여러분을 한국으로 오게 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나라보다 작은 한국에 굳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주인을 만나라고 보내셨습니다. 다른 것 다 있어도 인생의 주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려고 여기 보내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것은 일자리, 직장,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미신, 우상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한국에 보냈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돈만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와 법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한국에 한때 대단한 기개를 가진 강골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미아리의 김강자 총경입니다. 그가 서장직을 걸고 창녀촌을 없애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녀촌은 없어지지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더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왜 안됩니까? 돈이 없고 힘이 없어서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안됩니다. 죄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타락시킵니다. 1930년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세 가지 자유를 말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 가지로부터 다 자유를 얻었다 해도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한국도 하나님믿기 전에는 가난했습니다. 한국도 하나님 믿기 전에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이만큼 사는 것은 하나님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여러분이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돈으로 한정하지 마십시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따라 오지만 돈을 믿으면 돈도 잃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분당에 한신교회 생긴지 15년이 되었습니다. 15년이면 이제 많이 자랐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사람을 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민족이든 세계민족이든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1998년 8월 16일, 이 교회가 처음 입당하는 날, 당시만 해도 아직 초창기였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입추의 여지가 없이 예배드렸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교회 짓고 처음 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초청하여 대접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처음부터 우리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남북의 소외된 영혼뿐 아니라 이 땅에 찾아온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교회였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회당에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낫고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낫다”. 예배가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나그네라면 교회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여관집입니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의 규칙에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손님은 곧 그리스도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손님이 천사였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천사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온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 하나를 영접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 하나를 영접한 것입니다. 나그네는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되 이 땅에 연연하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 및나는 사람들은 천국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땅의 것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의 것만 목표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하늘 나그네, 하늘을 목표 삼아 길을 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축복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큰 힐링
레 19:33-37, 고전 13:1-13, 요 15:12-17 / 인명진 목사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이제 식상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위기가 위기라면 대책이라도 간구해 볼 텐데. 위기가 만성화되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입니다. 기독교 인구의 급속한 쇠퇴는 구체적인 통계숫자를 제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상입니다. 5년마다 시행하는 통계청의 종교 인구 조사에서 개신교 인구만이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교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언론에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은 예수 믿는 우리가 들어도 부끄러운 자태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진리는 따르지만, 다니고 싶은 교회가 없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백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도 만들어졌습니다. “가나안교회 성도” 안 나가 교회를 다니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국사회 미래의 고질적인 문제인 저 출산과 맞물려 엄청난 위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미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약 2020년경에는 한국교회의 임계점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지점을 임계점이라고 말하는데 대략 202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황금시절은 다 지나가고 이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드릴 수 있는 위로는 교회만이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나라도 같은 위기의 선상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한국교회 성장의 곡선과 대한민국 성장의 그래프는 거의 일치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할 때에는 우리나라도 성장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쇠퇴와 함께 나라도 여기저기서 구멍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위기의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지난 1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보내었습니다. 극심한 자연재해도 비교적 드물었고,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과학 기술은 인간을 우주로 보낼 만큼 발전했고, 문명의 이기는 인간의 생활을 너무도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글로벌 경제는 급속도로 부의 규모를 키워왔고, 세상의 학문은 더욱 정교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인류가 100년 전의 사람들보다 행복하냐는 질문입니다. 이런 번영을 누리지 못했던 100년 전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오늘 우리가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안을 느끼고 있고, 작은 일에도 울화가 치밀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평소에 가장 빈번하게 느끼는 심리상태는 첫 번째가 피곤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불안하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 나전도사님이 사는 아파트에 부부싸움을 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가스 밸브를 틀어놓고 불을 질러 아파트 주민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소식은 뉴스감도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요즘 분노로 인해 미쳐가고 있습니다. 보복운전이 우리가 흔하게 만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왜 기분 나쁘게 내 앞에 끼어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던 불안과 분노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피로사회입니다. 불안하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정말로 팍팍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집단적으로 험난한 세월을 헤쳐 왔습니다. 1997년 IMF 사태가 분기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IMF가 터졌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친 것이지요. 직장을 잃어버린 중산층이 하층민으로 추락한 사람들이 우리 이웃들 가운데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우리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노숙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노숙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가족이 해체 당한 사람들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는 물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전 세게 어느 나라도 하지 못한 전 국민 금모으기로 민족 저력을 발휘하면서 IMF의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져 갔고, 경쟁은 더 심화되어 갔습니다.
