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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거란에서 그린 풍자만화, 백유흑화관
거란에서 출토된 백유흑화관[흰 바탕에 검정색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단지]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다. 단지의 한쪽 면에는 관모를 쓰고 가죽신을 신고 배가 나온 위엄 있는 송 나라 관리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궁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딱한 관리의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만화라고 한다. 이 그림은 송 태종이 고량하에서 패하여 허둥지둥 도망치는 광경을 풍자한 것이라고도 하고, 손에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가 일단 직책을 잃게 되면 이내 풀죽은 모습이 되는 탐관오리를 풍자한 것이라고도 한다.
- 자신의 팔뚝은 자른 술률평
어느 날 거란의 태후 술률평이 한족 신하인 조사온에게 자신의 남편 ,아율아보기의 무덤에 같이 순장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조사온은 “태후는 돌아가신 황제와 제일 가까우신 사이면서 왜 순장되지 않습니까? 나를 비롯한 신하들이 돌아가신 황제를 죽음으로 모셔야한다는 것이 어찌 돌아가신 황제의 뜻입니까!”
술률평은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재빨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가 어려서 어미가 없으면 안 된다. 게다가 나라에 주인이 없으니 나는 당분간 돌아가신 황제를 따라갈 수 없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돌연히 칼을 꺼내 들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오른손을 찍어내어 이것을 아보기의 관 속에 넣어 자신을 순장하는 대신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그녀의 기개는 물론이요, 술률평이 왼손잡이어서 자신의 오른손을 잘랐다는 정보도 알 수 있다. 훗날 야율덕광이 요 상경에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해 ‘팔뚝을 자른 누각(단완루)’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워 이 일을 기념하였다.
- 거란의 맞춤형 사신 접대
송나라의 사신으로 거란 승천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 손근과 그의 수행인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사신들은 길을 가면서 두 종류의 식사를 하였다. 하나는 금 그릇에 담은 풍성한 한족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그릇에 담은 소박한 거란 음식이었다.
- 구양수의 구리(자두) 사랑
거란은 중원문화를 동경해서, 송의 대학자인 구양수가 사신으로 왔을 때 거란은 떠들썩했다. 거란 황제는 그에게 꿀에 재운 자두를 접대했는데 구양수가 그 맛을 매우 좋아했고 즐겨먹었다. 거란 사람들은 그의 ‘자두사랑’에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후 꿀에 재운 자두를 ‘구리’(歐李:구양수의 자두)’라고 불렀다.
- 운좋게 되찾은 한광사의 묘지명
1994년 어느 날, 내몽고자치구 파림좌기 박물관에 한광사의 무덤이 도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굴당한 무덤은 어째서인지 묘지명의 덮개만 남고 묘지명은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한광사의 묘지명이 없어졌다는 소식이 경찰서에 전해지자, 경찰 고위층들은 즉시 움직였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해질녘쯤에 두 개의 석판을 실은 트랙터 한 대가 무덤 주변 마을을 급히 빠져나가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석판의 윗면이 푸른 풀로 덮여있었다. 이것을 압수해 묘지명 덮개석과 맞추어보니 꼭 맞았다. 도굴꾼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한광사 부부의 묘지명을 다른 지방에 팔 생각이었고,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체포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 한족과 재혼한 승천태후 소작
한족 관리였던 한덕양과 거란의 태후 소작은 일상생활을 같이 하였는데, 평범한 부부처럼 같이 먹고 살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소작이 정식으로 한덕양과 재혼했다고 여겼다. 물론 태후와 신하가 재혼하는 것은 한족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일이었으나 거란인의 관점에서는 거란 귀족의 도덕규범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다.
송과 요가 전연에서 회담할 때 송 나라의 담판 대표였던 조리용은 승천태후 소작이 군대에서 한덕양과 타차(駝車)에 나란히 앉아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타차는 낙타가 끄는 수레 위에 장막을 친 것으로, 사람이 그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만약 부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태후와 ‘나란히’ 앉았을까? 태후 또한 신하와 ‘나란히’ 앉으려고 할까?
성종의 계부 사랑도 남달랐다. 그는 매일 자신의 두 아들을 한덕양의 거처에 문안 인사를 올리게 했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덕양이 머무는 곳에 갈 때는 반드시 2리 떨어진 곳에서 수레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당부했다. 또한 한덕양이 수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친왕 두 명이 앞서 가서 영접하고 문안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한덕양은 승천태후의 신임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승천태후에게 충성하여 그녀만을 사랑했고, 거란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러한 한덕양의 지지와 영향 덕분에 소작은 거란국의 제도와 풍속의 발전을 위해 잇달아 과감하고 패기 있는 개혁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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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눈이 맑아 천리 밖까지 또렷히 볼 수 있었다는 거란족,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중국역사의 숨은 강자
그들의 힘과 지혜는 어디서 온 것일까
중국사의 숨겨진 강자, 거란에 대한 역사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2013년 8월 중국 CCTV-10 ‘탐색과 발현’시리즈로 기획된 역사 다큐멘터리 ‘거란왕조(契丹王朝)’의 대본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중국의 역사와 고고학의 성과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재조명해야 할 주제를 선정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제작되었다. 따라서 해당 주제에 관한 저명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출연하여 설명하였고, 풍부한 유물, 생동감 넘치는 연출과 정교한 3D 복원기술을 사용하여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조차도 거란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끊임없는 전쟁을 치룬 용맹한, 그러나 야만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 묘사된 거란은 한족들을 대폭 받아들인 포용성을 갖춘 개방적 민족이며, 수준 높은 미술품을 창조하고,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한 자주적인 나라였다. 한마디로 다양하고 수준높은 문화를 발전시킨 동아시아의 패자였음을 강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2e6Zair6mY
이 책은 쉬운 문체와 재미있는 역사 속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거란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의 도판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요삼채 같은 다채로운 도자기부터 귀족의 무덤에 넣었던 금 가면 같은 정교한 금속 유물에 이르기까지, 거란의 문화유산은 그들의 화려한 문화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 사진도 같이 수록했다.
최근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들은 북방왕조를 주목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요 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주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느라고 열심히 연구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한족 중심으로 알고 있던 동아시아의 역사를 좀 더 다채롭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거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요나라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
한국인에게 거란이라는 단어는 막연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세 차례나 공격한 침략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거란이라는 단어는 야만이라는 뜻과 비슷하게 들린다고 하면 심한 표현일까? 교과서에서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세 차례나 침공한 침략자로 묘사되어 있다. 서희의 뛰어난 담판으로 거란은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고, 강감찬에게 귀주에서 대패한 뒤로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송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만주 초원을 장악하였으며,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모습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야만이라는 인상은 이 모름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고려와 송, 그리고 거란의 천하
10세기에서 12세기 초반은 동북아시아에서 고려와 송, 거란이 정립하고 있던 시기였다. 절대 강자가 동아시아를 지배하지 못하던 이 시기에 각국은 고유한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군웅들이 활약한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통일한 송에서는 유학에 바탕을 둔 사대부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거란에 매년 세폐를 바치며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거란은 송을 공격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송을 멸망시킬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였고, 스스로 중원을 지배하며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고려는 송의 문화를 흡수하고 거란과 일면 대립하면서 독자적 영역을 수호하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거란의 포용성과 ‘습속에 따라 다스리는’ 유연한 통치술
이 책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한족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거란의 포용성이다. 거란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한족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한족은 한족의 관습에 따라 다스린다’는 통치술을 발휘하였다. 이를 위해 거란인을 다스리는 관청과 한족을 다스리는 관청을 따로 두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인구가 적은 민족이 문화 기반이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때 유용하였으며, 거란이 제국을 형성하고 운영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거란의 불교미술과 거란대장경
거란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백탑을 비롯한 불교 유물들은 장엄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며, 그들이 조판한 대장경은 고려가 대장경을 조성하는 데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탑을 비롯한 거란의 문화는 고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잊혀진 북방왕조, 거란을 다시 살펴보자
역사상의 북방 국가들은 우리 민족과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거란도 2세기 동안이나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교류를 계속하였지만, 여전히 낯선 야만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는 데서 기인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번역자들은 이러한 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이 책을 소개하기로 하였다. 이 책이 거란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나아가 북방 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깊게 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번역했다.