물론 이 위기의 과정에서도 자본과 정보를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지요. 소위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는 양극화가 진행된 것이지요. 빈부의 격차가 자꾸만 벌어지는 원인은 간단합니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자본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커져 가면 양극화는 더 심화되어 갑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다수 서민들은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이구나. 아무도 나를 돌보아 주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든지 내 힘으로 살아남는 수밖에 없구나.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져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슴 아픈 한국 사회를 분석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나미 교수가 쓴 “한국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이 책 제목을 보자마자 괜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오래 전에 칼 포퍼가 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인 이나미 교수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서문에서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굉장히 주관적일 것 같고, 감정적일 것 같은 문제를 논리정연하게 펼쳐나갔습니다. 한국사회를 12 가지 콤플렉스가 움직이는 사회라고 보고 접근한 것입니다. 물욕, 허식, 교육, 집단, 불신, 세대, 분노, 폭력, 고독, 가족, 중독, 약한 자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과 비교하면서 만들어가는 병적인 질투심”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 명품 소비에 열광하고, 면접에 통과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성형수술에 매달립니다. 이것은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이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세계 최하위 수준의 출산율이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 없어서 못 살겠다. 돈 없어서 결혼 못한다. 돈 없어서 아이 못 낳는다. 돈 없어서 아이 교육 못 시킨다. 아예 이런 말에 지배를 당하여 모든 것을 돈으로 물질로 평가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피곤하고, 불안하고, 그냥 화가 납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분노와 불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단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안과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힐링이 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나는 지금 위로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서점가에 나갑니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지만 서점가에 진열 된 책을 통해서 사회의 흐름을 보려고 노력 합니다. 지난 3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주제는 힐링입니다. 아프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나 처방보다, 일단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기 원하는 대중의 심리 때문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제가 실소를 금하지 못한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나온 청춘을 위로하는 책이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제가 책 이름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겠습니다. 서울대 교수이신 작가는 “그래 서울대생들도 아프니까, 그래서 청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상위 0.01% 서울대 학생들이, 아픔에 대해서 알기는 하는 것일까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과 정보와 인맥과 자원을 차지하게 될 서울대 학생들이 아프다고 호소하고, 그것을 위로해 주다니!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소수의 엘리트 사람들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곤하고 힘들겠지요. 힐링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이때의 힐링은 이 시대의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힐링과는 전혀 다른 성격입니다. 더군다나 ‘20대의 불같은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청년들에게, 내일을 이끌고 나가야 할 젊은이들에게 도대체 힐링이라는 말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심지어 서울대 학생들도 아파할 만큼 힐링 만능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상위 0.01% 사람들조차, 자기의 아픔을 타인의 아픔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 때문에 제 마음도 덩달아 아팠습니다. 저들이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설 사람들인데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하는데 자기 아픔만 알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나라가 걱정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힘들다보니,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보다는 자신의 아픔에 주목하다보니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도 위로 받고 싶습니다. 교회가 거대한 힐링의 무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도 대부분 위로와 힐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상처 입은 영혼을 힐링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힐링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힐링이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아픔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전보다 아픔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힐링이 복음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힐링이 내세우는 슬로건은 간단합니다. “자신을 위로하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만을 힐링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힐링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결국 자신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원대한 사랑이 복음입니다. 아픈 세상,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복음을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복음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신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상담심리학이 신학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찬송하고, 말씀을 통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거나 상담 받는 장소로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으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 치유가 교회의 메인 메뉴로 등장했습니다. 변질된 것이지요. 아니 타락한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을 것입니다. 위로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교회에서나마 위로 받고 싶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위한 교회의 힐링은 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상한 육체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힐링은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서는 점점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는 힐링 사건에서 십자가 사건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직접 지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후반부에 사랑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자기 몸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속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한 동정과 치유는 더 큰 십자가 사랑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조차도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영역을 더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큰 사랑으로 커져가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의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소개하기 전에 12장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늘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바꾸어서 번역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더욱 더 큰 힐링을 사모하라 내가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랑은 나만 치유하는 힐링이 아니라 아파하는 이웃과 나를 동시에 치유하는 가장 큰 힐링 완벽한 힐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을 이어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리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러분,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힐링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이 멈추면 안 됩니다. 더 성장해야 합니다. 힐링에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교회에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교회로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받은 상처를 위로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는 단계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그것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교회다울 수 있고, 병든 세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 있는 한국교회가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가장 큰 힐링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래 된 새길”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사랑입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식상하다고도 말할 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랜 된 그 길에서, 식상한 그 길에서, 뻔한 그 길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오래된 새 길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아파하고 힘들어 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 해 보십시오. 아마 손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아픔 가운데서 “너 자신을 위로하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나에게 힐링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지만 자신을 향한 사랑을 너머서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큰 사랑의 강에 도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갈릴리교회를 오시면서 아마 집 앞에 있는 여러 교회를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수원에서, 일산에서, 잠실에서, 정릉에서, 시흥에서, 그리고 강남에서 인천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습니다. 왜 여기 갈릴리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그 흔하게 받을 수 있는 위로도 받지 못하는데 왜 이 갈릴리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갈릴리교회 공동체 속에 가장 큰 힐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질되지 않은 원시복음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자라게 만들고, 이웃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가고, 사랑이 분노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갈릴리교회에 있습니다.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나긋나긋한 말씀은 듣지 못해도, 그 큰 힐링,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 본문인 서신서 말씀 사랑장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말씀도, 복음서의 말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줄을, 그리스도의 제자 된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는 화려했던 옛 시절은 지나고 이제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날의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힐링,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랑이 이 혹독한 겨울을 이기게 만들 것입니다. 가장 큰 힐링, 사랑은 복음의 시작이요, 복음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이들이 아파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너 자신을 위로하라.” 하면서 자신을 향한 힐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 된 우리는 힐링에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너머서서 이웃을 사랑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큰 힐링인 사랑을 실천하여 함께 행복한 세상 만들어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